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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이란 말, '장애인 같다'라는 말을 자주하는 너에게

조회수 2016. 9. 19. 23: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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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이란 말, ‘장애인 같다’라는 말을 자주하는 너에게

입에 ‘병신’이나 ‘장애인’을 달고 사는 너는 사실 장애가 뭔지도 잘 모른다. 지적장애와 신체장애를 구분하는 용어도 모르면서 ‘장애인 같다’라는 말을 쓴다. 너는 ‘장애인’과 ‘병신’을 주로 ‘웃긴 행동을 하는 친구’를 부를 때 쓰는데 지칭 대상에 대한 비하보다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만들고 싶어 쓴다.

‘병신’을 입에 달고 사는 너 

언제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있는 공간에서 네가 친구를 손가락질하며 ‘병신’,‘병신’ 거리는 걸 봤다. 내가 “병신이란 말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용어라 듣기 불편합니다.”라고 했더니 “근데 이 새끼 장애인 맞잖아.”라며 더 크게 웃는 널 보고 나는 힘이 쭉 빠져 버렸다.


너의 설명에 비추어보면 ‘병신 짓’이란 지적장애인을 비유한 말이다. 특이하거나 웃긴 행동을 하는 친구는 지적장애인과도 같다는 이야기인데, 생각해보자. 우스운 짓 = 장애인 같은 짓. 그러니까 ‘장애인은 우스운 사람이다.’ 라는 혐오 기재를 전제해야 가능한 비유다.


“Verbal abuse can be just as horrific”

다른 예로 너는 장애인 폄하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지체장애인’이라는 말도 함께 쓴다. 이 역시도 눈에 띄거나 웃기는 행동을 하는 친구에게 사용하더라. “쟤 지체장애야.”라며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만든다. 너는 지적장애를 이야기 하고 싶던 모양인데 사실 ‘지체장애’는 네가 생각하는 정신지체장애가 아니라 신체장애다.

몸의 기능이 제한된 것을 지체장애라고 한다. 이제는 ‘지적장애’라고 고쳐 쓰이는 ‘정신지체’는 신체장애를 이야기하는 지체와는 다른 한자어를 가지고 있다. ‘지체장애’는 사지 지(肢)와 몸 체(體)자를 써 신체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정신지체’에서의 ‘지체’는 늦을 지(遲)와 막힐 체(滯)자를 써 느리고 더딤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신’과 관련되었다고 다 같은 장애도 아니다. ‘지적장애’와 ‘정신장애’는 다른 말이다. ‘정신분열’이나 ‘우울장애’와 따위가 지속적으로 발병해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는 것이 ‘정신장애’에 속하며, 지적장애(mental subnormality)는 지능검사를 통해 지능지수 (IQ)에 따라 판정받는 장애다.

장애인은 나쁜 말이 아니다 

가끔 그저 ‘장애’라는 말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불편해하는 사람을 보는데, 네가 얼마나 ‘장애’를 비하의 의미로 쓰면 아예 단어 자체를 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싶다. 어느 날은 군 인권 문제 관련해서 올린 게시글에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자기 아버지를 장애인이라고 하다니’라며 나에게 쌍욕을 한 일도 있다. 그 사람은 누군가를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욕인 줄 알았나 보다.


장애인은 나쁜 말이 아니다. 장애는 장애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피하거나, 꺼리거나, 배제해야 할 것이 아니다. 너는 친구를 놀리거나 남을 욕할때는 ‘장애인’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면서, 실제로 장애인을 지칭하려 할 때는 아주 조심스러워진다. ‘장애인’을 욕으로만 써왔으니 어딘가 찜찜해 “장애우분들”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틀렸다. 장애인은 장애인이다. 



