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의 눈치 게임

조회수 2016. 9. 8. 08: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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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의 눈치 게임

매일 아침, 식탁에서는 눈치 게임이 시작된다.

“자, 밥 먹자. 모두 와요.”

엄마가 말하면, 가족들이 하나둘 식탁에 둘러앉는다. 게임이 시작됐다.



처음은 음식 맛이 화두다. “음식이 왜 이렇게 짜?” 아빠가 말하면, 나는 “밥이랑 같이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라고 방어한다. “음식이 왜 이렇게 많아?” 아빠가 말하면, 동생이 “나는 한창 클 때라 많이 먹어. 이따가 또 먹을 거야.”라고 방어한다. 뜨겁고 눅눅한 한여름의 새벽, 에어컨 없는 작은 부엌에서 요리하느라 땀으로 티가 흠뻑 젖은 엄마를 보면, 음식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평가도 용납할 수 없다. 그게 설사 ‘합당한’ 평가라고 해도 마찬가지.

가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아빠의 표정으로 부정적인 기류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우리 자매는 더 요란을 떨며 “아아 진짜 맛있다. 엄마는 최고야. 엄마만큼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정말 없더라고.”라고 말하며 엄마의 눈치를 살핀다. 일단 눈치 게임 한 코스가 지나가고, 곧 다음 코스가 시작된다. 

“너넨 요즘 뭐 하고 사냐?” 아빠가 물으면, “착실하게 살고 있어요.” 너스레를 떠는 건 동생의 담당이다. 이 작전이 통하면 “이놈의 새끼가 아비를 놀리네.”라며 껄껄 웃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작전이 통하지 않으면, “장난하나. 제대로 대답 안 해?”라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싱겁게 눈치게임은 끝나버리고,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듣기 시간이다. 

“너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세상이 니들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줄 아느냐. 헛꿈 꾸지 말고, 얼른 공무원이나 준비해.”라는 15년 묵은 레퍼토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비교 대잔치가 이어진다.
“내 친구 자식들은 전교 10등 안에서 경쟁한다는데, 너는 50등 안에 든 게 뭐가 자랑이라고 말하나? 창피하다.”

중학생 때 들었던 아빠의 말은, 2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변함없다.

“내 친구 딸은 스튜어디스 돼서 아비 차 한 대 뽑아줬다는데, 너희는 뭐하냐. 쪽팔리지도 않냐?”

눈치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그날 아빠의 눈치를 미리 파악해서, 가족 중 누군가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미리 제동 걸기. 동생과 나는 밥을 먹을 때마다 남몰래 우리만의 눈치 게임을 시작했다. 그때마다 온 감각이 식탁을 둘러싼 가족들에게 활짝 열린다. 무엇보다 그 분위기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아빠에게로.

아빠는 오늘 어떤 말을 할까. 엄마는 가만히 있을까, 어떻게 화제를 돌릴까. 온갖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짜놓지만,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상대의 반응에 따라 속절없이 끝나고 마는 게 이 게임의 속성이다. 눈치를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시작부터 끝까지 공평하지 않다. 

궁금했다. 아빠는 왜 다른 가족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던 걸까? 상대와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행동할 권리는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걸까. 소심하지 않은 대담한 성격에서? 남자는 단순해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단서가 있다. 사전에서 ‘눈치’를 찾으면, 여러 예시가 나온다.
남의 집에 몇 년 얹혀살았더니 는 것은 눈치뿐이었다.

뇌물을 바치는 데에도 눈치가 있어야 한다.

남의 집이 아닌, 내 집이 있는 사람은 눈치를 볼 일이 없으니, 눈치가 늘 일이 없다. 뇌물을 받는 사람과 뇌물을 바쳐야 하는 사람의 권력 차이는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의중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재빨리 눈치로 알아내는 일이다. 내놓고 물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놓고 물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아서 눈치로 가늠해야 하는 사람의 차이다. 함께 살고는 있지만, 내 집을 가진 가부장의 권력과 그 외 구성원의 차이가 될 수 있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차이가 될 수 있고, 소비자와 서비스 노동자의 차이가 될 수도 있다. 남자보다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을 잘한다고 알려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도 같은 권력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Dar’ya Sip, “I Dont Know Why”, CC BY

여성학자 정희진은 “가부장적 남성의 특성은 폭력성이 아니라 게으름”이라고 말한다. 가사노동을 포함해 여러 형태의 게으름이 내포된 말이겠지만, 나는 그 말을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권리. 상대방과 상관없이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되는 권리’라고 해석한다. 아빠의 행동은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권력’에서 나오는 마땅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상대적으로 더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에 있다 보면, 시선이 확장되기 마련이다.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바로 맛을 평가하기 전에, 재료를 사 오고 손질하고 씻고 썰고 재우고 볶고 양념하고 찌고 설거지하는. 누군가의 지난한 노동이 우선 눈에 보인다. 

엄마의 땀에 젖은 티, 간 보며 음식을 준비하느라 미리 배가 불러 항상 나머지 가족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모습,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지 우리를 살피던 엄마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래서 어떤 음식 앞에서든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만큼 감사하다고 반복해서 말하게 된다. 누군가의 노동을 대하는 법을 진작 익히게 된 것이다. 

눈치 보는 사람은 눈치 보는 사람을 알아본다. 얼마 전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의 증언이 사회에 들렸을 때, 회식자리에서 “본부장의 혓바닥이 입에 쏙 들어왔다”는 50대 청소노동자의 증언에 “그런 일을 당하고도 어떻게 바로 그만두지 않을 수 있냐, 어떻게 참을 수가 있냐.”는 몇몇 반응이 눈에 들어왔다. 노동착취를 증언하는 노동자에게 으레 향하는 비난이다. 나는 그분들이 무기력하게 타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생존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분투했을 그녀들의 지난한 눈치게임이 보인다.

오늘도 많은 식탁 앞에서 어떤 사람은 전혀 모르고, 어떤 사람은 온 감각을 열어놓은 필사적인 눈치 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오늘 어디에 눈치를 보고 있나? 내 눈치를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위해 내가 더 눈길을 열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지금 내 위치는 어디인가. 그것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까운 식탁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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