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어른이 알려줘야 할 것

조회수 2021. 4. 2.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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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지켜주고 싶다.

나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10살, 그리고 유치원생인 6살이 되었는데, 최근에 교육에 대해 정말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고, 교육관이 제법 확실하게 서게 되었다. 


현재 시대에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교육 환경의 제공이란, 결국 아이가 인간으로 성장해서 생산적이고 행복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첫째로 적응 능력이다. 부모는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알면 벌써 부모가 떼부자가 되었을 것이지.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미래는 매우 가파르게 변화할 것이란 점이다. 과거나 미래나 변하지 않는 가치와 진실들이 있다는 말은 교만하다. 정말이지 부모 세대는 부모 세대의 상식으로 미래를 점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어떤 미래가 오든 원리적 사고에 강하고, 다양한 경우를 경험해 스스로 삶을 시행착오해본 사람이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다들 아시다시피 세상이 급격하게 변할수록 적응력이 높은 사람과 덜 그런 사람의 격차는 확확 벌어진다. 그것이 위험이고, 그것이 누군가에겐 기회다. 이 능력을 키워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선물은 없을 것이다.


부모가 설령 이런 능력을 키워주거나, 혹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까지 있다손 치더라도 아이가 직접 찾아 나서는 것과의 격차는 꽤 크다. 흔히 ‘우리 아이에게 그걸 직접 찾을 능력이 없으면 어떡해요, 걱정돼서 어쩔 수 없이 제가 가이드를 해줘야 할 것 같아요’라고도 한다.


그런데 내 생각은 너무나 반대다. 인간이란 자신이 운전대를 쥐고 온갖 의사결정을 해보며 보상을 얻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하며 성장한다. 그런 시행착오를 자신의 의지로 많이 해본 사람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부모의 개입으로 인해 운전석이 아닌 ‘인생의 뒷좌석’에 앉아 창밖이나 기웃거리게 되는데 이렇게 큰 비극이 없다.


이렇게 커간 아이들이 어느 날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할 일은 없다. 또한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해주는 환경에 맞닿아서야 비로소 눈이 번쩍 뜨이고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그 대상이 대부분 게임일 것이다. 게임이면 다행이지만, 비행의 길일 가능성도 높다. 부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곳이라면 어디에서건 자유롭고 깨어 있는 느낌이 들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그런 것을 어릴 때부터 옥죌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에 자신의 손으로 결정해야 할 일이 한 10만 개가 된다고 해보자. 10만 번의 경험이 쌓이면 판단력이 점차 정확해지고 자신의 운명을 조금씩 찾아갈 수 있게 된다. 어떤 부모는 그렇게 아이가 직접 결정하고 조금씩 다쳐볼 수 있는 권리를 만들어주는 데 집중한다.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게, 그러나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더 다쳐볼 수 있게 도와준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바보로 알아서 모든 결정을 방해한다. 판단력이 부족한 아이니 허리 높이의 단상에서 뛰어내려도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느라 바쁘고, 모든 종류의 돌발 행동이나 실험 정신에 으름장을 놓기 바쁘다. 소위 교정주의자다. 실수를 못 하게 막고 또 막고 또 혼내서 실수 자체가 없는 아이를 만들겠다는 관념이다.


우습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이 시키니까 더 하기 싫어지더라’는 생각을 최소한 수백 번 정도는 해봤을 것이다. 어른들도 말이다. 상사가 시켜서, 남편이나 부인이 시켜서, 부모가 시켜서, 선생이 시켜서, 청소가 하기 싫고 숙제가 하기 싫고 집안일이 하기 싫어진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그러하다. 자신은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자녀가 그렇게 말하면 그 권리를 주기가 싫어진다. 이런 것이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교육에서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라 느낄까. 나는 우선 ‘숙제’에 반대하게 되었다. 자신이 정한 것도 아닌 숙제를 왜 해야 할까. 남이 내준 숙제를 사랑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냉정하게 돌아보건대 인생에서 남이 내준 숙제를 열심히 푸는 게 도움이 된 경우가 있었는가? 어릴 적 숙제를 열심히 한 것이 커서 도움이 되는 사례를 상상할 수 있는가?