그리고 너는 ‘정상인’이나 ‘일반인’이 아닌 ‘비장애인’이다. ‘장애우’라는 표현은 어딘가 조금 더 부드럽고 친근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친구’라는 말을 붙이는 것부터가 기만이다. 장애인은 네가 측은하게 바라봐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로 장애우라는 말은 틀린 표기, 틀린 발상이며 아무것도 가감하지 않은 ‘장애인’이 맞는 말이다. 친근할 필요도, 부드러울 필요도 없다. 너와 내가 너와 나인 것처럼 장애인은 그냥 그들(우리)을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나도 너처럼 ‘병신’이란 말 자주 썼었다 

장애에 대한 무지와 혐오는 우리 사회에 아주 넓고 깊게 퍼져있다. 너와 별로 다르지 않게 나도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병신’이란 말을 자주 썼다. “그런 뜻으로 쓰는 게 아니야.”라며 똑같이 자기방어를 하곤 했다. 하지만 네가 아무리 ‘그런 의미’로 쓴 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쳐도 사실 그런 의미가 맞다.


너는 네가 그 ‘장애인 비하’의 함의를 주체(의도)하지 않는다 항변하고 싶어 한다. ‘병신’이라는 언어는 지금 시대에 공유되는 문화적 유머코드일 뿐이니까. 넌 그 유머 하나를 주워 입에 올린 것일 뿐인데 소수자를 비하하는 사람으로 몰리니 정말 억울해한다.


“나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상적 혐오와 비하는 발화자의 참된 의도까지 마음 깊숙이 꿰뚫어 보며 선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결한 네 말대로 어떤 사람들은 ‘난 장애인이 역겹고 혐오스러우니까 미움을 온 마음에 담아 이 용어를 써야지.’ 하면서 ‘병신’이란 말을 쓴다고 치자.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그런 사이코나 ‘유머’를 위해 ‘병신’이란 말을 쓰는 너나 사실 다른 게 없다. 내 마음속 ‘본심’과 ‘의도’는 내가 한 말에 따로 각주를 달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속마음이 말에 따로 ‘각주’를 달아주는 건 아니다.

우리는 말로 무뎌지고 말로 힘을 얻는다

내가 ‘병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건, 세상에 장애인이 우리 아빠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난 후부터다. 우리 아빠는 ‘병신’이란 말에 그다지 감흥이 없었지만, 우리 아빠가 괜찮아한다고 다른 모든 당사자가 괜찮은 게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말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한다. 단어들이 그렇게 큰 힘을 가졌냐고 한다. 맞다. 우리는 말로 무뎌지고 말로 힘을 얻는다. 즐거운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모든 혐오는 피어나고, 또 재생산된다. 한 번, 두 번 말하다 보면 어느새 ‘괜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진지충’이나 ‘씹선비’가 되고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조차 목소리를 내기 꺼린다. 너는 맨 처음부터 그곳에 혹시라도 불편한 사람이 있는지 신경조차 쓴 적이 없다. 네가 가지는 기득권이 어떻게 타인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어떻게 소수자를 배제하는지 너는 모르고 살아왔다. 


어떻게 알까. 별다른 생각 없이 지하철을 오르내리다 이따금 사람이 미어터지는 시간대에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대는 네가, 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 하나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알까. 너에겐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가 누군가에겐 그날 열차 안 승객의 협조에 따라, 장애인 엘리베이터의 고장 유무에 따라, 승강장과 열차 사이 그 작은 틈에 따라서 한 시간의 고된 여정이 될 수 있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까. 


당연히 모른다. 네가 들이쉬는 기득권의 공기는 네가 쟁취한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에게 봉사를 하러 다니라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 인권 활동가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누릴 것은 모두 누려도 좋으니 제발 내 마음만 아프게 하지 말아 달라는 거다. 


마음이 아프다. 누가 때리는 것 같다. 혐오와 멸시, 차별이 느껴질 때 마음이 아프다. 내가 그곳에 없더라도 누군가는 아플 수 있다는 걸 알아달라. 네가 악의 없는 그 말들을 뱉을 때마다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는 걸 좀 알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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