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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러제트와 메갈리아

조회수 2016. 8. 2. 22:3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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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러제트와 메갈리아

이 글의 소재와 주제에 관한 다양한 반론과 보론, 비판 기고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1860년대부터 시작된 여성 참정권 운동. 사람들은 ‘여성 참정권론자’를 ‘서프러지스트’(suffragist)라고 불렀다.


이들은 국회의 선거법 개정 요구, 평등법안 입법요구 등 정치적 활동을 통해 여성들의 권리를 향상하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들은 스튜어트 밀과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후원하여 입안을 종용하거나, 여성참정권에 부정적인 정치인들의 낙선운동을 하는 방식이었다. 간접적이고 정치적인, 그래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당시 남성은 서프러지스트를 완전히 무시했다.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이들의 활동을 ‘우스개’ 정도로만 취급했고, 정치는 여전히 남성만의 것이었다. 그래도 여성은 목소리 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이 상황이 약 50년간 지속되었다. 그동안 남성의 참정권은 돈 있는 사람들에게서 돈 없는 사람들, 농부들에게까지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여성 참정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1910년대에 접어들어 온건 저항을 포기하고 무력 저항을 선언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서프러제트’(Suffragette)운동의 시작이다.  상가의 진열대를 부수고 방화를 하고, 우체통이나 전선을 파괴해 도시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여성사회정치연맹 회원으로 영국 내에서 폭력적인 방법론을 채택한 애니 케니(Annie Kenney)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Christabel Pankhurst)의 모습. (1908년 당시 모습)

남성은 이제 여성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데다가 폭력적이기까지 한 존재로 매도했다. 만평에 그려지는 여성의 얼굴은 점점 더 기괴해졌다. 차라리 온건한 방식으로 요구하면 들어줄 것이라 대꾸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로써 서프러지스트에 관한 평가가 좋아졌다. 서프러제트라는 단어조차 서프러지스트에 ‘작은 것’을 의미하는 어미(-ette)를 붙인 것으로, 이는 당시 언론들에 의해 명명된 것이다.


100여 년이 지난 2016년 한국의 풍경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펼쳐지고 있다.


한국 여성은 1948년에 참정권을 얻었다. 그러나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 남성은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세상 물정 모르며 기만 쎈’ 여성이라는 의미의 은유처럼 사용했다. 같은 여성조차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은 입에 담길 꺼렸으며,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던 자기 이름 앞에 붙는 것을 두려워했다. 


성차별에 항의하려면 ‘나는 페미니스트 같은 건 아니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여야 했다. 여성을 위한 여성의 목소리는 몇 단계의 검열을 거쳐야만 세상에 뱉을 수 있었다. 결국 ‘여성을 조심히 다루라’ 정도의 메시지밖에 전달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은 계속되었고, 한국의 성 불평등은 점점 심화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김치녀, 된장녀, 맘충, 김여사 등의 조롱이 일반에 확산했고, 여성혐오의 성향은 더욱 단단히 형성되었다. 여성은 성적 대상이 아니면, 존재 가치가 없는 어떤 것으로 취급당하거나 뭘 해도 남자보다 모자란 존재로 취급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여성 역시 온건의 방식을 버리고 조롱으로 맞받아치고 겁을 주는 방식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메갈리아가 등장한 것이다.


◆João Carlos Magagnin, “Coco Rocha”, CC BY

그랬더니 한국 남성은 ‘페미니스트’는 존중하지만, ‘메갈리아’는 사회악이라고 대꾸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페미니스트에 대한 평가가 후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나는 메갈은 아니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메갈리아가 부침을 겪고 그중 일부는 분파해 워마드의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가자, 이제는 ‘메갈까지는 인정하지만, 워마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폭력에 대한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과거에나 지금에나 남성으로부터 여성을 향해 발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모든 투쟁은 기득권을 위협하고, 방관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왔다. 투쟁의 선봉에 선 이들은 연대할 것인가, 계속 방관할 것인가를 물어왔다.


1928년에 영국에서 인정된 여성 참정권에 대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남성의 공백을 채운 여성에게 주어진 보상처럼 인식하는 이도 있다. 이는 ‘여성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 정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최고조에 이르렀던 여성사회정치연맹의 무력 투쟁의 가치를 격하하는 해석이다. 


남성의 사회적 역할을 대체하기 시작한 여성이 1차 세계대전 이전과 같은 무력투쟁을 다시 시작하면, 이번에 나올 파급력은 매우 치명적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주었기에 나올 수 있던 결론이었다. 당시 영국 남성에겐 ‘두려운 존재를 적으로 다시 돌려선 안 되겠다’는 판단이 나왔던 것이다. 


폭력을 버리고 온건하게 주장하라는 외부의 요구에 어떻게 대답할 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대하는 이들 사이에선, 반대 의견도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함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1912년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

에멀린 팽크허스트과 장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무력투쟁을 자제하고, 징집되어 자리를 비우게 된 남성의 역할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운동 노선을 전환했다. 2녀와 3녀인 실비아 팽크허스트와 아델라 팽크허스트는 어머니와 큰 언니의 노선 변경을 ‘부르조아 여성운동’으로 규정하고 갈라섰다. 그리고 무력투쟁의 노선을 줄곧 유지했다.


이 두 세력의 활약은 정반대 방식이었지만, 그랬기에 앞서 언급한대로 ‘두렵지만 우리 편으로 삼으면 이익’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연설대로 ‘각자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한다’는 취지에도 어긋나지 않았던 모양새였다. 


외부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어차피 지금의 모습을 평가 절하하고 과거 복종하던 여성들의 모습을 미화할 것이다. 중요한 건 여성들의 연대이며, 더 중요한 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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