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론 서울시민 다 죽겠다'..한남대교 탄생 비화

조회수 2020. 10. 17. 11: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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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00만명의 공룡 도시가 된 서울. 과연 서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땅집고는 서울 도시계획 역사를 다룬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한울)’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의 공간 구조 형성에 숨겨진 스토리를 살펴봤습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⑧강남 땅값 상승 촉매제된 제 3한강교 착공 계기


1966년 1월 초순 서울시는 이른바 ‘강남개발 구상’을 발표한다. 이때 발표한 남서울계획 구상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구체적 설계 계획·기간 등을 갖추지 못한 말 그대로 생각을 옮겨놓은 ‘구상’에 불과했다. 다만 제3한강교 가설공사에 앞서 왜 교량공사가 필요한지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땅집고] 1966년 1월 당시 윤치영 서울시장이 발표한 '강남 개발구상' 청사진. /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서울시가 제3한강교를 가설하게 된 것은 남서울을 개발해 ‘인구를 분산해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인구 분산에 대한 절실한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윤치영 시장이 제3한강교를 건설한 이유는 강남 개발 수요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한강에는 한강철교(1900년 7월 완공), 제1한강교(지금의 한강대교, 1917년 10월 완공), 광진교(1936년 10월 완공),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 1965년 1월 완공) 4개 다리만 있을 뿐이었다. 6·25 당시에는 서울시민 절반 이상이 피난을 가지 못했고 공산치하 3개월을 경험해야 했다. 1·4 후퇴 때는 이미 한 달 전쯤부터 서둘렀는데 그래도 막판에 고생을 해야 했다. 서울시민의 신속한 피난을 위한 추가적인 교량이 필요했다.

[땅집고] 1969년 12월 개통 당시의 한남대교./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다행히 제2한강교가 가설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이 나면 군 작전용으로만 쓰도록 돼 있었다. 여전히 교량은 넷뿐이었다. 그런데 서울 인구는 크게 늘어 1965년 이미 347만 명이었다. 150만명일 때 4개 교량으로 피난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때 보다 2배가 훨씬 넘는 인구가 한강을 건너야 한다면, 북한군이 또 침입해 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이러한 걱정은 장관, 국회의원 등을 비롯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북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하는 것이었다. 다만 당시 어려웠던 한국경제 상황 때문에 아무도 요구하지 못했을 뿐이다. 당시 윤치영 시장을 비롯한 서울시 간부들 모두 이를 절실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땅집고] 2004년 당시 하늘에서 내려다 본 한강 다리. 아래쪽부터 동호대교, 한남대교, 반포대교, 동작대교. /조선DB

게다가 1960년대 후반은 남북한 군사 긴장이 심했던 시기다. 1964년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후 남북한 무력 충돌은 1967년 784건, 1968년 985건으로 급증한다. 남파 간첩도 1966년 50명에서 1967년 543명, 1968년 1247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1966년 1월 19일 오늘날의 한남대교인 제3한강교가 착공한다. 경부고속도로 시발점이자 현재 강남 땅값 상승의 신호탄으로 자리매김한 제3한강교는 ‘서울시민 유사시 대피용’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정리= 전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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