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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에 청색을 허하라!”

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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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뒤편 백악산(북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1960년 4·19혁명 이후 윤보선 대통령 시절에 옛 이름인 경무대(景武臺)를 버리고 새로 쓰기 시작한 이름 청와대(靑瓦臺). 중심 건물인 본관은 2층 화강암 석조에 지붕에는 청기와(靑瓦)를 얹었죠. 그래서 청와대라 이름 붙인 겁니다.

이렇게 건물 지붕에 청기와를 쓴 데는 역사적 유래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시대 역사를 서술한 《고려사》입니다. 의종 11년인 1157년 4월 기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대궐 동쪽에 이궁(離宮)을 완성했다. 또 민가 50여 채를 허물어 태평정(太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하여 현판을 쓰게 했다. 정자 남쪽엔 연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지었으며, 그 북쪽에는 양이정(養怡亭)을 세우고 청자로 덮었다."

고려는 명실상부 청자(靑瓷)의 나라였죠. 청자 하면 흔히 도자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겠지만, 고려인들은 정말 온갖 자질구레한 일상용품까지도 청자로 만들어 썼습니다. 그러니 기와를 청자로 만들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게 없죠.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로 꼽히는 전남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청자기와가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청자로 만든 기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출토, 고려 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에서 만날 수 있는 청자기와입니다. 고려시대에 최고급 청자를 생산한 대구소(大口所)가 전남 강진에 있었죠. 바로 그 자리에서 발굴된 귀한 유물입니다. 답사기로 유명한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국보순례》라는 책에서 국보 지정 여부와 상관없이 이 청자기와를 ‘국보’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았던 청자기와 발견 비화

심지어 이 희귀한 유물은 발견된 과정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청자 하면 첫손에 꼽은 곳이 개성박물관입니다. 당시 국보급 청자가 여러 점 소장돼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자 한국 미술사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이 박물관 최고의 보물로 꼽은 유물은 수두룩한 국보 청자가 아니었습니다.

"청자기와를 하나하나 만들려면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합니다. 고려시대에 청자기와로 정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청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청자기와로 덮은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도 청자기와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으로 아주 귀한 유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깨진 것만 보존돼 있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또 어디서 이것이 생산됐는지 아무도 몰라요."

<청자 기와편>, 고려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유섭 선생이 청자기와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만하죠. 당시 개성박물관에 있던 청자기와 조각은 고려의 왕궁이 있던 개성 만월대 인근에서 발견된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못다 이룬 꿈이 못내 안타까웠던 제자가 있었으니 이분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 선생입니다.


1964년 5월의 어느 날, 전남 강진 사당리 일대를 돌고 있던 최순우 일행에게 한 아주머니가 청자 파편이 가득 담긴 소쿠리를 들고 옵니다. 최순우는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질 뻔했죠. 전대미문의 청자기와 암막새 파편 하나가 눈에 띈 겁니다. 전설처럼 전해오던 청자기와의 실체가 마침내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사기록에 나오는 청자기와의 실물을 보고 가슴이 뛰어 말이 안 나왔다. 당시 조사단에는 지방대학의 실습 학생들도 많이 참가하고 있어 청자기와 발견 사실이 알려지면 조사에도 지장이 있지만, 고가의 귀중한 청자기와가 흩어질 염려가 있어 정양모 씨와 둘이서만 알고 서울 올라올 때까지 비밀로 하고 조사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유쾌한 추억”이라고 최 관장은 당시를 회고한다...(경향신문, 1975.5.10)"

《미술자료》 9호(1964년 12월 발간)에 수록된 당시 발굴 현장 사진

알고 보니 소쿠리를 들고 나타난 아주머니의 집 안팎이 온통 고려청자 파편으로 가득했던 겁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완형에 가까운 청자기와와 파편들이 수습됐습니다. 연구자들의 애를 태운 역사의 수수께끼는 그렇게 풀렸습니다. 이런 사연이 전기 작가 이충렬이 쓴 최순우 전기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에 극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궁궐에 남아 있는 청기와의 흔적들

창덕궁 선정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현재 남아 있는 궁궐 건물 가운데 청기와 지붕 건물이 딱 하나 있습니다.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건물 지붕에 청기와를 사용한 경우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창덕궁관리소장을 지낸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가 최근에 펴낸 책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를 보면 광해군 때 청기와 재료 공급 문제를 논의한 내용이 소개돼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중초본》 광해 9년(1617) 6월 27일 기사입니다.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일찍이 성상의 분부로 인하여 청기와 30눌(訥)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안에서 내려준 염초(焰硝) 2백 근을 쓰는 외에, 부족한 숫자는 무역해 오면 자연 이를 옮겨 써서 구워낼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이외에 또 때때로 계속해서 구워내고자 하면 미리 마련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성상의 분부대로 도감에 있는 은(銀)을 동지사(冬至使) 편에 보내어서 그로 하여금 사오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청기와를 구워내는 데 필요해서 무역해 오는 물품은 넉넉하게 사오게 하라.”하였다."

