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는 척 결핍을 강요하는 어른들에게

조회수 2015. 11. 13. 15: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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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뉴스
몇 년 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둘 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어서였을까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의 아픔, 세대 간 갈등, 공감 부재 등으로 이어졌어요.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 대해 말만 많고, 정작 자신은 더 엉망.” 
“젊은 세대는 훨씬 힘들게 일하고 공부하지만… 대가는 없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와의 대화를 곱씹었습니다. ‘공감’이 키워드인 시대이지만 진짜 공감은 여전히 귀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 글은 그 질문에 관한 제 나름의 고민입니다.
출처: ‘나의 이야기’만 강요하려고 하니 대화가 통할 리 없습니다. (이미지: verbeeldingskr8, CC BY NC SA)

‘해봐서 아는데’ 그 이면에 있는 것


요즘도 그렇지만 고대 문명의 상형문자가 담긴 석판에서조차 “요즘 젊은 것들…”이라는 내용이 담겼었다는 이야기는 젊은 세대에 대한 충고, 책망, 질타가 모든 시대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기성세대의 무책임과 배려 없음을 비난하는 목소리와 짝을 이루어 이른바 ‘세대 간 갈등’을 만들어 내죠.

세대 간 갈등에는 수많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겪어봐서 아는데…’ 같은 말로 다음 세대를 가르치려 드는 기성세대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10대를 지내봐서 아는데’, ‘우리가 힘들어 봐서 아는데’, ‘우리가 학교 다녀봐서 아는데’, ‘우리가 연애하고 결혼해 봐서 아는데’, ‘우리가 애 키워봐서 아는데’,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이 목록에는 끝없이 뭔가를 더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해봐서 아는데’의 이면에는 ‘너희가 가난을 안 겪어봐서 모르는데’, ‘너희가 독재를 안 겪어봐서 모르는데’, ‘너희가 컴퓨터 없는 시대를 안 살아봐서 모르는데’와 같은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젊은 세대가 안 해본 것, 아니 해볼 수 없었던 일을 자꾸만 끄집어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것을 ‘결핍에의 강요’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결핍에의 강요


‘결핍에의 강요’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풍요로움은 긍정적 특성(positive trait)이 아니라, 가난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부정적 특성(negative trait)으로 변합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라는 사실은 컴퓨터 없는 세대를 살아보지 못한 ‘아날로그 경험의 부족’으로 이해되죠.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보된 상황에서 태어났다는 축복은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싸워본 적도 없는 무임승차 세대’와 같은 부정적 수식어로 둔갑합니다.

새로운 세대의 사회문화적 결핍을 강조함으로써 교육적, 윤리적인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새로운 세대를 바른길로 이끌고 싶다는 사명감이 충만한 분들이죠. 이런 분들도 나름으로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고 공감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이리저리 잔소리를 늘어놓는 일 자체가 어느 정도의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니까요.
출처: 결핍에 대한 강요는 획일적인 동일성에 대한 강요로 이어집니다. 긍정은 갈등이 아닌 차이와 조화의 토양을 만들어냅니다. (사진: symphony of love, CC BY ND)
문제는 이분들이 공감을 ‘나와 너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행위’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인데, 뭐 그리 다르겠니? 내 산 인생 보면 네 살 인생도 다 알 수 있는 거지. 나도 나름으로 열심히 살았다고. 그러니 먼저 산 나의 말을 듣는 게 우리가 공감을 이루는 길이야’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여기에는 ‘내가 너의 위치에 있어봐서 아는데’, ‘내가 너와 같은 경험을 해봐서 아는데’라는 생각 즉, 어떤 상황이 두 존재에게 같(을 수 있)다는 가정이 존재합니다. 경험의 동일성을 전제하는 것은 ‘(먼저 살아 본) 나의 경험이 일반적이며 보편적일 수 있어’라는 선언이죠.

하지만 그 어떤 상황도 두 개체에게 같은 의미와 무게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개체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상황에 대한 다른 인식, 해석 및 경험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고요. 그렇기에 누군가 겪었던 일이나, 처했던 상황이 다른 이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화일 뿐입니다.


공감의 방향 바꾸기


그렇다면 세대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저는 어느 정도의 갈등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갈등을 줄일 방법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공감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너와 내가 같으며 같은 상황에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로서의 공감’을 버리고 ‘너와 내가 다르지만 동등한 존재임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행위로서의 공감’을 취해야 합니다. ‘너나 나나 다 같은 인간이고, 내 경험이나 네 경험이나 다 비슷비슷하니 내 말을 들으면 돼’라는 생각, 즉 같음을 전제로 대화를 시작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 다른 사회문화적/경제적/심리적/정치적 공간을 살아가는 존재야’라는 인식, 즉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두통이 같을 수 없듯, 당신과 나의 인식도, 문화도, 시대도 다릅니다. 당신이 경험했던/경험할 열정도, 가난도, 명예도, 전쟁도, 사랑도 나의 그것들과는 철저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는 인식에서 소통을 시작하는 것이죠.


다름을 인정해야 비로소 공감이 열린다 


다름을 전제로 하면 같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생깁니다. 하지만 누구도 우리가 어떤 면에서 같아야만 하는가를 선험적으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세상만사가 다르고 존재 하나하나가 다르듯, 공감의 내용과 빛깔 또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전과 같은 세대, 같은 자식, 같은 학생, 같은 노동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길고 긴 논쟁과 소통 속에서 조금씩 닮아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죠.

두 사람이 똑같은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발을 밟아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너와 나는 같은 위치에 있어야만 해’라는 자세는 상대방의 생각을 짓밟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같아야 한다’가 아니라 ‘다를 수밖에 없다’에서 시작하는 공감, ‘이곳에 머무르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자’고 이야기하는 공감, ‘같이하면 성공할 거야’가 아니라 ‘함께한다면 좀 덜 불행할 수 있을 거 같아’라고 위로하는 공감을 꿈꿔 봅니다.
출처: 다름을 인정해야 비로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진: Yukari, CC BY SA)

필자 : 김성우(초대필자, 영어교육가)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며, 언어, 사고, 사회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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