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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카스트로

조회수 2016. 12. 20. 22: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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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카스트로

회고하자면 안 그런 해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2016년은 변화의 해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그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영국의 왕좌를 계승해 본격적인 세계경찰의 임무를 맡겠다고 자임했다. 그 뒤에는 다른 모든 세계를 미국 중심의 개방형 무역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한 세계적 투쟁에 나섰다. 정치적으로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시작됐고, 냉전이 끝난 뒤에는 세계화와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그 승리가 세계만방에 공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이 맡겠다고 선언한 그 역할에 모종의 변화를 암시하는 중대한 변화다. 상당수 미국인이 더는 세계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을 원하지 않았고, 자유무역의 확대로 공장이 경쟁력을 찾아 중국과 멕시코로 이전하는 것을 원치도 않았으며, 자신들만의 편한 세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외국인의 유입도 원치 않았다. 세계화와 기술 혁명은 미국을 부유하고 강력하게 했지만, 그것은 마치 조약돌로 높은 탑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쌓아놓고 나면 멋있지만, 탑이 높아질수록 그 높이 때문에 점차 취약해졌다.

트럼프가 바꾸겠다고 자임한 미국의 패러다임은 20세기의 강력한 세계 경찰로 개방형 무역질서를 수호하는 ‘보이지 않는 주먹’이 되겠다는 자기규정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예비되었지만, 그때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었다. 미국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를 관리하기 위해 합의된 국제연맹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전간기 질서를 파행으로 만들었다. 미국은 대공황과 이어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내외적 위기를 맞고 나서야 다시 무대에 등장한다. 이때 미국을 국제질서의 정점에 올린 대통령, 지금 우리가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 20세기 미국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대통령이 바로 프랭클린 댈러노 루스벨트다.


1940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를 정복하며 유럽 지배를 목전까지 둔 상황에서 미국은 역사의 부름에 응답하느냐 마느냐, 즉 세계 경찰의 임무를 맡느냐 마느냐로 논쟁 중이었다. 논란 속에서 루스벨트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그 소임을 다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때 루스벨트에게 서툰 영어로 편지를 보낸 12살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 또한 우리가 보내온 20세기의 산물이자 그 시대를 만들어온 거인이 된다. 그 편지는 다음과 같다.

“나의 좋은 친구 루스벨트. 나는 영어를 잘 몰라요.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쓸 만큼은 압니다. 나는 라디오 듣는 걸 좋아하고, 당신이 새로운 시대를 위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는 12살이에요. 나는 어린아이지만 많은 생각을 해요. 그러나 내가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쓸 거라는 생각은 안 드네요. 당신이 괜찮다면, 미국 10달러 지폐를 하나 줄 수 있나요? 왜냐면 제가 10달러 지폐는 한 번도 본 적 없거든요. 하나 갖고 싶네요.

나는 영어는 많이 못 하지만 에스파냐어는 정말 잘한답니다. 내 생각에 당신은 스페인어는 매우 못해도 영어는 매우 잘하겠죠. 왜냐면 전 미국 사람이 아니고 당신은 미국 사람이니까.”
  • 한 12살 소년이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출처: archives.gov)

이 편지를 쓴 사람의 이름 피델 카스트로. 이 소년은 후에 쿠바의 혁명가이자 독재자가 된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미국이 트럼프의 당선으로 종언을 거둔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세상을 떠났다.

꿈의 국가 쿠바 vs. 실패한 국가 쿠바

한때 ‘쿠바 모델’이라는 말이 돌았던 적이 있었다. 전 국민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현한 꿈의 국가. 신자유주의의 성장 담론에 매몰되지 않고 삶의 가치와 행복에 주안점을 둔 나라.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구별되는 쿠바의 사회관과 경제관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쿠바의 의료에 대한 찬사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의사들을 세계 각지로 보내 경험을 쌓게 하고, 인도주의와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쿠바에 들어와 자국민을 상대로 봉사한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야말로 쿠바는 평등과 연대의 정신을 실현한 카리브 해의 빛나는 진주와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쿠바의 ‘실상’을 고발하는 이야기들이 다시금 올라왔다. 국민 대다수가 제대로 인터넷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쿠바가 자랑하는 의사들은 사실은 외화수급용으로 ‘수출’되곤 했으며, 국내 의료 시스템은 간신히 지탱하는 수준이지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언제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환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급제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통제경제는 곧 만성적 물자 부족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기회를 찾을 수 없는 쿠바의 현실에 절망하고 쿠바를 떠나려 했고, 소련 해체 이후 이 나라의 경제는 관광업과 쿠바 이민자들의 송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명백하게 쿠바는 실패한 국가였다. 


