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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 매드니스〉 재밌죠, 30년 동안 재미있었거든요

조회수 2019. 9. 10.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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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오픈런이다. 언제든 대학로에 가자.

자존심 상하지만, 솔직히 재밌거든요

자료를 찾던 도중 재미있는 제목의 워싱턴포스트 기사를 찾았다.

  • The real mystery of ‘Shear Madness’: Who goes to see it – and why?

번역하면 무려 ‘ 〈쉬어 매드니스〉의 진짜 미스터리: 누가 그것을 보러 가는가, 그리고 왜 가는가?’다. 말하자면 이 연극을 몇십 년째 공연하는 본토에서조차 이 연극의 인기는 일종의 ‘미스터리 현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쉬어 매드니스〉. 유명한 연극이다. 인터파크에서 연극 코너를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이 연극의 존재를 알 것이다. 알아보면 우리 생각보다도 훨씬 더 국제적으로 유명한 연극이다. 일단 수식어부터 화려하다. 세계에서 가장 길게 공연하는 연극 중 하나(무려 1980년 초연!)이며 1,25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보았다. 케네디 센터에서 가장 오래 공연하는 연극 중 하나인 데다가, 연간 50만 달러 넘게 벌어다 주는 믿음직한 수입원 중 하나라고까지 한다.
케네디 센터에서 공연하는 〈쉬어 매드니스〉의 모습.
그런데 욕도 진짜 많이 먹는다. 내가 찾은 악평만 해도 이 정도는 된다.
“순수한 고문이다(sheer torture).” (제목 〈shear madness〉를 이용한 말장난)

“순수하게 바보 같다(sheer idiocy).” (이하 동문)

“백악관 잔디밭에서 열리는 파이 먹기 대회처럼 적절하긴 한데 재미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기자가 더 놀랍다…)

오죽하면 “그렇게 나쁜데 왜 문을 닫지 않았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 그래서 미국의 기자들은 직접 객석에 앉아 이 연극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쉬어 매드니스〉의 관객층은 한 무리의 관광객과 단체관람을 온 듯한 10대 청소년, 조카를 데려온 중년 부부, 그리고 막 결혼을 약속한 사랑스러운 커플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연극 한 편을 보며 인생과 철학에 대해서 기나긴 고민을 하고 싶거나 정점에 다다른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 보는 연극은 아니라는 것이다. 두 시간을 즐겁게 웃으며 보내고 싶고, 함께 간 사람들과 공유할 만한 추억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보는 연극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1막, 일부러 성글게 만든 난장판 위로 관객을 불러들이다

5월 15일 대학로의 극장 ‘콘텐츠박스’에서 본 관객층은 약 ½ 정도가 커플이었다. 나머지는 친구들과 함께 온 사람들이다. 이 중 몇몇은 이미 이 연극을 본 경험이 있는 듯했다. 혼자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몇 명 없어 보였다.
현재 대학로 ‘콘텐츠박스’에서 공연 중인 해당 공연의 포스터.

극의 정식 시작은 오후 5시부터지만, 10분 전부터 배우가 등장한다. 그들은 아직 암전되지 않은 상태의 무대에 올라 과장된 몸짓으로 연기를 시작한다. 미용실 ‘〈쉬어 매드니스〉’의 남성 원장은 손님에게 추파를 부리면서 엉망으로 머리를 감기고, 여성 미용사는 손톱을 다듬는다. 그 모습을 보며 관객들이 웃기 시작한다. 그렇게 극은 관객석의 긴장을 말랑말랑하게 풀어놓은 상태로 관객석을 비추던 주광색 조명을 끈다. 1막이 시작된다.


이제 시작되는 건 슬랩스틱 개그와 트렌드를 접목한 개그와 다소 ‘PC 하지 못한’ 개그를 뒤섞은 어마어마한 유머의 파도다. “송혜교 걔는 도대체 얼마나 복이 많은 거야? 집에 가면 송중기, 일하러 가면 박보검!”처럼 현재 대한민국 시류를 반영한 대사가 나오는가 하면, 미용사가 쉐이빙 크림을 얼굴에 집어 던지고 문을 쾅 닫고 얼굴을 베는 몸개그가 이어지는 식이다. 거의 소싯적 개그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류의 슬랩스틱 개그다.


주인공들 또한 거의 이런 장르에서 백 번은 본 듯한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들이다.


  • 게이 남성 미용사
  • 백치미를 자랑하는 핀업걸 스타일의 여성 미용사
  • 무뚝뚝한 남성 골동품 상인
  • 돈은 많지만 무식하고 이기적인 상류층 사모님
설명을 구태여 읽지 않아도 어떤 캐릭터들인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얼핏 저 문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행동하는 것 같아 보인다. 최근의 정치적 공정함을 추구하는 분위기에는 다소 불편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극이 전개되면서, 그들의 이면이 드러난다. 그들은 무대 위에 혼자 있을 때, 혹은 감정이 격해졌을 때 문득 자신의 섬뜩한 내면을 드러내고, 단서를 한두 개씩 던진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의도적으로 불친절하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이 왜 지금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지, 왜 가위를 숨기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 구멍을 파헤치는 사람은 관객일 것이기 때문이다.


