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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서 고민에 빠진 까닭

조회수 2016. 7. 26. 2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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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서 ‘우리’를 생각하다

하노이에는 눈 닿는 곳마다 한국이 있다.

CGV
롯데리아
삼성 갤럭시
LG 에어컨
한식당
현대 자동차
한국 드라마 등등…

정신을 놓고 있으면 서울 변두리 어딘가 즈음으로 착각할 정도로 익숙한 풍경이 많다. 낯선 땅인 줄만 알았던 곳에서 이런 친숙함을 느낄 줄이야. 신기하고 반가웠다. 괜히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이것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말한 개발도상국에서 한 달만 살면 생긴다는 ‘국가적 자부심’인가.


문득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삼성을 보고 반가워하는가.’

나는 삼성 직원도 아니고, 삼성이 잘 되어봤자 나에게 좋은 일은 없다. (심지어는 나는 휴대폰도 아이폰을 쓴다.) 나는 아주 가끔 필요를 느낄 때만, 지극히 제한적인 나의 구매능력을 고려하여, 삼성 물건을 사는, 일개 개미 소비자일 뿐이다. 그런데 왜 나는 삼성의 대문짝만한 전광판을 보고, 롯데가 세워 올린 저 까마득한 높이의 거탑을 보고 반가워하며 우쭐대는 걸까.


왜 나는 저것들을 ‘우리’라고 인식하는 걸까. 저것들은 나를 ‘우리’라고 인식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인식의 간극이 전하는 바는 무엇일까.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가는 내내 기사님과 대화를 나눴다. (물론 영어로. 나 영어 실력 좀 늘었다. 하하) 유일한 대화 주제는 ‘한국’이었다. 그분, 어쩜 그리도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많고 궁금한 게 많던지…한국을 사랑한다는 자기 말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쉴 새 없이 한국, 한국, 한국을 논했다. 기사님 가라사대, 이곳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한다.

‘도대체 왜?’

그동안 한국이 베트남에 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은 자국의 경제개발을 위해 서로 아무런 원수 진 일이 없는 베트남을 침공하지 않았나. 국내 혼인시장에서 소외된 한국 남성들이 베트남의 젊은 여성과 돈을 앞세워 결혼하는 것은 또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베트남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의 사람들을 유사 인류, 농담 소재 즈음으로 취급하는 한국 주류사회의 비뚤어진 민족주의, 아류 제국주의는 어떤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기사님께, 베트남 사람들에게 참 미안하면서 한 편으로는 못난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문득 또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우리’로서 부끄러워하는가.’

나는 베트남전에 참전하지도 않았고, 베트남 신부를 얻기 위해 국제결혼업체의 문을 두드린 적도 없다. 그런데 왜 나는 한국의 못난 모습을 ‘우리’의 못난 모습이라 인식하며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그 누구도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고 발전시킨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행위이다. 그러한 관계들이 모이면 공동체가 건설된다. 


영토, 국민, 주권으로 구성되는 근대국민국가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거대하고 중요한 공동체 중 하나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다. 국가 공동체 역시 구성원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관계 맺기의 산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국가를 ‘우리’라고 인식한다면, 그 ‘우리’가 어떤 의미인지 더욱 능동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대기업 간판을 외국에서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그 대기업의 탐욕에 의해 희생당한 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간판을 보자마자 아마 이가 갈릴 것이다. 또한, 나는 베트남 전쟁을 떠올리면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베트남 전쟁을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필요하고 잘한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공동체의 의미는 단수가 아니다. 구성원의 숫자만큼 복수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국가 공동체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이들이 있다. 과연 누구일까? 할 말은 많지만, 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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