둘 중 어느 것이 진실일까? 나는 두 가지 시각 모두 조금씩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카스트로라는 20세기의 거인이 남기고 간 빈자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쿠바에 관해 한마디쯤은 해두고 싶어 이 글을 쓴다.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 1926년 8월 13일 ~ 2016년 11월 25일,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2.0)

독립 이후의 과제, ‘경제 개발’

잠깐 눈을 돌려서 카리브 해에서 인도로, 시계를 돌려서 약 100년 전으로 가보자. 1920년, 후에 인도 초대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사진)는 인도 시골에 방문해 일생동안 지울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당시 네루는 그 시골 마을을 간디 대신 방문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갔는데, 차가 지날 길이 없어서 그곳 농민들이 임시로 길을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그마저도 진흙탕이어서 차가 앞으로 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네루는 당시 모자를 쓰고 비단 속옷을 입고 있었는데, 인도 전역에 창궐한 빈곤의 참상과 잘 대비되는 것이었다. 네루는 그 때 그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꼈고, 인도에서 빈곤을 없애버리는 것을 인도의 독립과 함께 해야 할 지상 과제라고 여긴다. 


인도를 쿠바로 바꾸고 네루를 카스트로로 바꿔도 무방하다. 탄자니아와 니에레레로 바꿔도 그렇다.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가면서 독립을 쟁취한 각지의 개발도상국은 선진국에 비하면 수십 년 뒤처진 자국 경제를 현대화하길 원했다.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빈곤을 퇴치하고, 의료와 교육을 확충하고자 했으며 산업경제로 도약하고자 했다. 


개발’은 독립을 얻어낸 민족주의 활동가의 당면 과제였다.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그것과 다른 무엇이건 그건 상관이 없었다. 이들은 그렇게 자신의 정당성을 계속 인정받으면서 모국에서 불멸의 영웅으로 남고자 했을 것이다.

쿠바 모델의 탄생

물론 쿠바는 인도나 탄자니아와는 다른 면이 많았다. 우선 쿠바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립했다. 미국이 에스파냐와의 전쟁 이후 쿠바를 획득한 뒤 1902년에 쿠바를 주권 국가로 독립시켜준 것이었다. 또한, 당시 쿠바는 인도나 탄자니아 같은 극빈 국가와는 달랐다. 1950년대 쿠바는 인구의 절반가량이 도시에 살았다.


하지만 쿠바 경제와 사회는 불안했다. 경제는 거의 설탕 위주로 돌아갔으며, 농촌 지역은 문맹과 빈곤의 온상이었다. 쿠바의 천연자원은 대체로 미국 기업에 의해 장악됐고, 금융 또한 그랬다. 농촌 지역의 실업과 빈곤은 수도인 아바나로의 이주를 촉발시켰지만, 아바나는 이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한편, 미국이 미국 지향적인 도시 상류층, 그리고 미국에 설탕을 공급해주는 지주와 농촌에 사는 빈곤한 농민 사이의 긴장에서 누구 편을 들어줄지는 자명했다. 그 루스벨트는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에 대해 이렇게 평한 바도 있다.

“소모사는 분명 개자식이지. 하지만 그 자는 우리 개자식이야.”

결국, 쿠바의 사회적 긴장과 균열을 극복하지 못한 바티스타 정권은 카스트로가 그란마 호를 타고 와서 이끈 혁명군에 의하여 전복됐다. 그들은 쿠바를 진정으로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주국으로 만들고자 했고, 빈곤과 무지를 없애며 쿠바를 개명된 국가로 거듭나게 하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적 개발을 향한 진정한 비전이 시작된 때는 쿠바 혁명이 승리한 뒤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을 획득한 뒤 카스트로는 본격적으로 우리가 아는 쿠바 모델이라는 것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카스트로는 소련의 공산주의 계획경제를 쿠바에 이식했다. 미국과의 무역은 공산권 내부 분업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토지개혁을 실시해 불평등을 해소하고, 교육과 보건 분야를 국가가 나서서 독점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쿠바 모델이 탄생했다.

