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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눈에 불을 켜고 '강남 살리기' 나선 이유

조회수 2020. 10. 16. 15: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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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00만명의 공룡 도시가 된 서울. 과연 서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땅집고는 서울 도시계획 역사를 다룬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한울)’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의 공간 구조 형성에 숨겨진 스토리를 살펴봤습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⑦강북 지역에 인구 집중 억제 정책이 발동한 이유

[땅집고] 강남 개발되기 추진되기 이전 1969년 한강 이남 모습. /조선DB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신년에 서울시를 연두순시(年頭巡視)할 때마다 외쳤던 것 중 하나는 ‘인구집중을 방지하자’는 내용이었다. 1975년 순시 때에는 ‘도심 인구의 강남 분산’만이라도 빨리 실행하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한국전력 등 당시 상공부 산하 모든 기관의 강남 이전 계획이 발표됐다. 1977년 2월 10일 연두 순시에서는 임시 행정수도를 만들어 정부 기능 일체를 옮기겠다는 깜짝 놀랄 만한 대책이 나왔다.


박 대통령이 인구 분산 정책을 강조했던 이유는 비단 ‘균형 발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베트남·라오스·크메르가 연달아 공산화했고 박 대통령은 남한도 공산화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1974년 8월 15일 공산주의자 문세광이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피격하면서 서거한 이후 박 대통령에게 안보 위협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만약 북한군이 다시 남침해온다면 500만 강북시민을 어떻게 도강, 피난시킬 것인가가 중앙정부와 서울시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땅집고] 서울 종로에 있던 옛 경기고등학교. 지금 내부를 개조해 정독도서관으로 쓰고 있다. /조선DB

그래서 박 대통령은 강북에 밀집한 인구와 기업체를 강남으로 옮기기 위해 강북에 각종 시설을 증설하는 것을 억제하기로 했다. 1974년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구자춘이 이듬해인 1975년 4월 4일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금지조치’를 발표한 것은 강북 억제 정책의 일환이다.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금지조치’는 한강 이북의 전답이나 임야를 택지로 전환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매스컴이 그 내용을 크게 보도했고 많은 일간신문은 사설을 실어 “너무 지나친 정책”이라며 “완화할 방법은 없는지” 호소할 정도로 과감한 조치였다.


강북 억제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978년 2월 10일 서울시를 연두 순시한 박 대통령은 “행정·재정적 지원을 해서라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강북에 있는 학교를 강남으로 유치, 이전하라”고 지시했다. 우선 중·고등학교만이라도 강남으로 옮기면 강북의 산업과 인구가 강남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지시가 떨어진 후 4대문 안에 있던 경기·서울·배재·휘문·중동·양정 등 남자고등학교, 그리고 경기·창덕·숙명·진명·정신 등 명문 여자고등학교가 모두 강남으로 터전을 옮겼다. 종로구 내자동에 있던 보인상고, 중학동에 있던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돈화문 앞에 있던 국악고등학교, 마포 전차종점에 있던 마포고등학교 등 많은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했다.

[땅집고] 서울 강남의 야경. /게티이미지뱅크

종로학원, 대성학원, 대일학원, 상아탑학원 뿐 아니라 종로제일 등 예식장 역시 4대문 밖으로 밀려나갔으며 도심부 호텔에서 치러지던 결혼식도 금지했다. 이런 조치 모두가 강북 억제책이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1970년대는 사실상 강북억제·강남유치의 연대였던 것이다.



정리= 전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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