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Post-Truth)의 시대

조회수 2016. 11. 26. 17: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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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실(Post-Truth)의 시대

사실과 진실보다 감과 느낌이 각광받는 시대다. 공포와 무관심이 결합해 증오를 만들고, 아집과 독선으로 진실을 외면한다. 여기 미국과 한국을 현실을 반영하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장면 1. 2016년 7월 뉴트 깅리치 전 국회의장의 CNN 인터뷰 중

Q.

-범죄는 줄고 경제는 나아지고 있어요. (인터뷰어)

A.

대도시에서는 아니에요. (깅리치)

Q.

-강력 범죄와 살인 사건은 줄고 있습니다.

A.

그러면 시카고나 볼티모어는 어떻게 된 거요?

Q.

-몇몇 국지적인 예외는 있지요, 하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강력 범죄와 살인 사건은 분명히 감소했어요.

A.

보통 미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범죄가 줄었다고도, 더 안전해졌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Q.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더 안전해졌고 범죄도 줄었어요.

A.

아뇨, 그건 당신의 견해일 뿐이요.

Q.

-그건 팩트예요.

A.

그렇게 따지면 내가 하는 말도 팩트요. 지금 진보 진영은 온갖 통계들을 들이대는데 그게 이론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실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that’s not what human beings are).

Q.

-잠깐만, 잠깐만요, 진보 진영(liberal)에서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건 FBI의 통계예요. FBI가 무슨 진보 기관은 아니잖아요.

A.

아니죠,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한 말도 사실이란 말이오. 사람들은 세상이 더 위험해졌다고 ‘느낀다’(feel)는 말이오.

Q.

-그렇게 느낄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A.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가 더 중요해요. 당신이나 이론가들(theoreticians) 편에 서도록 해요.

장면 2. 11월 16일 JTBC 뉴스룸, ‘청와대의 버티기’와 친박 최경환의 ‘국민 여론’ 

[기자] 새누리당 친박계 핵심 최경환 의원이 중진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최순실 국정개입 파문 이후 처음이라 눈길을 끌었습니다.

[최경환 의원/새누리당] 대다수  국민 여론은 헌정 중단은 막아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 혼란을 수습해야 된다 하는 쪽으로 모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기자] 헌정 중단은 안 된다는 이유로 대통령 퇴진을 거부하는 청와대 주장과 결이 같습니다.

JTBC, ‘청와대 버티기’ 힘 보태는 친박계…공세 전환 돌입? (2016. 11. 16) 중에서
  • 헌정 중단(맥락상 “박근혜 퇴진”을 의미)은 국민 여론이 아니라는 최경환의 발언 (출처: JTBC 뉴스룸 보도 화면 갈무리)

사실을 기자들은 굳이 영어를 써서 ‘팩트’라고 부른다. 왜 그러는지는 내가 기자 생활을 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수수께끼다. 그게 멋있게 들려서일 수도 있고, 일삼아 그 진위를 검증할 필요가 있는 공익적 사안을 차별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일 수도 있겠다. 걱정스러운 대목은 이 사실, 혹은 팩트가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억측과 낭설, 거짓과 선전 선동 속에 파묻혀 어느 순간 팩트의 진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데 있다.

사실과 진실을 강탈하는 느낌과 감 

강력 범죄와 살인 사건이 줄었다는 FBI(클린턴 낙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그 FBI!)의 객관적 통계 자료조차, “아닌데? 내 느낌으로는 더 위험해졌는데?”라는 주관적 의문과, “맞아, 그건 말이 안 돼. 사방에서 터지는 온갖 흉악 범죄에 총기 난사 사건들을 봐, 뭐가 더 안전해져? 다 엉터리야”라는 친구나 지인의 맞장구가 결합하면, 객관적 사실은 무의미해진다. 내 감으론 세상이 더 위험해졌을 뿐이고, 그건 지금 버락 오바마가 개판을 쳤기 때문인 거다.


“대다수 국민 여론은 헌정 중단은 막아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 혼란을 수습해야 된다 하는 쪽으로 모이고” 있다는 새누리당 의원의 ‘생각’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생각은 아무런 객관적 자료나 통계에도 기반하고 있지 않다. 좋게 보아 그만의, 혹은 새누리당 의원들만의 공통된 ‘감’이거나,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5%’라는 여론조사 기관의 통계(사실)에 대한 의도적 무시일 뿐이다.

  • ‘박근혜 퇴진’을 한목소리로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와 친박 최경환의 ‘국민 여론’은 전혀 다르다. 어떤 ‘국민 여론’이 진실인가? (사진 제공: 옥토)

이른바 ‘어버이연합’의 대표 추선희가 말한 “100만 시위? 침묵하는 4900만명 있어”라는 발언도, 그를 뒷받침할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이, ‘침묵하는 4,900만 명은 박근혜 하야를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그만의 느낌, 혹은 주장으로 나간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은 힘을 잃었다. 사실은 너무나 자주 무의미하다. 때로 아무런 중요성도 발휘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감’이다. ‘느낌’이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내칠지는 사실이 아니라 감에, 느낌에 의존한다. 이는 걱정을 넘어 두려워해야 마땅한, 비상한 사회적 흐름이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는 그러한 흐름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출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 혐오 발언을 일삼던 트럼프의 충격적인 대통령 당선

옥스포드 선정 2016의 단어 “탈진실(post-truth)”

영국의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올해를 상징하는 단어로 ‘post-truth’를 꼽았다. 그 맥락을 따져 번역한다면 ‘후기 진실’이나 ‘후 진실’ 같은 말보다는 ‘탈(脫) 진실’이 맞겠다. 진실을 벗어난, 또는 진실을 전혀 따지거나 중요시하지 않는, 심지어 무시해 버리는 흐름이나 추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는 일일이 그 사례를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은 거짓말을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신문이 그 발언의 진위를 따져 사실과 다른 대목들을 지적했지만, 결과적으로 투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에게 발언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거 결과에서 드러나듯이, 그리고 여러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자신의 느낌, 분노와 소외감, 위기감을 대변해준다는 점(이 역시 ‘느낌’이다)만이 중요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post-truth’의 ‘truth’가 곧이곧대로 ‘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진실보다는 사실(fact)에 더 가깝지만, 관용적으로 사실(fact) 대신 진실(truth)을 썼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표현 자체가 주는 힘과 인상도 ‘post-fact’보다는 ‘post-truth’가 훨씬 더 강력하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이 작년에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단어라기보다는 그림이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의 이모티콘’(Emoji; 이모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느낌을 코믹하게 단순화한 이모티콘으로 표현하는 흐름의 한 반영이었던 셈인데, 그처럼 감정과 감성을 앞세우는 흐름은 2016년에 들어오면서 어둡고 불길한 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다. 


EU 탈퇴를 결정한 영국의 이른바 ‘브렉시트(Brexit)’ , 프랑스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드러나는 극우파의 발호, 트럼피즘으로 요약되는 미국의 배타주의와 대안 우파(alt-right)의 경향은 그 좋은 증거들이다. 


탈진실의 시대. 객관적 사실이 무시된 자리에, 다른 성(性)과 인종에 대한 적대감과 당파적 주장이 들어선다. 곳곳에서 포퓰리즘, 더 나아가 파시즘의 불안한 기운이 감지된다. 여러 지식인, 역사학자들이 역사의 퇴보, 혹은 회귀를 우려하고 경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탈진실의 2016년에 ‘이모지’를 쓴다면 2015년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얼굴’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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