쿠바 모델은 전후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을 추격하고 근대화를 이루려 하면서 만들어낸 수많은 모델 중 하나였다. 이들 국가는 때로는 소련을 따랐고, 때로는 미국을 따랐으며, 때로는 일본을 따라가면서 자기 사정에 적합한 개발모델을 찾고자 하였다. 농촌은 너나 할 것 없이 빈곤하고, 다수 국민이 문맹이며, 근대적인 위생과 보건 인프라는 전혀 갖추어지지 않던 나라들은 각자의 정답을 찾아 헤맸다.


오늘날 한국에서(혹은 선진 사회에서) 쿠바 모델을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 특히 쿠바를 배워야 한다는 담론은 이 점을 간과한다. 쿠바 모델은 근본적으로 개발 모델이었다. 분명 쿠바는 주변 카리브 국가들 혹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비하면 높은 교육 수준과 기대수명의 향상을 이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에 착수한 수많은 나라 중에서 쿠바의 성공은 잘 쳐줘도 절반의 성공이다(미국의 제재 등 쿠바가 처했던 온갖 악조건은 별론으로, 그 결과만 놓고 보면 말이다). 분명 높은 교육을 받고 더 오래 사는 쿠바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아이티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심지어 미국의 하층계급보다도 더 많을 것이며 삶의 질도 그들보다 더 좋을 것이다. 


다만, 결국 그렇게 쿠바 정부의 막대한 세금을 투입해서 쿠바 국민을 가르쳐봤자 그 수준에 걸맞은 일이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근로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는 현실에 불만이 있지만 순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탈출하는 것밖에 선택지는 없다. 성공적인 개발은 단순히 교육과 기대수명을 높이는 것이 아니고, 아니어야 한다. 풍족한 소비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소비를 위한 소득 수준도 갖춰져야 하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전문직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선순환하고, 계속 발전할 수 있다. 


사실 높은 교육과 보건 수준을 달성하는 것은 이런 좀 더 높은 단계의 사회를 위한 예비단계와도 같다. 그것이 최종적인 경제의 현대화와 소득 증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아이에게 젖만 먹이고 이유식으로, 그리고 밥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과도 같다. 결국, 쿠바는 그렇게 정체되었고, 심지어 그 피델 카스트로조차도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더는 쿠바에서도 쿠바 모델은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은 쿠바에 배울 게 많지 않다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쿠바보다 훨씬 잘 해왔다. 대다수 동아시아인은 쿠바인들보다 교육 수준도 높으며 노동생산성도 높다. 보건의료는 무상은 아닐지라도 기대수명은 쿠바와 크게 차이 나지 않고, 쿠바보다 훨씬 높은 소득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사회안전망은 빈약하고 불평등은 심할지 몰라도 이는 얼마든지 시민의 정치적 선택으로 개선할 여지가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든 살아갈 수는 있게 만들어주는 대신 인터넷조차도 되지 않는 나라를 원하는 사람이 이제 한국에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실 우리는 쿠바로부터 배울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선진국이 대처해야만 하는 문제는 이제 어떻게 쿠바 수준의, 그저 그런 수준의 교육과 의료를 평등하게 제공할 것인가가 아니다. 분명 1970년대 이후로, 한국은 1997년 IMF 이후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훨씬 심대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의료와 교육에서의 불평등을 지적한다. 


그래서 의료와 교육 불평등 문제가 거의 없는 쿠바를 마치 이런 문제와 부조리를 ‘해결’한 사회처럼 보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는 명백한 착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고도화된 현대 경제, 후기 산업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제 선진국들은 적은 생산가능인구로 다수 실업자와 은퇴자를 부양해야 한다. 기대수명이 80대를 넘어 고공 행진하며 의료비 부담이 치솟는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쿠바에서는 아직 나타나지조차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가 되려 우리에게서 배워야 한다(중국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 훨씬 많겠지만). 


높은 수준의 인적자원으로 어떻게 경제를 활성화할 것인가?