영건도감은 건설 공사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입니다. 당시에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지붕에 얹을 청기와 재료로 염초(焰硝)를 썼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이죠. 염초는 화약을 만드는 핵심 원료로 쓰였던 것인데, 청기와 안료로도 썼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기록한 사관(史官)은 굳이 수입까지 해야겠냐며 비판적인 논평을 붙여 놓았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중략) 하대(夏代) 말기로 내려와 곤오(昆吾)가 기와를 구운 것에 대해서 검소한 덕을 숭상하는 임금이 이미 사치스럽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 반드시 만 리 바깥에서 회회청(回回靑)을 사와서 정전(正殿)의 기와를 문채 나게 한 다음에야 서울을 우뚝하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지금 적당한 시기가 아닌데 크게 토목공사를 벌려서 국가의 재정이 탕갈되었는데이겠는가. 그런데도 도감을 맡고 있는 자들은 매번 사치스럽고 크게 하기만을 일삼으면서 일찍이 한 사람도 한마디 말을 하여 폐단에 대해 진달해서 만 분의 일이나마 폐단을 구제하지 않으니, 애석하도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동궐도>에 그려진 경훈각

청기와가 비용이 꽤 많이 드는 사치스러운 재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회청(回回靑)은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값비싼 수입 안료였습니다. 신희권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후기 창덕궁을 상세하게 그린 〈동궐도〉에서 청기와 지붕 건물은 선정전과 경훈각 두 채입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국가 재정 때문에 청기와를 거의 쓰지 않았다는 것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은 조선 궁궐 전체를 통틀어 선정전 하나만 남았고요.


사용하지 않으면 기술에 녹이 스는 법이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다시 지으면서 청기와를 만들어보려 했던 사실이 당시 공사 일지인 《경복궁 영건일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고종 2년(1865) 7월 30일의 기록입니다.

"청와(靑瓦)를 구워내도록 한 일을 거두고 와장(瓦匠) 8명을 방송(放送)하였다. 대개 청와는 일반적으로 굽는 기와가 아니라서 그 법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분원점(分院店)에 사기(沙器)를 만드는 흙으로 청와를 조성하게 하였더니, 1개 만드는 데 소비되는 비용이 8냥에 달했다. 다시 흙기와[土瓦]를 만들어 청화(靑花)를 바르고 구워냈더니 물색(物色)이 혼합되어 온전하게 모양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다시 구워진 기와의 표면에 붕사(硼沙)를 바르고 황단(黃丹)을 두 번째로 바르고 미호(米糊)를 세 번째로 바른 뒤 파란(波蘭)을 더해서 구워내었더니 색과 모양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예전 것만 못했다. <와장> 8명이 스스로 잘 만들 수 있다기에 시험해 보았지만, 또 해내지 못했으므로 곧바로 방송하였다."

실패 또 실패…맥 끊긴 청기와 제작 기술

국립중앙박물관 앞 연못가에 있는 청자정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얘기입니다. 만드는 것도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드는 데다, 결정적으로는 원하는 품질을 얻지 못한 것이죠. 기와는 만들 수 있어도 제 색깔이 안 나오면 궁궐 지붕에 올릴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이 대목은 대대로 전해지던 전통 청기와 제작 기법이 단절되었음을 선언하는 장면으로 읽힙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서울 홍대 인근에 있었던 청기와 주유소는 이 동네의 랜드마크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길을 찾아갈 때 누구나 아는 건물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았으니까요. 청기와 주유소는 홍대 인근으로 가는 기준점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그 명성(?)이 청기와를 얹었다는 특이성 때문에 생겨난 건 아닐까요.


국립중앙박물관 연못가에는 청자로 지붕을 만든 꽤 운치 있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정자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해 201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새로 지은 겁니다. 안내판을 보면 앞서 소개해드린 《고려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지었다고 돼 있죠. 이 아담하고 근사한 정자는 과거의 유산을 현재로 불러낸 기억의 타임머신입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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