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건 때로 도움이 된다

조회수 2019. 2. 27. 21: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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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는 오이와 가지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어요. 특정 음식에 으에에에 손사래를 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예요. 그걸 안먹는다고 딱히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기도 하구요. 저는 당근과 브로콜리를 극도로 무서워해요.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서워요. 딱히 당근과 브로콜리가 저에게 잘못한 건 아녜요. 어릴 적 그들로부터 공격당했던 기억이 있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강제로 먹이지도 않았죠. 그냥 맹목적으로 싫은 거예요. 

출처: 페이스북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뭔가 씹어도 씹어도 그 아삭거림이 끝나지 않는 당근을 먹을 때면 도대체 언제까지 씹어야 이 아삭거림이 사라질까...막연해져요. 브로콜리도 비슷해요. 엄청 큰 브로콜리도 브로콜리 모양인데 그걸 자르고 쪼개도 브로콜리 모양이예요. 프랙탈 구조마냥 끊임없이 이어지죠. 심지어 씹으면 아삭거리는데 막 뭔가 부서지는 느낌인데, 그 작은 초록들이 입 안을 방황하는 느낌이 소름이예요.

하지만 이런 당근과 브로콜리도 가끔 먹을 수 있는 경우가 있어요. 카레에 들어가서 이도저도 아니고 흐물거려져버렸다거나, 당근이 나노입자로 변해버린 당근케익이라거나, 아예 형체를 잃어버린 브로콜리수프는 호록호록 잘 먹는 편이예요. 

출처: 동화 『난 밥 먹기 싫어』

살아가다보면 일이든 사람이든 사건이든 당근과 브로콜리같은 녀석들이 찾아올 때가 있어요. 이유없이 싫고 그냥 싫고 막 싫은 것들.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순 없는데 뭔가 본능적으로 싫은 것들.


대부분의 계발서나 조언에선 위기와 역경에 맞서 당당히 싸우라고들 얘기해요. 실수가 너를 만들 것이고, 실패를 통해 성장할거야! 라고 외치죠. 맞는 말이예요. 실패가 없다면 누가 우릴 만들겠어요. 하지만 맞서 싸워 이길 가치가 있는 것이 있고 아닌 게 있더라구요. 

퇴사를 하고 싶어 죽겠는데, 퇴사를 하면 내가 너무 패배자같고 도망가는 것 같아 비겁해 보일 때가 있었어요. 사무실분위기는 항상 싸아아아...했고, 부당한 요구와 침묵만이 가득했던 세기말적 회사였었는데도, 끊임없이 생각했죠.


이걸 견뎌내면 뭔가 배우는 게 있을거야.


반면교사라고도 하잖아?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 걸 체득할 수 있을거야! 라는 생각으로 자리를 지켰죠.

출처: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었어요. 반면교사는 제3자 입장에서 관찰하면서 느끼는 거예요. 함께 그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건 그저 공모자일 뿐이죠. 나쁜 공간안에 있으면 나쁜 것을 체득하게 되요. 빨리 도망쳐야 했었어요. 


모든 역경과 시련을 다 이겨내고 상대할 필욘 없어요. 실패에도 퀄리티란 게 있는 법이거든요. 만약 무언갈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면 고민하지 말고 그냥 도망치세요.


한 일본영화의 제목처럼 도망치는 건 비겁하지만 도움이 돼요.


정곡을 찌르는 에세이 『기분 벗고 주무시죠』 의

'당근과 브로콜리' 챕터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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