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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대교가 올림픽에 1년이나 지각한 이유

조회수 2020. 10. 1. 08: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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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00만명의 공룡 도시가 된 서울. 과연 서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땅집고는 서울 도시계획 역사를 다룬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의 공간 구조 형성에 숨겨진 스토리를 살펴봤습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③올림픽 지각한 올림픽대교의 속사정


서울 광진구 구의동과 송파구 풍납동을 연결하는 ‘올림픽대교’. 서울올림픽에 대비해 만들었던만큼, 현재 27개 한강대교 중 유일하게 ‘교량이 걸려있는 도로의 이름을 딴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다리 개통일은 올림픽 개최일(1988년 9월)보다 1년 이상 늦은 1989년 11월 15일이다. 올림픽대교가 지각 개통하게 된 사정은 무엇일까?

[땅집고] 88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준공 개통한 올림픽대교. /자료=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올림픽대교는 ‘기념비적인 상징성’을 갖고 축제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임무를 갖게 됐다. 그래서 교량의 형태를 공모하기로 했다. 조형물의 경우 공모가 흔한 일이었지만 교량 같은 토목설계를 공모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한강 다리 중 설계 공모는 올림픽대교가 유일했다. 결국 사장교(斜張橋) 형태의 교량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사장교는 교각을 만들어 그 위에 상부 구조물을 올려놓는 모양이 아니라 밧줄이나 고리줄 등을 사용해 상부 구조물을 매다는 방식이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이 작품이 독일의 루드비히샤펜(Ludwigshafen) 지방의 고속도로에 설치한 사장교를 모방했다는 논란이다. 독창적인 것이 아니어서 88 올림픽을 상징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더 중요한 건 당시 한국의 토목기술 수준이 한강에 사장교를 자유자재로 건설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땅집고] 사장교 유형. /사이언스 올 제공

설계 공모 당선자였던 삼우기술단은 사장교를 설계하기 위해 프랑스 전문용역업체 프레시네(FREYSSINET)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당시 한국 기술력으로는 사장교 구조계산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없어 선진국 기술을 이용하기로 한 것. 이 작업은 1986년까지 계속 진행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88올림픽 이전에 준공해야 했기 때문에 전체 구조물 중 사장교가 아닌 부분의 공사부터 서둘러 시작했다.


사장교 기본계획상 당초 사용하려고 했던 공법은 지보공(支保工·공사가 완성될 때까지 상판을 일시적으로 지지하는 가설 구조물)이었다. 지보공 공법을 사용하면 올림픽 전 개통 일자를 맞출 수 있었지만,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었다. 지보공 공법을 사용하면 한강에 심한 홍수가 날 경우 상판을 받쳐주는 강재(지보공)가 떠내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땅집고] 외팔걸이 공법(free cantilever method). /두산백과

그래서 지보공 공법 대신 이른바 ‘외팔걸이공법(free cantilever method)’으로 바뀌었다. 외팔걸이 공법은 한쪽 끝은 고정하고 다른 쪽은 팔을 뻗은 것처럼 돌출시켜 하중을 지지하는 방식이다. 올림픽대교의 경우 주탑 중심에서 좌우로 상판을 놓아가면서 차례차례 케이블로 연결 고정시켰다. 외팔걸이 공법으로는 88올림픽 이전에는 준공하지 못하고 넉넉히 잡아 1년 반 정도 공기가 더 늦춰졌다. 하지만 홍수 때 위험성을 줄일 수 있고 공사비도 기존 지보공 공법을 고수하는 것보다 64억원 정도 아낄 수 있었다. 결국 주탑 높이 88m, 총 길이 3.24㎞, 사장교 구간 300m인 올림픽대교는 올림픽을 상징하지도, 기념하지도, 국력 신장을 과시하지도 못한 채 올림픽을 치른지 1년 2개월이 지난 1989년 11월 15일에 준공 개통했다.


정리= 전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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