진짜 비싼 수업들이 있다고 해보자. 한 시간에 10만 원짜리, 아니 100만 원짜리라고 해보자. 진짜 전문가를 키우는 과정이나, MBA라고 해보자. 강사는 과연 숙제로 진도를 뺄까? 아니면 한 시간 한 시간의 수업에서 최대한의 화두를 던져주고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까?

인생에 불가피하게 숙제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현장에서 제대로 배우는 것이 효율이 훨씬 높다. 숙제가 선생의 게으름 때문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하물며 스타트업의 거대 프로젝트들도 집에서 혼자 풀어오라는 숙제를 던지진 않는다. 하더라도 업무 환경 내에서, 혹은 함께 앉아서, 짧은 시간 안에 집중해서, 문제를 푼다. 따로 가져가는 숙제란 오랜 시간 숙고해야 하는 문제뿐이며, 생각보다 경우가 많지 않다.


구글 벤처가 적용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스프린트라는 방법이 있다. 숙제가 효율적이라면 스프린트 세션은 숙제로 가득할 것이다. 놀랍게도 개별 숙제는 없다. 어떤 회사는 사람이 하루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4~5시간에 불과하다며 회사에 있을 때의 집중 업무 시간에 대부분의 업무를 끝내자고도 한다.


무슨 기준으로 아이들이 어른들과 효율성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는지 곱씹어볼수록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 100년 전에 말 잘 듣는 근로자를 만들기 위한 복종 훈련이 연상되거나, 100년 전에 학교에 가는 특혜가 거의 없고 선생님은 부족하던 시대에 스스로 진도를 빼기 위해 만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맥락에 맞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숙제 중에서도 반복적인 수학 풀이 등에 대해서 특히 반대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수학을 제일 잘 이용하는 소위 ‘퀀트’들을 모시고 일하고 있지 않은가. 수학이란 정말 재밌는 학문이다. 원리를 풀어가는 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많은 부분은 공간에 대한 이해다. 이 시대에 정말 중요한 학문 중 하나다.


우리 아이들은 계산기와 엑셀과 코딩에 익숙해질 세대다. 그러나 대부분은 254 X 97 같은 산수 문제를 손으로 빨리 풀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만난 어른 중에 저 문제를 빨리 풀 수 있는 능력으로 밥벌이에 도움을 받은 사람을 단 한 사람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가? 


곱셈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은 보통 책상 옆에 계산기를 둔다. 곱셈을 안해도 되는 99%의 직업은 대체 곱셈 연습이 왜 필요한 것일까. 근의 공식 따위는 더욱 필요가 없다.

고등 수학이 될수록 반복 연습과 접근 방법이 달라진다. 사물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수학을 정말로 사랑할 수 있는 아이들을 100명 데려다 놓고, 단순 덧셈이나 곱셈 문제를 하루에 500개씩 풀게 하면 순식간에 수학에 대한 최소한의 열망도 다 없애버릴 수 있다.


내 아이가 절대로 수학을 못 하게 할 참이라면 나는 하루에 두 시간씩 수학 문제를 풀게 할 것이다. 내 아이가 절대로 게임을 못 하게 할 참이라면 나는 하루에 두 시간씩 게임을 강제로 시킬 것임에 확실하다. 강제로 하면 확실한 트라우마가 생기니까. 채점해주며 틀릴 때는 크게 혼을 내고, 맞춰도 칭찬을 안 해주면 인간인 이상 그 분야를 싫어하게 된다.


사람은 성취감을 좇고, 혼나는 것을 싫어한다. 얻을 건 없고 잃을 것만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면 깊은 트라우마와 혐오감을 줄 수 있다. 이런 교육은 절대로 배제해야 한다.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교육의 대다수는 ‘재밌지 않아? 한 번 더 해봐’ ‘얼마든지 틀려도 상관없어’ ‘부담 없이 즐겨봐, 아빠는 너의 성장을 구경하는 게 매 순간이 재밌고 신기해’라고 해주는 것 아닐까.


