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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할 용기가 없는 직장인이 퇴근 후 했던 행동

조회수 2021. 3. 18. 1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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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전공 석사 학위도 받고, 요가 강사도 되고, 사업가도 되어 있었다.
A: 선배님, 안녕하세요 맞은편에 앉은 □□□입니다. 혹시 쪽지 가능하신가요?

나: 아 네, 안녕하세요 □□ 씨, 무슨 일이시죠?

A: 다름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1년 동안 지켜보고 오지랖 살짝 부려서 말씀드려봅니다. […] 왜 그런 취급을 받으시고 그 부서에 계시는 거죠? 저 같으면 당장 도망쳤을 거 같아요.

쪽지를 받고 타자를 계속 쳐야 할 것 같은데 애꿎은 되돌로리기 화살표만 계속 눌러댔다. 적당하게 둘러댈 문장을 조합해내느라 생각을 굴렸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 아니, 솔직히 창피했다. 


1년 동안 칸막이 하나로 다른 부서였던 A와 나는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그 부서와 내가 속한 이 부서는 공기마저도 다른 듯했고, 가끔 나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눈빛으로 사실 위로도 받았다. 사무실 공간 안에서의 나는 너무 피폐해져 있었고 최대한 몸 사리고 지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을 되돌려보면 그로부터 4년 전으로 돌아가서 처음 단추부터 매만져야 했다.
올해 신입사원들은 전부 다 지방으로 배치하고 순수 영업부터 배운다.

명예 회장님의 한마디로 기술영업으로 합격했던 나는 본사 대신 지방에서 순수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찌어찌하여 (말하자면 긴 이야기들은 생략하고) 신입사원이지만 영업실적 전국 1등을 찍고, 다음 해에 바로 본사인 서울로 근무지가 바뀌었고 기술영업으로 직무 또한 바뀌었다. 1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선배들은 어린 여동생을 걱정하듯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본사 텃세 심하다는데 어쩌냐? 잘할 수 있겠어? 그냥 여기 있는다고 하지 그래?”

“그래요? 가서도 열심히 하면 되죠. 잘할 수 있어요!”

세상 물정 모르게 그저 새로운 곳에서도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솔직히 새로 근무하게 될 본사는 집이 가까워서 내심 좋았다. 


지방에서 본사로 1년 만에 오는 경우는 아주 매우 드물었고, 소위 쉽게 오지 못하는 본사에 애송이 한 명이 등장한 것에 달가울 리 없다는 걸 이제는 이해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 부서는 오랫동안 부서원이 바뀌지 않고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며 알아서 눈치껏 잘했을 것들을 꼭 지켜야 할 첫 번째로 알려주었다.

너보다 직급은 낮지만 회사 생활을 오래 했으니 ○○ 씨라고 부르면 안 되고 꼭 ○○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

이 부서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사람이니 잘 보여야 한다.

한국에서 지냈으면 자연스럽게 알 법한 내용을 부서에서 꼭 지켜야 할 법칙처럼 이야기해주니 오히려 위화감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특히 ‘잘 보여야 한다’는 식의 말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본사 근무 첫날부터 작지만 사람 냄새가 났던 지방 영업소가 많이 그리웠다. 직무가 바뀌고 업무에 적응하느라 퇴근이 늦어졌다. 선배 한 명이 내 옆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막내인 네가 퇴근을 안 하니깐 줄줄이 위로 집에 못 가잖아. 빨리 가.

이 말을 듣자마자 업무 정리도 못 한 채 황급하게 컴퓨터를 끄고 정신없이 퇴근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는 ‘빨리 가’라는 말 앞의 설명이 더 필요했고, ‘빨리 가’라는 세 단어에 어떤 감정이 전이되었다. 무엇보다 지방 영업소에서는 막내가 가장 늦게 가는 분위기라 180도 다른 업무 환경에 첫날부터 적응하기가 벅찼다.

조금씩 쌓여가던 불만이 터진 건 본사에서 근무한 지 한 달째 되는 마지막 날이었다. 기술영업도 영업조직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목표 실적을 맞춰야 했다. 순수 영업할 때는 내가 매출과 실적을 잘해주면 팀 전체에 도움이 되었다. 당연히 이 부서에서도 그렇겠지 생각했고 어떻게든 부서에 잘 어울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니, 선배들한테 잘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선배 한 명은 퇴근할 무렵 나에게 다가와 말 한마디 툭 던지고 갔다.

“너 이거 실적 빼~”

“네? 왜… 실적을요?”

“그냥 빼.”

“그냥 빼” 앞에 어떤 말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문장을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이었을까?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은 채 부정만 당하니 뒷맛이 몹시 쓸쓸했다.


