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에 집 지으면 좋겠다고? 자칫했다간 물안개에 당한다

조회수 2019. 9. 8. 07: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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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과 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언만, 낙엽은 어느덧 날으고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30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언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벗나무, 능금나무 ─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장이다. 담장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연돌의 붉은 빛만을 남기고 집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지릅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넓은 잎이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혀지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쪽쪽 그 뒷시중을 해야 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에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가제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깨금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이효석『낙엽을 태우면서』(조선문학독본, 1938.12)

겨우내 떨어진 낙엽을 태우면서 봄이 오는 것을 본다. 마당에서 낙엽을 태우는 일은 전원생활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잔재미다.

■‘꿈’을 버려야 전원생활 즐길 수 있어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 글을 밑줄 그어 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몰랐다. 이 글에 담겨 있는 단독주택 생활의 번거로움을. 늦가을에 종종 마당의 낙엽을 태우면서 이 글이 새록새록 생각나지만, 낙엽을 태우는 일도 간단치 않다. 일단 연기가 나지 않도록 불쏘시개를 잘 피워야 한다. 갓 볶은 커피 향기를 즐기려다 과태료 폭탄을 맞을 수 있다. 유난히 연기가 많이 나는 낙엽을 태우다 보면 119에 화재신고가 들어가서 소방차가 출동하는 소동도 벌어진다. 산림에서 100m 이내 거리에 있을 경우 100만원 이하 과태료, 실수로 산불이 날 경우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비싸기로 소문난 ‘별다방’ 커피를 1년 내내 달아놓고 마실 수 있는 커피 값을 낙엽 태우려다 한방에 날릴 수 있다.


차라리 낙엽을 ‘땅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된다’(‘낙엽을 태우면서’ 중에서). 낭만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현실에 가까운 쪽으로의 타협과 절충, 그것이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원주택을 얘기할 때 ‘꿈’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 단어를 버릴 수 있을 때 전원주택을 장만하기 바란다. 보다 현실적인 이유를 찾을 때까지는 낙엽을 태우는 꿈은 버리는 게 좋다.


필자는 30년 이상 만성비염으로 고생했다. 수술을 다섯번 받았고 세상에 좋다는 약은 먹어보지 않은 게 거의 없을 정도였다. 코로 숨을 한번 쉬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약과 수술에 지쳐서 치료를 포기하고 훌쩍거리면서 살아왔다.


고등학교 입시 마지막 세대였던 필자는 입시를 앞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두 달 동안 학교에서 마련해준 합숙캠프에서 방과 후 집중학습을 받았다. 10명이 선발돼 학교 뒷산에 있던 산사의 선방에서 강제 ‘동안거(冬案居-冬安居가 아님)’를 했다. 난방은 없었다. 해병대 중령 출신이었던 교감 선생님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비염은 30년을 내 몸속에 머물다 서서히 빠져 나가더니 어느날 사라졌다. 전원생활 20년에 그렇게 됐다. 그걸 바라고 전원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덤으로 얻었을 뿐이다. 아토피와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전원주택 상담을 하러 오면 필자의 이 경험담을 들려준다. 시간을 두고 자연에 순응하면 전원생활은 몸을 원시상태로 만들어 주는 치유력이 있다.

강변 전원주택을 누구나 선망하지만, 물안개가 발아래 깔리는 위치가 아니면 강이 없는 것만 못하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위치를 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자연에 무조건 가까이 가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유난히 강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변 전원주택은 인기 0순위다. 그러나 아무리 강이 좋아도 강가에서 최소 300m 이상은 떨어져야 한다. 그러고도 강둑보다 지대가 높아야 환절기 아침 안개의 공습을 피할 수 있다. 아침 안개는 발밑에 깔려 있을 때 아름답다. 그 속에 들어가면 폐에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 자연은 위대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본연의 섭리를 따라가면 무한한 혜택을 베풀지만, 사람이 마음대로 휘저으면 역풍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대로 내려와야 전원생활이 은혜로운 삶이 된다.


■“전원 주거 유지비는 도심보다 3분의 1 줄어”


전원생활을 사치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소득이 낮을수록 출퇴근 거리가 멀어지는 주거의 불균형이 현실이다 보니 그럴 만도 하다. 2차대전 후 교외주택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미국에서도 도시로 ‘U턴’하는 추세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작은 집에 살더라도 출퇴근이 편한 곳에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전원생활 초기 약 10년 동안은 하루 서너시간 출퇴근 운전을 했던 필자는 그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대중교통, 특히 전철 교통망이 거미줄처럼 확대되고 있는 지금의 우리나라 수도권과 오직 자동차로만 출퇴근이 가능한 미국의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은 여건이 완전히 다르다.


단순히 출퇴근 비용(시간과 돈)의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인 생활, 주거유지비가 도심보다 3분의1 이상 줄어든다.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먹고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한다. 서울에서만 30년 넘게 살고 있는 필자의 지인들 중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이들이 많다. 정작 먹고 사는 일에 목매는 것은 서울 사람들이다. 20년을 살아본 필자의 경험이다. 고정소득이 줄어드는 실버 세대이거나, 소득의 증가 속도에 비해서 출산, 육아, 교육비 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결혼 초년생들은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전원생활을 심각히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줄기가 억센 잡초는 줄기만 잡아 당겨도 쉽게 뽑힌다. 겉으로 강한 것을 다 써버리면 속이 부실해지는 것이 집짓기와 다름이 없다.

잔디를 가꾸는 고단함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잔디 마당의 잡초를 뽑다보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잎이 무성하고 손에 잘 잡혀서 부드러운 잡초는 잡아당기면 줄기만 잘라지고 뿌리는 그대로 있다. 결국은 호미로 땅을 파보면 도라지처럼 굵은 뿌리가 땅 깊숙이 박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줄기가 가늘고 질긴 잡초는 호미가 필요없을 정도로 잘 뽑힌다.


인생살이도 그렇지 않을까. 겉은 한없이 유해 보이지만 뿌리가 튼실한 삶과 줄기는 질겨도 뿌리는 부실한 삶이 있듯이 말이다. 사람마다 주어진 그릇은 다르지만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크기는 제로섬(Zero Sum)이다. 겉으로 강한 것을 다 써버리면 속이 허(虛)해지는 법, 집짓는 일도 이와 같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글= 이광훈 드림사이트코리아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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