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 유행이 드러내는 밑바닥: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

조회수 2020. 4. 9.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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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국 정부가 혐오를 부추기는 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1.

한국에서 첫 번째 코로나19 환자가 나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환자가 많지 않던 1월 말과 2월 초에는 중국인 입국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지금도 이러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들이 있다. 


‘중국으로부터의 입국’과 ‘중국인의 입국’을 구분하지 않은 인종주의적 주장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고,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76만 명의 호응을 얻었다(☞관련 자료: 중국인 입국 금지 요청(청원)).

다른 나라를 둘러봐도 감염병의 원인을 ‘우리’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돌리는 것은 한국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다. ‘비국민’에게 화살을 돌리는 일은 세계 곳곳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심지어 국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2.

이 글에서 소개할 논문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자치대학 환경과학기술연구소의 연구진이 국제학술지 <지리학 포럼>에 발표한 것으로, 그리스에서 일어난 말라리아 유행에서 이민자들이 어떤 존재로 이해되고, 취급받았는지를 보여준다(☞논문: 위기의 시간에 공중보건과 이민의 생명정치 – 그리스에서 말라리아 유행(2009-2014)).


연구진은 2009년에서 2014년 사이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주 에브로타스 지역에서 발생한 말라리아 유행을 통해, 세계금융위기로 어려웠던 시기에 공중보건과 이주민이 말라리아를 매개로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탐색한다.

출처: ResearchGate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그리스 에브로타스 지역에서 유행한 말라리아 환자의 지리적 분포를 보여주는 지도.

그리스에서 이주노동자는 말라리아 감염 위험이 큰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들은 오렌지 같은 상품작물을 대량으로 경작하는 지역에서 일을 했기에 관개수로나 물웅덩이처럼 모기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 근처에 머물렀고, 모기를 피할 수 있는 별도의 장비를 지급받지도 못했다. 


이주노동자를 보는 시선도 그리 곱지 않았다.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는 경제 위기를 타고 이주자에 대한 적대감을 악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보건기구 유럽지역사무소가 작성한 보고서에 포함된 “풍토병 지역에서 (말라리아가) 수입되었다”라는 문구는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와 혐오, 그리고 경제 위기에 맞서는 긴축 정책이야말로 그리스에서 말라리아가 확산하기에 더 좋은 토양이 되었다.


우선 지역 정부는 말라리아 유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랜 기간 모기 개체 수를 관리하지 않았다. 2010년에 마지못해 모기 퇴치사업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철 지난 방식을 채택했고, 그나마도 매해 위탁 업체가 바뀌면서 모기퇴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1-12년이 지나 중앙정부가 나선 후에야 제대로 된 모기퇴치가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말라리아 유행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중앙정부는 왜 유행이 한참 진행된 후에야 갑자기 개입하게 되었을까? 이는 중앙정부의 관심이 사람들의 건강이 아니라 경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말라리아 감염이 늘어나자 세계보건기구는 2012년에 에브로타스 지역을 말라리아 위험지역으로 선포했다. 


관광객이 줄어들 것을 걱정한 중앙정부는 급히 공중보건 대응에 나섰다. 또한 정치인과 관료들이 유권자인 그리스 국민에게 말라리아가 퍼질까 봐 걱정했던 것도 중앙정부가 급히 움직이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출처: The National Herald
그리스는 유럽의 인종차별 최전방이 되었다.

그리스의 경제 위기 동안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는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삶이 팍팍한 그리스 시민들은 국가적 차원의 경제적 어려움을 탓할 수 있는 ‘타자 Others’를 만들어내고 비난했다. 말라리아 유행의 원천이라는 낙인이 찍힌 이주노동자들은 국가 경제를 위한 ‘예비군’에서 ‘잉여인구’로 전락했다.


공중보건 당국은 2012년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이주노동자 전원에게 강제로 항말라리아 약을 복용하게 했다. 말라리아는 모기에 의해 전파되면서도 중간 숙주에 철새가 끼어있어 감염경로가 비교적 명확했던 웨스트나일 열과 비교했을 때 감염 경로가 불확실하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특성은 이주노동자에게 낙인을 찍을 여지를 더 크게 만들면서 인종주의적 정책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2011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말라리아를 그리스로 수입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스 공중보건 당국도 2016년 전까지는 이주민들을 ‘질병 수입자’라고 비난하더니, 이들이 그리스에 머무르는 동안 감염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슬그머니 인정했다.

 

3.

그리스에서 발생한 말라리아 유행 사례는 공중보건에 적절한 투자를 하지 않았던 정부가 경제 불황을 소수자, 외국인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자양분으로 삼아 외국인 혐오를 조장하고 동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순수성에 대한 추구는 깨끗하고 질병이 없는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순수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의 코로나19 유행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중국에서 유행이 시작되고 중국인 입국 금지 요구가 점증하면서,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에 대한 혐오도 커졌다. 예컨대 중국인 동포가 많이 사는 동네 주민들은 오히려 스스로 조심하며 엄격하게 예방수칙을 지키고 있었지만, 언론은 다양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외국인 혐오를 부추겼다(☞관련 기사: ‘혐오’를 파는 신종 코로나 보도). 


마찬가지로 집단감염이 발생한 청도의 한 병원에서도 중국인 동포 간병인이 병원에 바이러스를 전파시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관련 기사: 청도 대남병원 中동포 간병인이 슈퍼 전파자?).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국 정부가 이런 혐오를 부추기고 동원하는 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출처: 한겨레

세계를 엄습한 감염병 때문에 가려져 있던 사회의 어두운 곳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규범적 차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실용적 차원에서도 혐오와 불신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앙사고수습본부의 윤태호 방역총괄반장이 매 브리핑 때마다 반복하던 말이 있다. 그 말을 따라 연대와 협력의 정신을 되새길 때다.

"특히 신종 감염병은 지역, 출신, 종교, 인종 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과 지역으로 확산되는 전지구적인 문제입니다. 이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차별과 배제 없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연대와 협력의 정신을 존중하며 다 함께 노력할 것을 당부드립니다."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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