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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죽지 않는 자기소개

조회수 2016. 7. 22. 16: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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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이가 많습니다. 70살인데 결혼을 안 했고 자식이 없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지역 평생학습관 글쓰기 수업 첫 시간, 한 여자 학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일흔 살에 비혼 여성? 내용의 희소성보다 그 사실을 서슴없이 터놓는 당당함에 처음엔 당황하고 곧이어 감탄했다.


일정한 나이에 학교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사는 인생행로를 가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서는 시시때때로 불편을 겪는다. (중년 여성은 무조건 ‘어머님’으로 불린다.) 왜 남들처럼 살지 않는지 설명을 요구받는다. 그 번거로움을 그는 예사롭게 자처했다. 


이후 수업에서 그는 50~60년 전 시골에서 난치병을 앓는 여자아이로 성장한 이야기, 건강과 배움을 박탈당했다가 되찾아가는 이야기를 여러 편의 글로 썼다. 그의 생애는 늦깎이 학생으로 대학 졸업장과 사회복지사 자격증까지 획득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거나 장애를 딛고 열심히 살아가는 ‘희망의 증거’가 될 만한 내용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생애 서사를 휴먼스토리로 일반화하지 않았다.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정체성의 규정 요소들(건강, 계급, 성별, 나이, 지역 등)을 부정하거나 떼어버리려 하지 않았다.


아픈 몸을 치료하는 노력들, 외롭던 시간들, 가족 아닌 동료들과 배우고 놀며 성장하는 일상을 그려냈다. 아프니까, 여자니까, 늙었으니까 등등 매 순간 걸림돌이 됐을 요인들을 자기 삶으로 통합해냈다. 그 연장선상에서 거침 없는 자기소개가 가능했던 것이다.

25살 동안 글을 모르고 살았다.

위 평생학습관 수업에서 한 남자 학인이 발표한 글의 첫 문장이다. 이토록 강렬한 서두라니. 난 또 움찔했다. 그는 안마시술소, 때밀이, 막노동꾼, 공장노동자, 모텔 종업원 등을 전전하다가 “직업을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Franck Michel, “Old man watching the beach”, CC BY

검정고시학원에서 한글 공부를 하면서 중장비 기술 자격증을 15개나 땄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은 후 맘처럼 늘지 않는 글쓰기와 독해력을 높이고자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다며 이렇게 썼다.

책을 읽으면 똑똑해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공감 능력이 좋아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똑똑한 인간이 되는 건데 참 이상했다.

그는 이어 고백한다.

글을 몰랐을 때는 항상 움츠리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도 없었고 자신감 없이 살았다. 글을 오랫동안 배우면서 내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자신감도 생기고, 인간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됐다.

나는 이곳 평생학습관 수업을 결정하기까지 망설임이 컸다. 왕복 거리가 4시간, 집에 오면 자정이 되기 때문이다. 10주의 여정을 마치고 나니, 여길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평생학습관에서 수업은 ‘평생’ 학습의 본디 뜻을 상기시켜주었다. 사람은 왜 공부해야하는지, 읽고 쓰기는 어떻게 내면의 힘을 기르는지, 타인의 삶에 눈 떠가게 하는지.


인류학자 김현경은 이렇게 말했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평생 배우고 쓴다지만 자기 생애를 지배 규범의 주어진 틀 안에서 되풀이하고, 어떤 이들은 뒤늦게 배우고 쓰면서 자기 인생의 저자가 된다.


자기가 누구인지 ‘기죽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평생학습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 모두가 공부해야 한다면 이 특권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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