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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비행에 대처하는 가난한 여행자의 자세

조회수 2019. 7. 8. 16: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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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귀찮음과 돈을 바꾼 결과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만으로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마일리지가 차곡차곡 살집을 불려 가는 만큼 나이도 먹고, 경험치도 쌓여갔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당연히 체력은 떨어졌고 흥미도 사라졌다.
또 가는구나…(핼쑥)

좁디좁은 이코노미 좌석에 반 결박 당한 채 견뎌야만 하는 그 시간은 그저 낯선 곳으로 가기 위한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일 뿐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시간의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고민했다. 그렇게 장거리 비행을 앞두고 행하는 가난한 여행자의 의식이 생겨났다.



1. 출발 며칠 전: 기내식을 신청한다

출발 며칠 전, 짐 싸다가 생각이 나면 기내식을 미리 신청해 둔다. 항공사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늦어도 출발 24시간 전(공동운항일 경우 48시간 전)까지는 마치는 게 좋다. 보통은 부담스럽지 않은 과일식 또는 채식을 택하는 편이다. 

기름지고 진한 맛의 기내식으로 배를 채우면 비행 내내 더부룩할 수밖에 없다. 그런 배를 안고 가느니 적당한 공복을 택한다. 이 선택은 기내식보다 40만 8,000배 맛있는 현지식을 마음껏 즐기기 위한 사전 작전이다.


2. 출발 전날: 잠은 모자란 듯 잔다

비행시간이 길면 길수록 출발 전날은 평소보다 훨씬 적게 잔다(보통은 거의 안 잔다). 솔직히 비행기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지 않다. 몇 개 없는 선택지 중 내 최선의 선택은 ‘잠’이다. 시차 적응을 위해서는 이보다 좋은 선택이 없다.


또 집에서 출발해 낯선 곳의 숙소까지 가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이 엄청난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 에너지를 비축할 필요가 있다. 자칫 잠이 몰려올 기미가 보이면 아예 미리 공항으로 출발한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자칫 비행기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기 때문이다.

출처: 〈대학일기〉, 네이버웹툰
절대 10분만 잘 수 없다



3. 출발 당일: 준비물을 잘 챙긴다

공항 패션 따위 사치인 일반 여행자에게 후드 점퍼는 만능 아이템이다. 온도 변화가 심한 기내에서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다. 쉽게 추위를 타는 내게 기내 담요가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꼼꼼하게 막아준다. 게다가 장거리 비행으로 떡 진 머리를 숨기기에도 더없이 좋다.


에코백에 최소한의 짐만 남기고 모두 수화물로 붙인다. 에코백 안에는 보통 여권, 현금을 포함한 지갑, 항공권, 이어폰, 보조 배터리, 충전기, 안경, 필기구, 작은 수첩, 책 한 권, 칫솔 & 치약, 립밤 정도가 들어간다. 짐칸에 올릴 필요도 없는 무게의 에코백은 손잡이를 질끈 묶어 앞 좌석 아래에 놓고 발 받침대로 사용한다.



4. 비행기 탑승 직전: 세수를 한다

탑승 콜 사인이 떨어지기 30분 전쯤에는 세수를 한다. 아무래도 좁은 기내 화장실에서 몸을 구겨가며 씻는 것보다는 100배 나은 선택이다.


렌즈를 빼고 꼼꼼히 씻고 수분 크림을 듬뿍 바르고 일회용 마스크를 장착한다. 간혹 기내에서도 자외선 차단을 해야 한다고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마스크로 커버를 한다. 아무리 좋은 자외선 차단제라도 어차피 화학 성분이고 시간이 지나면 덧발라 줘야 한다. 차라리 마스크로 물리적 차단을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다수의 오지 생활 경험으로 깨달았다. 거기에 안경까지 써주면 못생김이 200배쯤 상승한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일명 쪼리라 불리는 플립플롭을 장착한다. 발이 답답하면 쉽게 피로해지는 나의 장거리 비행 필수템이다. 이 정도면 근데 뭐 어떠랴? 무수한 대포의 기다림 따위 없는 나는 자연인이다.

출처: MBN
TV 프로그램과 달리 이승윤도 없다

5. 비행기 탑승 후: 숙면에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마친다

좌석에 앉으면 목에는 목 베개를 끼우고, 개인 모니터는 라디오 채널! 그중에서도 클래식 채널을 틀어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마지막으로 온열 아이 마스크를 눈에 덮어 주면 장거리 비행을 위한 대장정이 마무리된다. 이코노미를 탔으니 척추의 고통이야 감수해야 할 몫이고 이 정도 준비면 숙면을 취할 모든 노력을 다한 것이다.


잠도 모자랐겠다 약간의 긴장 속에서 온갖 수속과 절차들을 밟고 나면 녹초가 되기에 십상이다. 이쯤 되면 내 몸은 이미 숙면으로 가는 특급열차에 오른 셈이다. 잠에 취했지만 중간중간 뻐근한 목과 척추를 한두 번 풀어주고 나면 나는 금세 지구 반대편의 목적지에 가까워져 있다. 이제 지긋지긋했던 비행기가 나를 토해 내면 낯선 땅에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면 된다.



마치며

누군가에게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복잡하고 귀찮은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난 없는 돈과 시간을 쪼개서 떠나는 가난한 여행자다. 여행을 허투루 허비할 수가 없다. 이것은 귀찮음과 돈을 바꾼 결과다.


잠시의 귀찮음을 감수하고 몸을 좀 쓰면 비용을 아낄 수 있다. 그 아낀 비용으로 현지의 호스텔 대신 비즈니스호텔에서 잘 수 있다. 맥주 한 번이라도 더 마시고 현지식을 한 번 더 먹을 수 있다. 그 새로운 경험을 얻기 위해 기꺼이 내가 선택한 일이다. 이 복잡하고 지루한 과정들까지 나는 즐겁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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