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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라임, 혹은 박근혜의 이중생활

조회수 2016. 11. 16. 23: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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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라임, 혹은 박근혜의 이중생활

부제: ‘차움병원의 시크릿 가든’에 대한 미학적 고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조금씩 조금씩 그 베일을 벗는다. 밝혀진 사실은 현실을 압도하는 초현실이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우리의 일상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초언어의 세계다. 그렇게 박근혜와 최순실은 2016년 대한민국 현실 정치를, 김현이 기형도의 시 세계를 명명했던 표현처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세계로 이끈다. 그 현실은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아닌 것 같은 현실이다. 언론이 하루하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감춰졌던 사실을 밝힐 때마다 우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막장 드라마를 감상한다.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표 시절부터 다녔다는 ‘차움’ 병원. 그리고 그렇게 ‘안티 에이징’이라는 불멸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박근혜의 가명, ‘길라임’. 포털 실시간 인기 검색어 1위의 영광에 빛나는 ‘박근혜, 길라임’이라는 조합은 놀라움과 참담함 이전에 황당함과 폭소를 안긴다. 특히나 [시크릿 가든](‘길라임’이라는 극중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2010년의 인기 드라마)을 애청했을 시청자에게는 특히 그랬을 거다. 해당 드라마를 한두 편밖에 본 적 없는 나도 정말 많이 웃었다. 속으로 그랬다. ‘뭐 저런 게 대통령인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vs. 차움병원의 시크릿 가든

[십계] 연작과 [삼색] 3부작으로 널리 알려진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는 1991년 [십계]와 [삼색]의 가교 역할을 하는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를 발표한다. 이 영화는 이른바 ‘도플갱어’를 소재로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사는 두 명의 베로니카(베로니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가 만들어진 1991년은 키에슬로브스키의 모국인 폴란드가 소련연방에서 독립한 지 2년째 되는 해다. [삼색]이 유럽 통합에 관한 영화적 형상화라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소련이라는 구심적 소비에트의 붕괴와 동유럽의 독립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과거의 존재(소비에트)와 미래의 존재(유럽의 독립)를 동시대의 공간 속에서 서로 교차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새로운 유럽은 영화 [삼색]에서 각각 자유(블루)에 관한 미스터리 스릴러, 평등(화이트)에 관한 블랙 코미디, 박애(레드)에 관한 희생의 드라마로 구체화한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20세기 말 동유럽의 정치적 격변과 당대를 살았던 실존적 존재의 모순과 떨림, 그리고 새로운 유럽에 대한 바람을 시적(詩的)인 영상 언어로 형상화했다면, 최순실이 감독하고 박근혜가 주연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차움병원의 시크릿 가든’은 철저하게 특권층과 일반 대중을 격리하고(1억 5천만 원의 멤버십 공간), ‘안티 에이징’으로 상징되는 세속의 욕망, 불멸의 욕망, 권력의 욕망을 천박하고 코믹한 방식으로 형상화하며, 이 모든 것을 대외비로 붙인다. ‘나는 길라임이다. 나는 박근혜가 아니다.’


키에슬로브스키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로 만남과 통합, 그 관계와 과정의 실존적 떨림을 이야기했다면, 박근혜와 최순실의 [차움병원의 시크릿 가든]을 통해 단절과 격리, 차별과 특권을 통해 헬조선의 정점에 선 초인(박근혜, 최순실)을 찬양한다. 그 슬픈 코미디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장엄함 혹은 위대함이 ‘아, 아아’라는 감탄사를 자아내는 미학적 감수성의 질료라면, 최순실-박근혜의 저질 코미디는 그 정반대 편에서, 그 압도적인 천박함으로 인해 기존에 있었던 언어로는 이 사태를 표현할 방법을 찾기 어렵게 하는 미학적 특이성을 띤다(이건 농담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겨우 이렇게 반응할 수 있을 뿐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시대의 풍자 짤방러에게 경배를

김수영의 시론(시여, 침을 뱉어라)에 대한 대답으로 김지하는 ‘풍자냐, 자살이냐’라는 짧은 시론을 쓴다. 문학(예술로 바꿔도 무방)은 사회의 부조리와 정치권력의 거짓에 저항하고, 또 저항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게 바로 예술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저항은 비극의 방식인 자살로도, 희극의 방식인 풍자로도 표출될 수 있고, 그렇다면 민중적인 저항의 방식은 자살이 아니라, 풍자가 아니겠나. 그것이 그 짧은 시론의 결론이다.


우리는 이런 웃기지만 슬픈, 슬프지만 웃긴 박근혜와 최순실이 만든 초현실의 ‘아방가르드’ 막장 정치 미학에 맞서 대중 정치과 대중 예술의 언어, 풍자로 다시 이 현실의 참담함을 극복하려 시도한다. 우리는 늘 그래왔다. 권력에 맞서 대중은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이름 없는 패러디 장인들은 벌써 이런 대항적인 미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최순실의 막장 정치는 저질 코미디의 옷을 입었다. 그 저질 코미디의 옷을 벗기면, 살아 있는 권력이 그 맨살을 드러낸다. 재벌이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돈을 갖다 바치고, 청와대 수석이 대통령의 개인 성형외과 해외 판촉을 못 해서 잘리며, 베트남 총영사관이 흔들리고, 세월호가 가라앉는 동안에 “대통령의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은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웃기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코미디는 본 적 없다. 하지만 풍자는 무시무시한 코미디의 정체를 까발리고, 그것이 가진 본질적인 기만과 차별을 폭로하며, 이를 통해 다시 정치와 일상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를 한다. 


이 엄혹한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이 시대의 풍자 짤방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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