그렇다고 쿠바가 ‘텅 빈 컵’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쿠바를 실패한 국가이자 빈곤에 신음하는 독재국가로 보는 시각에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쿠바는 물이 가득 찬 컵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이 텅 비어 있는 컵은 더더욱 아니다.

  • 쿠바는 가득 찬 컵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텅 빈 컵은 더더욱 아니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 반쯤 찬 컵 쿠바.

쿠바를 텅 빈 컵으로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로 쿠바 모델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한 개발모델로 보지 않는다는 같은 실수를 한다. 당연히 쿠바를 선진 경제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쿠바는 물이 반밖에 없는 컵일 것이다. 하지만 전후 개발에 돌입했던 수많은 나라 중에는 쿠바만도 못한 나라는 여전히 즐비하다.


앞서 언급한 네루는 근대화를 향한 불타는 사명을 갖고 인도를 거대한 트랙터들과 제철소를 자랑하는 소련과 같은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소련을 목표로 한 쿠바와 달리 인도의 개발 수준은 처참해서 기대수명과 교육수준은 쿠바에 미치기엔 턱도 없고, 사회적 불평등도 훨씬 심각하다. 인도는 그나마 다행이다. 정부라도 유지되고 있으니까.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유명했던 아이티는 사실상 나라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사회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 개발도상국 대다수는 개발도상에 오르는 데 실패했고, 올라도 제한적인 성공에서 그치곤 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숱한 개발 모델 중에서 쿠바 성적표를 하위권이라고 하는 건 너무 박한 평가이다. 만약 카스트로가 혁명에 실패했다면 쿠바 경제가 성장을 계속하여 선진경제권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발전적인 리더십이 아바나에 새로 들어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코스타리카와 같은 국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혁명이 분쇄된 뒤에 흔히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정치적 환경에서 그런 것까지 쿠바에 바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보다는 계속되는 좌파 집단과의 내전으로 계속되는 사회적 혼란과 설탕 단일 품종에 의존하는 경제가 위기를 불러오는, 마치 니카라과와 같은 국가가 되는 길이 더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런 국가들보다는 쿠바가 낫다. 그리고 세계에는 아직도 쿠바를 진정한 유토피아로 보이게끔 할만한 밑바닥 국가들이 많다.

책임 있는 정부의 존재

경제학자인 아마르티야 센(사진)은 그의 저서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진정한 자유는 한 개인이 진정으로 행할 수 있는 역량(ability)에 초점을 맞춰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아마르티야 센,인도 출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개발경제학자

센에 따르면 한 개인이 역량을 갖추려면 단순히 소득과 형식적인 자유만 주어져서는 부족하다. 사람은 적절한 수준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생명의 위협에서도 안전해야 한다. 센의 개념은 제프리 삭스 등의 개발경제학자들, 세계은행과 UN 등 국제기구의 개발목표로 이어졌다. 개발이라는 것이 인간 역량의 확대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면, 여전히 개발 모델로서 쿠바 모델의 일부를 차용해보고 일부를 실험해보는 것들은 나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쿠바의 중앙계획경제는 더는 모델로 차용할 수 없다. 카스트로 본인도 실패했다고 말하는데 뭘 어찌할 것인가. 하지만 개발에 비교적 성공한 다른 나라들까지 포괄해 본다면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는, 하지만 이제는 재현하기 아주 어려운 몇 가지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빈곤국 대다수를 구성하는 ‘빈민의 요구에 책임성 있게 반응할 수 있는 정부의 필요성’이다. 20세기 공산주의 실험은 소련의 해체와 함께 대실패로 끝났다. 특히나 탈식민 국가의 실험은 더더욱 파괴적이었다. 북한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고, 공산당 정부가 훑고 간 에티오피아, 앙골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은 오늘날에도 빈곤과 사회 혼란에 신음한다. 이들 공산당 정부의 공통점은 국민 다수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가를 책임있게 운영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광범위한 사회 개혁과 토지 개혁을 추진하고, 교육과 보건을 확충하는 대신에 폭력을 사용하는 데만 몰두했다. 


