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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저는 왜 엉망일까요

조회수 2019. 10. 29. 12: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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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그렇기 때문에 그냥 넘기고 마는 것들이 있다.
출처: 영화 〈82년생 김지영〉

전에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페이스북 보면 승혜 님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정말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요?”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본 적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들으면서 조금 놀랐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다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생각한다.


아픈 데 없고, 사지 멀쩡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제도권에 안정적으로 편입했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아이도 둘이나 있고, 그것도 아들딸 골고루 있어서 아들만 있으면 ‘딸을 낳아야지’ 딸만 있으면 ‘아들 낳아야지’ 이런 소리 듣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 건강하고, 양가 부모님 모두 건강하시고, 빚도 없으시고, 큰 간섭도 하지 않으시며, 남편은 다정하고, 나에게 잔소리라든가 싫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해야 할 일이라고는 그저 집안 살림과 아이들 돌보기 정도에 불과하고, 사고 싶은 책을 언제든 사서 읽을 수 있는 삶!


이 정도면 성공한 삶이자 행복한 삶이라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실은 그렇기 때문에 그냥 넘기고 마는 것들이 있다.



……는 순간들

출처: 영화 〈82년생 김지영〉

가령 ‘페이스북 과거의 오늘’에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는 내 말에 “그럼 애는 누가 키우고?”라고 말했던 누군가를 욕해놓은 포스팅이 뜬 것을 보더라도, 그리고 결국 그 사람 말대로 되었다는,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는 호기로운 선언이 무색하게 애들을 보기 위해 결국 퇴사한 자신을 깨닫고 쓴웃음을 짓는 순간들과,


그렇게 낳은 아이들을 붙잡고 씨름하다 폭발해 미치광이처럼 발광하고, 그런 밤이면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혐오감에 시달리면서도 다들 이러고 사는 거지, 스스로 선택해서 낳은 거니 징징대지 말고 책임져야지 하고 마음을 다독이는 순간들과,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이후로 뭐라도 해보겠다며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지만 30대 중반의 경력단절 여성, 그것도 아이 둘 때문에 칼퇴근을 해야 하는 여성을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연봉을 절반으로 깎아서 올려면 오든지 하는 양아치들을 보며, 어차피 그 돈 받아 다 시터 월급으로 나갈 거 그냥 내가 애들 보고 만다고 매번 새롭게 결심하는 순간들과,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냐고,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아이들 있을 때는 아이들 보고, 애들 없을 때는 집안일 하고, 여가를 전부 책 읽는 데만 써서 그렇다고 답하자 ‘아유, 시간이 엄청 많으신가 보네요’라는 이야기를 듣고, 네놈이 TV 보고, 야구 보고, 드라마 보고, 운동하고, 산에 다니고, 자전거 타고, 술 처마시고, 하는 시간에 오로지 책만 읽어서, 어딜 멀리 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어서 책만 읽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순간들과,


페이스북 친구였던 한 남성이 ‘브런치 가게들 보면 애들 어린이집 보내놓은 엄마들로 우글거리던데 그런 사람들은 애 어린이집 왜 보내는지 모르겠다, 그런 여자들 때문에 애꿎은 맞벌이 워킹맘들 피해 보는 거 생각하면 한 대씩 콱 때려버리고 싶다’는 포스팅을 한 것을 보고, 당신이 그 사람들을 아냐고, 그 사람들이 애 엄마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냐고, 설사 애 엄마들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같은 시간에 거기 모여 공부를 하는지 일을 하는지, 혹은 반년을 벼르다 겨우 날을 잡고 모인 옛친구 모임인지를 어떻게 아냐고, 그중 육아휴직 중인 워킹맘이 끼어 있지는 않은지, 재취업 준비를 위해 눈물 흘리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온 사람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닌지 당신이 아느냐고 한바닥 적었다가, 문득 상대방 및 그 글을 보게 될 다른 사람들까지 나를 열등감과 피해 의식에 찌들은 배부른 ‘맘충’ 중 한 명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서 결국 지워버리던 그런 순간들과,


공중화장실 벽 곳곳에 뚫린 구멍과 그것을 막은 흔적들을 보고 혹시라도 카메라가 있는 것은 아닌지 흠칫 놀라고, 곧이어 어차피 똥 싸는 모습밖에 더 찍히겠어, 오늘 나 배탈 났는데 설사하는 거나 잘 봐라 이 변태 새끼들아, 이런 생각으로 의연하게 대처하려다가도, 지구 어딘가에서 화장실에서의 내 모습이 찍힌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 영상을 나를 아는 누군가가 봤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나 나는 그게 누구인지 평생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마음 한 켠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순간들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간간이 생각나는, 그럴 때마다 상대방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보다 제대로 대응하거나 대처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자괴감과 후회를 더 많이 불러일으키는 성희롱과 성차별에 대한 기억들, 예를 들면 ‘원래 남자들끼리만 보는 건데 승혜 씨는 쿨하니까 보여줄게요’ 하며 남자 직원이 공유해줬던 메일에 온갖 대기업 포탈에서 불법 캡처한 예쁜 여직원들의 사진이 마치 정육점 고기처럼 등급이 매겨진 채 가득 채워져 있었던 그런 기억들,


같은 것들을, 그냥 넘기고 사는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살만하니까, 이만하면 행복하니까, 하는 생각으로. 그러나 지금의 내가 행복하다고 해서 저런 기억들이 없던 일들이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보다 덜 불행하다는 것이, 아직은 살만하다는 것이, 아무런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괜찮아야 하는데

출처: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았다. 소설을 그다지 재미있게 보지 않아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게 잘 보았다. 소설에는 거의 없다 싶은 서사를 두 배우를 중심으로 잘 살려냈다. 소설도 거의 다큐 수준으로 평이하지만 훨씬 더 담백한 편이고.


소설과 비교해서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악역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범죄자도 등장하지 않고, 김지영의 시부모님도 비교적 무난하게 그려진다. 김지영의 남편은 무척이나 사려 깊고 다정하다. 그럼에도 김지영의 정신세계는 서서히 무너지는데, 이것은 결국 원인이 개개인이 아닌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가해자 없이도 피해자 서사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징징대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자기변명을 하기 위한 그런 영화가 아니라. 영화는 김지영의 서사에만 집중되어 있고, 김지영의 남편이 남성으로서 겪는 차별과 고뇌는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김지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서사가 그렇듯이 말이다.


김지영 역시 의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 간간이 참 행복하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그런데, 괜찮아야 하는데 저는 왜 이렇게 엉망인 걸까요? 혹시 나만 출구를 못 찾은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 화가 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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