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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보면 어쩌지..' 노태우가 득달같이 실행한 일

조회수 2020. 10. 2. 07: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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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00만명의 공룡 도시가 된 서울. 과연 서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땅집고는 서울 도시계획 역사를 다룬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의 공간 구조 형성에 숨겨진 스토리를 살펴봤습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④ 노태우 정권이 주택 200만호 공급한 까닭


지난 7월 북한의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내 집 마련은 꿈’이라는 기사를 통해 “남조선에서는 집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 돈 없고 권세 없는 주민들은 내 집 마련이 꿈으로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6·17 부동산 대책 이후 수도권에서 이른바 ‘풍선효과’가 일어나면서 집값 상승이 확산되는 현상을 꼬집은 것이다. 이어 “남조선에서 20㎡ 정도 보통살림집 한 채를 사려는 경우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도 먹지도 쓰지도 않고 고스란히 50여년 동안 모아야 할 막대한 양의 돈이 든다”면서 “절대 다수 주민들에게 있어서 제 집을 마련하기란 도저히 실현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으며 주택난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한 사태에 이르고 있다”고 전했다.

오늘날에야 남한 국민들이 이런 내용을 보고 코웃음치지만 30년 전까지만 해도 정부 관계자들은 남한 경제사정을 비난하는 대남매체 보도를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실제로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 200만호 주택 공급 공약이 실현됐던 것은 북한 보도에 대한 두려움이 배경이었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임기 중 주택 200만호를 건설해 서민 주택난을 해결하겠다”. 당시 민정당 입후보자 노태우의 공약이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의 제6공화국이 출범하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5월 25일 정부는 대통령 공약 사업을 현실화하겠다며 ‘주택 200만호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5년간 주택 200만호를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택 200만호는 당시 서울 시내에 지어져 있던 전체 주택의 수와 맞먹는 숫자였다. 경비 조달, 택지 조성, 자재와 노동력 동원 모두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200만호 건설을 추진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는 주택 문제가 초미의 국가 현안으로 떠올랐던 때였다. 1981년부터 한국 경제는 이른바 3저(低) 현상(저금리, 저유가, 저환율) 때문에 매년 10% 이상 성장했다. 이에 따라 시중 유동성이 증가했고 부동산 가격은 급등했다. 특히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급상승했는데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는 1989년에만 평균 23% 상승했다. 주택가격이 오르면서 전세·월세 가격도 함께 오르자 서민 주거비 부담이 가중됐고 주거난이 심화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1989년 폴란드에서 비공산당 정부가 수립된 것을 시작으로 헝가리, 동독, 체코,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으로 확산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과 동독이 무너지면서 1987~1990년에 걸쳐 공산정권 몰락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공산정권 몰락 시기에 한국에서는 제5공화국이 끝나고 제6공화국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6공화국이 수립될 1988년 당시 정부 고위층은 물론 대다수 식자층 사이에는 장차 북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됐다. 공통된 의견은, 통일은 쉽게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정보자유화’만은 곧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쪽의 신문 TV가 자유롭게 북으로 들어가고 북측 신문 TV도 남쪽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만약 남북간 정보자유화가 이뤄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88년 당시 남한 경제력은 북한에 비해 5배 정도 크기는 했지만 저소득층끼리 비교했을 때에는 사정이 달랐다. 북한의 주택 수준이 형편없었지만 적어도 북한에는 ‘무주택자’가 없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면 방 한 개에 부엌과 거실이 딸린 집이 공급됐다. 정부 관계자들은 북한 보도가 남한으로 넘어오면 남쪽의 저소득층은 북쪽이 오히려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에 따라 노태우 정부는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주택 200만호 건설을 결정해 서둘러 집행했고 1기신도시가 탄생했다.



정리= 전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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