하지만 쿠바는 달랐다. 쿠바도 마찬가지로 실패가 예정되었던 20세기 공산주의의 길을 걸었다. 쿠바의 개발은 그래서 실패했다. 쿠바는 선진 경제로 도약하지도 못했고, 쿠바인들은 인터넷도 하지 못하며, 얼마 전에는 체코 정부에 럼주로 채무를 갚겠다고 요청해왔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실패는 제한적이다. 쿠바는 국가가 붕괴하거나 다수 빈민이 인간다운 삶조차 누리지 못하는 그런 국가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카스트로가 그란마 호의 동료와 혁명 동지들과 함께 나름대로 쿠바 민중, 특히 가난한 국민들로부터 대표성을 갖고 책임성을 갖는 그런 정부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포용적 제도’의 수용 가능성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그들의 유명한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착취적 제도와 포용적 제도에 관해 말한다. 착취적 제도는 소수의 지대추구자들만을 위한 제도로 이 제도 하에서 창조적 파괴는 일어나지 않고, 경제 성장은 정체되며, 정부는 국민 다수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하지만 포용적 제도 하에서는, 다양한 경제주체와 정치세력이 서로 견제하면서 이익 편취를 가로 막는다. 이런 제도는 재산권과 신용의 보장으로 이어지고, 자연스레 새로운 참여자들이 시장에 진입하면서 경쟁이 이루어진다. 마침내 생산성 향상과 혁신에 이어 경제 성장과 개발로 이어진다.

쿠바의 제도는 분명 포용적 제도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정의에 의하면 착취적 제도에 가깝다. 그들은 선거로 정당성을 확인 받는 길을 택하지 않았으며, 비효율적인 집단농장을 운영하여 토지 개혁의 성과에 빛을 바라게 했다. 무엇보다 공산당원은 새로운 엘리트 계층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포용적 제도의 성공 요건으로 다원적인 정치경제질서에 더하여 다른 하나를 더 제시한다. 바로 책임성 있는 중앙집권적 정부다.


그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쿠바 정부는 계속 소수의 지주 대신에 다수 쿠바인을 대표하고자 하는, 책임성 있는 중앙집권적 정부였다. 그렇기에 쿠바는 컵에 물을 반이라도 채울 수 있었다. 트럼프 당선으로 상당히 불투명해지긴 했어도 쿠바가 만약 포용적인 제도를 수립할 수만 있다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인적자원이 제대로 활약하면서 쿠바 경제를 견인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기대한다.

루스벨트 패러다임, 그 역할과 한계

카스트로가 떠난 지금, 최소한 쿠바 정도라도 되는 책임 있는 정부를 다수 극빈국에 줄 세우는 것은 부당한 평가로 보인다. 숱한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 이런 정부를 제대로 세울 수 있던 국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몇몇 시도가 있었지만, 때로는 미국의 개입으로 좌절당했고, 또 때로는 자신이 무책임한 착취적 지도자임을 입증하곤 했다. 하물며 그보다 더 혼란한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카스트로와 쿠바가 아닌 루스벨트와 미국 이야기를 해야겠다. 결국, 서구 선진국의 일원으로서 한국은 쿠바보다 미국에 가까운 나라니까. 


다시 카스트로가 편지를 보낸 1940년으로 돌아가자. 그해는 미국이 마침내 자신들의 위치에 걸맞은 세계경찰을 본격적으로 나선 첫해나 다름없었다. 그 후 1년 뒤 루스벨트는 진주만 공습을 맞아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미국은 전쟁기에 소련의 스탈린과 협력하여 기존의 제국주의 질서를 복원하려던 처칠의 기도를 불식했다. 


진보한 20세기 질서는 그 이전 시대 영국의 것보다 훨씬 더 잘 작동하면서 70년 가까이 세계를 관리해왔다. 강대국 간의 전쟁이 완전히 사라지고, 미국의 국제 무역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나라들은 빈곤에서 탈출해 선진국에 참여할 기회도 얻었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1939년에 니카라과의 소모사를 향해 “우리 개자식”이라고 말한 이래로, 카스트로는 루스벨트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20세기 내내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소수 지주와 그에 협조하는 훈타(라틴아메리카의 군부 정권)들이 주도한 착취적 정부를 지원했다.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냉전 논리는 이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는 루스벨트가 원했던 포용적 세계질서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1941년 연두교서에서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네 가지 자유’가 인간의 자유의 근본으로 기초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여러 행동은 그런 네 가지 자유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정부를 지원해주는 것에 더 가까웠다. 비단 라틴 아메리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1953년 미국은 CIA를 동원해서 이란에서 새로이 구성된 모사데크의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다시 팔레비 왕정을 옹립했다. 