1막의 막바지, 관객석을 비추던 조명이 다시 켜진다. 등장인물들은 갑작스레 관객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묻는다.

자, 우리 중에서 누가 범인일까요?



2막, 대중이 주인공이고 대중이 작가인 이야기

관객은 주인공이다. 2막부터는 관객이 말하기 때문이다. 약 20분간의 추리 시간 동안, 관객은 손을 들어 자신의 추리를 극 중 배우들에게 질문할 수 있다. 그러면 배우들은 대답해야만 한다.


또한 관객이 작가다. 관객이 직접 범인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리 시간 이후의 스토리는 관객이 고른 범인이 주인공이 된 시나리오로 진행된다.


이 과정을 보다 보면, 이 연극이 처음 등장했던 1980년대에 큰 주목을 받은 이유를 금세 알 것 같다. ‘관객 참여형 연극’이 드물었던 시기일 테니 얼마나 신선했을까. 연극을 포함한 순수 예술에서 대중은 늘 유리된 존재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대중들도 안다.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연극이 등장했으니, 그 존재가 무척 신선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2019년 대학로 연극판은 다르다. 이제는 발에 차이는 게 ‘관객 참여형 연극’이다. 오픈런으로 상연되는 이 연극들은 언제나 관객을 찾는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쉬어 매드니스〉’가 대학로를 찾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연극은 만들어진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 날카로운 이빨이 살아 있다. 등장인물들은 결코 낡지 않는다. 이들은 2019년 현재에도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스테레오 타입이고, 이 말은 곧 이들이 겪는 혐오 또한 현재의 이야기라는 뜻이 된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도 게이 미용사는 비웃음의 대상이었고, 2019년의 한국 또한 그렇다. 짧은 옷을 입고 남자와 잘 어울리며, 뒷소문이 무성한 젊은 여자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살인 사건’이라는 극단적인 장치는 극을 풀어가는 중요한 스토리기도 하지만, 이들이 자신들을 향한 사람들의 편견에 분노를 터뜨릴 수 있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들의 불만은 결코 낡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보다 직접적이다. 추리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추리는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소재 중 하나다. 셜록 홈스는 20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여전히 재미있는 추리 소설이다. 〈쉬어 매드니스〉는 심지어 틀린 추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추리 작가로서의 관객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객이 선택한 추리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 특징은 결정적인 장점으로 이어진다. 결말이 4개라는 점 말이다. 오늘은 골동품상이 범인인 내용을 보았지만, 미용사가 범인인 내용도 궁금해진다. 그러면 관객은 한 번 더 〈쉬어 매드니스〉를 볼 수밖에 없다. 반복 관람은 성공적인 작품의 또 다른 특징 아니었나.


이것이 1980년에 혹평을 받고 데뷔한 초창기의 〈쉬어 매드니스〉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일 테다. 케네디 센터의 커플 관객들도, 한국 대학로를 방문하는 관객들도 다시 방문하게 만드는 힘. 이 연극을 보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한 건 아니어도, 어디 가서 재미있게 보았다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공연 정보

공연 기간


걱정하지 말자. 오픈런이다. 언제부터 공연했냐면 2015년부터다. 트와이스가 데뷔하기 전부터 이 연극은 공연했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까먹었다 한 6개월 뒤쯤 기억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대학로에 가자. 그때도 〈쉬어 매드니스〉는 공연할 것이다.


극장 컨디션


혜화역 콘텐츠박스. 극장은 쾌적한 편이다. 찾아가는 길도 무척 쾌적하다. 마로니에 공원을 거쳐 극장으로 가는 길은 대학로의 좋은 부분을 압축해 놓은 듯 밝고 즐겁다.

귀여운 포토 스팟도 마련되어 있다.

다만 극장 내 단차가 낮은 편이다. 앞에 앉은키가 큰 관객이 앉아 있다면 꼼짝없이 무대의 일부를 날려야 하는 구조다. 그렇다고 1~2열에 앉는 것도 추천하지 않는 게, 미용실이 배경이니만큼 큰 의자나 세면대 등의 오브제로 일부 시야 제한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5~6열의 통로 좌석을 추천.


추천 대상


연극에 대해서 전혀 고려해본 적 없는 초심자도 괜찮고, 가끔 연극을 보는 사람도 괜찮다. 하지만 예술 작품은 무릇 깊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작품을 고려하는 게 나을 것이다. 평론가들의 악평은 괜히 받은 게 아니다.


알고 보면 좋은 팁


극본 특성상 4명의 주인공에 대해 정보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들 하는 생각 똑같다 보니, 4명의 주인공 중 2명이 90% 확률로 지목당한다(내가 본 날도 그 2명 중 1명의 엔딩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남은 2명 중 1명의 엔딩이 무척 슬프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마니아들이 아예 단체 관람을 진행해서 그 엔딩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상황이라고. 보고 나오면 어떤 인물을 말하는 것인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궁금하다면 다소 발품을 팔더라도 SNS 및 커뮤니티를 둘러보는 편이 좋겠다.


원문: 도수안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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