미운털 박힌 직원이 반전의 계기로 잘 어울리게 되는 드라마는 많은데 왜 그게 내 이야기는 되지 않았을까? 본사 발령 났을 때 지방 영업소 소장님이 “더 있지 그래, 네가 가운데 앉아서 밝게 웃고 싹싹하게 해 주니 영업소 분위기도 잘 살고…(후략)” 


이렇게 붙잡아주는 사람의 마음에 응하지 않은 내가 벌 받는 거라 생각했다. 밝고 싹싹한 성격이 왜 이곳에서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걸까. 같은 회사인데 나는 순식간에 그렇게 부서의 부적응자가 되어 바깥에서 맴도는 사람이 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 전에도 비슷하게 고통받고 퇴사했다는 사람 이야기도 들었다. 나 역시도 퇴사를 생각할 만큼 몹시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왕따가 전통인 부서라니. ‘어딘가 내가 잘못한 거겠지’ 하며 나의 잘못만 찾다 지쳤던 나에게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야기였다. 입은 옷이 너무 튄다거나, 화장이 진하다거나 업무 외적인 지적은 나의 마음을 더 멀어지게 했다.

너는 강남 사니깐, 월급을 용돈으로 써서 좋겠네.

이런 비아냥까지. 혹시나 내가 하는 말이 이상한가? 실수하지는 않았나? 매일같이 회사에 있었던 일들, 들었던 말들을 복기하며 퇴근 후의 시간까지도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 사용했다. 그러고도 몇 년 더 많은 노력을 한 것 같다. 


사실 회사 동기,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에피소드를 아주, 무척, 매우 어색해한다. 믿기지 않는다 했다.

네가? 너 연수원 때부터 동기들 중에서도 인싸 아니냐? 네가 아싸라고?

그렇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곳에서 나는 누가 봐도 아싸였다. 답답했다. 하루하루 쌓이던 수많은 감정을 뒤로하고 마음의 문을 서서히 걸어 잠갔다.

신입사원 전국 1등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사회의 혹독함도 모른 채 대기업 여성 임원을 꿈꾸던 나는 “내가 나로서 있으면 안 되는 회사”를 벗어나 “내가 나로서 온전히 있어도 되는” 회사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퇴사할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나는 바보 같지만 견뎌내는 걸 선택했다. 다시 맨 처음 위로 돌아가 맞은편 앞 사원이 왜 그러고 부서에 있느냐? 도망치라는 말을 직접 해주기 전까지 무려 5년이라는 세월을 그 부서에서 어리석게도 시간을 보냈다. 결과적으로는 고마워야 할 시간이지만.


본사로 오고 1년 정도 지났을까? 더 이상 회사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로 퇴근 후까지 이어서 스스로 괴롭히는 일은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회사 안에서 근무시간 내 집중해서 업무를 끝냈고 6시 30분 퇴근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마자 칼퇴를 했다. 저녁을 먹고 7시부터 자정 12시까지 무려 5시간이나 있다니. 회사 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희석해줄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취미,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2~3가지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회사 위치가 강남역이라는 것을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5년 동안 나는 퇴근 후 제2의 시간을 만들어갔다. 매일 밤 11시 30분이나 자정에 퇴근하는 나를 경비원들은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 시간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회식 후 대리를 불러 술에 취한 모습이었는데 운동 후 샤워까지 하고 집에 가는 내가 생소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 준 경비원 아저씨들은 회사 내 나의 유일한 말벗이 되어주었다. (동기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근무했기에…)


참 많은 걸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퇴근 후 근처 영어회화 학원을 다녔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운동가기 전까지 영어 공부를 했다. 영어 공부를 다 하고는 주차장에서 요가 매트를 꺼내 등에 매고 주 5회 수련도 꾸준히 했다. 


주 1회는 기타 소모임에 들어가 배우고 싶던 통기타 레슨을 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근처 북카페에서 열리는 책 모임에 들어가 책을 읽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보냈다. 주중에 대한 연장선으로 주말에는 꽃꽂이와 베이킹 클래스를 참여했고 원데이 클래스로 배우고 싶은 것들은 하나씩 경험해갔다.

같은 회사 안에서도 부서가 바뀌면 다르듯이 다른 회사로의 도전, 이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직생활에 살짝 데인 나는 그와 관련 없는 무언가에 도전하면서 나를 더 찾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이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오직 대기업 취업 준비로만 대학 생활을 보낸 20대의 나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자아실현을 위한 취미, 공부, 일들을 찾아가며 하나씩 해나갔다.


대학생 때부터 꾸준히 해오던 요가를 주 5회 수련하면서 요가 강사 자격증에 도전을 했다. 전공에 대한 공부가 학부로는 부족하다 싶어 퇴근 후 다닐 수 있는 대학원에 입학했고 석사 공부도 이어갔다. 석사 공부를 하다 보니 관련 주제로 사업하고 싶은 분야가 생겨 준비하고 사업도 하게 되었다.


직장 내 괴롭힘을 이겨내는 수단으로 나는 회사 밖에 에너지를 돌렸다. 퇴근 후 제2의 삶을 사느라 더 바빴다. 그렇게 5년이 지나자 어느새 전공 석사 학위도 받았고, 요가 강사도 되었고, 사업가도 되어있었다. 


결혼한 지금도 직장 외 생활로 여전히 바쁘게 지낸다. 회사 내 아웃사이더로 살아남기 위해 회사 밖에서 해왔던 일련의 경험은 지금 나의 퇴근 후 딴짓에 큰 도움을 주었다.


원문: 로키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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