나의 초등학생 딸은 책을 매우 좋아해서 정말 많이 읽는다. 자연히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스트레스지만 혼나는 것도 스트레스란다. 딸에겐 작문이 정말이지 얻을 게 없는 활동이다. 얼마 전엔 작가가 꿈이라고 했는데 그 꿈도 순삭 된 것 같다. 이런 교육이 과연 맞을까?


아이의 글을 보니 글을 충분히 잘 써서 의아했다. 엄마의 교정을 거친 것이었다. 나는 딸이 그렇게 글을 잘 쓰기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매일 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문법도 철자도 다 틀린 글을 신나게 쓰면서, 천 개의 글을 쓰고 만 개의 글을 쓰고 매일 매일 조금씩 더 글에 관심이 생겼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성인들은 글을 그렇게 잘 쓰지 않는다. 고로 어린이가 잘 써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수없이 많은 글을 신나서 써본 것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재밌게라도 쓰면, 자신의 취미가 되면 다행이다. 아빠는 그렇게 취미가 붙기를 기대한다. 취미가 붙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외부 압력에 반대한다.

조금 있으면 딸은 온갖 국사나 사회 문장을 강제로 외워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국사나 사회를 혐오하게 될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교육 과정이 진행될수록 더 혐오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수학도 혐오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반에서 1등 하는 친구들은 가끔이나마 칭찬을 들을지 모르지만, 2등 이하의 친구들은 그 분야에서 칭찬을 들을 리도, 성취감을 느낄 리도, 애정을 느낄 리도, 자존감이 올라갈 리도 없다. 자신이 선택한 영역들도 아니니 적응력 개발에 도움이 될 리도 없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의미가 없는 교육과정이건 뭐건 간에 그 경쟁의 끝에 아주 달달한 보상이 있기 때문이어야 한다. 예컨대 입시 지옥을 성공해서 올라가면, 적응력이건 학습력이 오르건 말건 간에, 여하간에 그 이후에 엄청난 금전적 보상이 약속된 경우일 것이다. 싱가포르나 프랑스나 우리나라나 엘리트 학벌주의로 인한 혜택이 많은 편이니 이해는 된다.


그러나 그러기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한다. 그 단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새삼 정말 모르겠다. 수학을 좋아해서 얻게 되는 이점보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얻게 되는 이점보다, 학력으로 얻는 이점이 여전히 더 높다고? 2030년대에도 그러하리라고? 내 상식으론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20년 전이라면 모를까. 50년 전이라면 모를까. 현 단계에선 미친 발상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의미가 있건 없건 어떤 KPI를 쫓는 것이 누군가에겐 재밌는 경쟁이자 성취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생산성을 담보해야 하는 회사나 공무원 사회에서, 전직원을 동일한 KPI 로 측정하는 정책을 내놓는다고 가정해보자. 국회의원 혹은 운동선수 혹은 과학자여도 좋다. 모두 단일 기준으로 경쟁을 시킨다고 해보자.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동일 KPI는 생산성의 적이다. 모두 각자에게 맞는 KPI를 빚어주고 자신의 재능을 빛내게 하지 않으면 회사는 순식간에 망한다. 인간이란 조직이란 그러하다. 나에게 맞지 않는 KPI 는 영혼을 파괴할 뿐 아니라 잠재력을 박살 내고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간단하고 명료한 진리이며, 이 진리에 역행하는 경영자가 있다면 채 1년 만에 회사가 상장 폐지 하는 기적을 맛볼 것이다.


교육 전문가들은 설마 이 사실을 이해 못 하는 것일까? 그들이 경영자들보다 인간이나 생산성을 잘 이해하는 것일까? 어느 날 ‘전문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새삼 수억의 연봉을 받는다는 금융 전문가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하기도 하는지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듣기에는 이상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전문가’들이 어련히 관행적으로 진리라고 하던 이야기, 냉정하게 의심해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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