이 모든 일은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루스벨트 패러다임’의 마지막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룩한 가장 큰 외교적 성취로 평가받는 것이 이란과의 화해, 그리고 쿠바와의 화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는 어떤 면에서 묵은 빚을 청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미국이 훈타들을 지원하지 않고 팔레비를 다시 왕위에 올리지 않았더라면, 피그만을 침공하지 않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후세인을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대신 그곳에 다수 인민의 요구에 반응하는 책임성 있는 정부가 들어서도록 관리해주었다면? 애초부터 이슬람 혁명 정부와 쿠바의 공산 정부는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란이 핵을 개발해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겠다는 위협도, 쿠바가 소련으로부터 핵을 들여와 미국을 위협하겠다고 나서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미국 매파의 가장 큰 공포는 사실상 그들이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분명 루스벨트가 만들어낸 미국은 미국 국내에서도 국외에서도 잘 작동해왔다. 이걸 부정할 수는 없다. 루스벨트는 뉴딜을 내세워 남부의 보수적 지주들과 함께하던 민주당을 노동조합과 흑인과 함께하는 지금의 민주당으로 탈바꿈하게 했다. 그리고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질서를 수호하는 세계 경찰을 자임해 국제질서를 관리해왔다. 그래서 나는 루스벨트가 제시한 방향성이 실패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대 미국이 할 수 있던 최적의 선택지이자 최선의 선택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각 시대는 결국 시대의 필요에 맞는 생각을 얻게 되는 법이다. 7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이 패러다임은 어느새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다. 민주당은 자신이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러스트 벨트를 버렸다(이는 다른 글에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또한, 국외에서는 미국이 만들어낸 그 국제무역과 자본의 질서 속에서 다른 강대국들이 성장하여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이라는 위치를 위협한다.

  • 트럼프 대통령을 가능하게 한 러스트 벨트의 반란 (출처: Jschnalzer, CC BY)

1940년부터 2010년까지의 세계는 결코 모두가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세계는 아니었다. 세계 인구 대다수는 여전히 독재 정권의 폭압적 통치와 강요당한 빈곤에 신음하면서 살아야 했다. 이들은 70년이 지나자 루스벨트가 기초를 닦은 20세기 개방형 질서에 몸을 실어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낸 나라들을 보며 절망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전통과 안온함을 파괴한 나라로 자연스레 미국을 지목했다. 이것은 루스벨트 패러다임의 어쩔 수 없는 결함이었다.

다시, 카스트로를 생각한다 

우리는 그 결과를 보고 있다. 카스트로의 쿠바가 이룩한 수준의 개발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네 가지의 자유는커녕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박탈당하고 사는 국가들은 가마솥 밑바닥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는 난민 문제로 비화해 루스벨트가 정초한 서구의 전통적 사회계약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 위협은 ‘트럼프 대통령’과 ‘브렉시트’로 현실화했다.



따라서 서구는 그 어느 때보다 세계적 빈부 격차를 해소하여 빈곤국들을 끌어올려야만 하는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바로 선진국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기후 변화는 극빈국들의 경제와 사회의 파탄을 가속해서 이 위협에 쐐기를 꽂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카스트로를 생각한다. 


옥스퍼드 대학의 경제학자이자 세계적 극빈국 문제 전문가인 폴 콜리어는 서구사회가 해야 하는 일은 단순히 돈을 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콜리어는 극빈국들에서 책임성 있는 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그들 사회의 ‘영웅들’을 지원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도 부패한 지도자들과 그들 패거리의 호주머니로 흘러들어 갈 뿐이다. 그렇게 되면 절망한 사람들은 선진국으로 계속 탈출하고자 할 것이고, 남겨진 사람들은 더욱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쿠바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란마 호를 타고 돌아오는 카스트로 같은 이야깃거리는 없어도, 그리고 체 게바라와 같은 신화적 인물들은 없을지라도, 21세기의 최대 글로벌 이슈 중 하나인 개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쿠바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빛과 그림자 모두를 말이다.

  • 체 게바라(왼쪽)과 피델 카스트로. (사진: Alberto Korda,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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