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팔이의 유래

조회수 2020. 9. 29. 16: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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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체 가격만 듣고 싸다고 사면 눈탱이 맞는 건 이미 1980년 말부터 그랬다.

최근 엔비디아 3080(nvidia 3080) 사태가 용팔이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간 유통을 하던 용산 도매상인을 거치지 않고 에이수스(asus)를 비롯한 수입 총판에서 온라인 쇼핑몰로 직판한 이유다. 


사실 총판은 진작부터 이러고 싶었을 거다. 대부분의 경우 문제없이 유통되지만 수요가 공급을 넘는 일부 부품은 금번처럼 도매상들이 물품을 쌓아놓고 담합하며 장난질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총판이 욕먹는 사례도 많아지고.


용산이 내리막길을 걸은 건 하루 이틀 이야기도 아니다. 2000년대 초반 다나와가 등장하며 컴덕들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 전엔 하나하나 발품 팔지 않으면 눈탱이를 피하기 어려웠다. 유통 제품은 규격화되어 있는데 판매가 그렇지 못한 탓이다. 다나와의 등장으로 내리막을 걷기 시작해 한때 10조가 넘었던 유통 시장은 반 토막이 나버렸다.


서론이 길었는데, 용산 이야기를 하려면 한참 뒤로 리와인드 될 필요가 있다. 최초의 우리나라 전자제품 판매단지는 종로의 세운상가다. 


1968년 완공된 세운상가는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이기도 하다. 상층부는 주거시설이고 1–3층에 전자제품 상가들이 많이 들어섰다. 지금은 너무 오래돼 낡은 모습으로 방치 아닌 방치 상태지만 세운상가는 1970–1980년대 전자제품 유통 및 제조의 메카였다.

세운상가는 1980년대 오락실 붐, 콘솔 붐, 노래방 붐, 휴대용 카셋트 붐 등에 대호황을 맞았던 곳이다. 지금이야 할배 천국이지만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 종로는 유통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종로5가 약국 골목이나 제기동 경동시장 등 아직도 유지되는 흔적이 있다.


유통이 많으면 이권이 생기고 이권을 노리는 이들은 많아진다. 온라인도 없을 때고 부르는 게 값이고 복제할 수 있는 전자제품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조폭을 끼거나 조폭이 직접 유통을 하는 사례들이 많아진다. 


당시 세운상가의 주된 이권은 1980년대 초부터 불어온 오락실 붐에 기인한다. 지금은 아주 간헐적으로 볼 수 있지만, 1980년대엔 동네마다 한두 곳 이상은 비디오게임 오락실이 있었고 초중고딩뿐 아니라 젊은 성인까지 가득했다. (담배 연기도…)


초기엔 일본산 제품을 수입해서 유통했으나 전자제품 특성상 복제가 가능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으랴. 본격적인 기판 복제를 한 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예 복제업을 전문으로 하게 되었고, 나중엔 복제에 특화된 대만의 품질 좋은 복제기판을 수입해다 유통했다. 


이 과정에서 조폭들은 전자쟁이들 몇몇 앉혀 놓고 자금 회전시키면서 떼돈을 벌기 시작했다. 오락실 창업 붐에 얹혀 복제하거나 복제품을 수입만 하면 팔려나갔으니 말이다. 


큰형들이 그걸로 돈을 벌면 피래미들은 카세트, 게임팩 등을 유통했다. 게임팩도 당연히 대만산 롬카피본이고, 통칭 워크맨으로 불리는 휴대용 카세트는 관부가세를 피해 보따리 밀수한 제품이었다. 거기까지야 그럴 수 있는데 워크맨은 마진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든 게 분해됐다. 영화에서 나오는 장기팔이 수준이다.


정품 번들 이어폰은 형태만 똑같은 싸구려로 교체되고, 흔히 껌전지라 부르는 니켈카드뮴 전지는 옵션 구매 대상, 물론 충전기도 옵션이었다. 본체 가격만 듣고 싸다고 사면 그렇게 눈탱이 맞는 게 이미 1980년 말–1990년 초 세운상가였다. 


대복마전이고 던전이었다. 애초에 조폭 문화였고, 사업 자체가 불법에 기인하니 그런 판매 방식이 일반화되는 거야 이상한 일도 아니다.

출처: 문화예술협력네트워크

지금 건물은 여전히 흉물스럽지만, 주변 상가도 일부 철거하고 공원으로 꾸며놔 한결 나아졌다. 1980–1990년대 세운상가는 마약상들의 거래처처럼 이미 할렘화되어 있었다(실제로 포르노 서적 및 비디오 등 성인용품, 약도 유통했다). 저층 상가에서 조폭을 끼고 오만 불법제품을 유통하니 일반 주거가 가능할 리도 없다. 애저녁에 모두 빠져나가고 주거지는 사무실이나 창고로 쓰였다.


그러던 1980년대 말 용산전자상가가 생겨났다. 용산이 본격화된 건 PC시대가 열린 1980년대 말부터다. 세운상가가 기판, 롬 카피 등 하드웨어 카피 기반였다면, 용산은 플로피 디스크 등의 소프트웨어 카피(…)를 기반으로 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용산은 세운상가보다 PC 기반의 좀 더 젊고 밝은 이미지였다. 나진, 선인 상가는 이전부터 전자상가 역할을 했지만 용산이 세운상가를 제치고 선두로 나선 건 1988년 전자랜드가 생겨나면서부터다. 주변으로 확장성이 결여된 세운상가와 달리 용산은 면적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넓으며 다양했다.


세운상가의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운 소비자들 다수가 용산을 찾았다. 1985년 4호선 개통으로 신용산역이 생긴 것도 접근성을 높여주었다. 이에 세운상가 상인들은 용산으로 많이 이전하기 시작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은 없었다. 새 부대에 헌 술이 섞여 들어간 셈이다.


그 출신이 어디 가겠는가. 용산 특유의 삐끼문화와 위협, 강매 등은 그들의 문화와 유산인 셈이다. 물론 선량한 상인들이 다수이겠으나 온라인 시대가 열린 지도 20여 년, 그 흐름의 한가운데서 자정하지 못하고 코로나로 인해 근근이 이어가던 명맥도 끊어지게 되었으니 자업자득이라 밖에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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