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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도쿄에서 미용사로 일한다

조회수 2019. 6. 4. 15: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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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있잖아, 내 동생은 사실.."

생일 기념으로 일본에 여행 왔다가 잠시 누나 집에 들렀다. 우리 누나는 도쿄에서 미용사로 일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일본으로 건너가 미용 기술을 배운 건 20년쯤 전이다. 일문학을 전공한 누나가 미용사가 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오사카에서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우리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나는 여봐란듯이 자리를 잡았고 일본인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 지금은 본인 명의의 건물을 소유한 미용실 사장님이다. 누나는 결혼하기 직전에야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우리 가족은 놀라서 일본으로 날아갔고 나는 누나의 남편, 그러니까 매형을 그날 처음 만날 수 있었다. 매형은 척 보기에도 인상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과정이었다.

​누나가 이케부쿠로에 있는 미용실에 취직하고 2년이 막 지나던 무렵의 일이다. 늘 누나를 지명하는 손님 중에 가스미라는 여자가 있었다. 시시한 잡담을 나누는 정도였던 누나와 가스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취향이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됐고 언제부턴가는 같이 옷을 사러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갈 만큼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날 두 사람은 전날 방송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어떤 남자가 짝사랑하는 여자한테 고백하는 콘셉트의 프로였다. 원체 수줍음이 많은 남자가 TV에서 중계해주는 복싱 시합의 결과(즉 일본인 도전자가 미국인 챔피언을 이기면)에 따라 고백할지 말지 정한다는 것이 그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내용이었다.


​얘기 중에 누나는 “왜 자기 일을 남한테 맡기느냐, 복싱 시합에서 일본 선수가 지면 고백을 포기한다는 거냐, 정말 바보 같은 남자다, 만약 그런 남자가 자기한테 고백을 한다면 보나마나 싫을 것 같다”는 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약간 언성을 높였던 모양이다.


누나는 어릴 때부터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치고받는 스포츠를 한심해했다. 때문에 그런 스포츠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려는 남자의 처사가 상당히 못마땅했으리라. 수다를 떠는 동안 가스미가 문득 누나에게 물어보더란다. 혹시 남자친구 있냐고. 없으면 소개해주겠다고.


​당시 누나는 남자친구가 없었다. 하지만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빠서 누굴 만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그랬더니 “통화만이라도 좋으니까 연락하고 지내면 어때, 실은 내 남동생이 반년 전쯤에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로 영 기운이 없어 보여서 말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 밤, 누나가 목욕을 마치고 나와 텔레비전을 보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라 주저하다가 받았는데 대뜸 “저기, 저는 가스미의 동생입니다.” 하고 남자 목소리가 들리더란다. 누나는 가스미한테 분명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갑자기 낯선 사람과 길게 통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눈앞에 벽을 타고 후다닥 기어오르는 커다랗고 검은 벌레가 나타난 거다. 엄청난 크기의 바퀴벌레였다. 누나는 “꺅” 하고 새된 비명을 지르며 자기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바퀴벌레는 재빨리 대각선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딱 멈춰서 주변 상황을 모두 관찰하는 듯한 섬뜩한 자세를 취했다.


누나가 휴대전화를 황급히 주워 귀에 대자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가, 무슨 일이냐, 괜찮냐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바퀴벌레가 나왔다, 엄청나게 커다란 놈이라고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얘기를 들은 남자가 반쯤 웃으며 ‘그럼 창문을 열고 나가달라고 부탁하라’며 농담 비슷한 말을 했다. 바퀴벌레를 계기로 그날 밤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전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내 동생이 전화했다면서?

가스미가 신이 난 목소리로 누나의 미용실을 찾아와 이야기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그 두 달 사이에 누나는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가스미의 동생과 정기적으로 통화를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누나가 먼저 전화한 적은 한 번도 없고 매번 가스미의 동생이 먼저 걸었다. 아무튼 그날은 가스미의 동생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가스미가 불현듯 이렇게 묻더란다.

내 동생이랑 갑자기 연락이 끊기거나 하진 않아?

​갑자기 왜 연락이 끊긴다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러고 보니 누나는 여지껏 가스미의 동생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러니까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저 막연하게 사무직이겠거니 하고 짐작했을 뿐이다. 직업 얘기가 나오면 가스미의 동생은 늘, 자신은 항상 지루하고 단순한 작업만 해서 일 얘기는 재미없다는 식으로 슬쩍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 동생은 사무직 종사자는 아닌데, 아무튼 조금 특수한 직업이라 이제 한동안은 전화가 안 올지도 몰라.

​누나는, 예전에 글을 쓰는 사람과 사귄 적이 있는데 마감이 다가오면 연락이 안 되곤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가스미의 동생이 혹시 글 쓰는 사람인가 하고 짐작했단다. “아무튼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연락할 테니까 버리지는 마”라며 가스미는 진지하게 충고했다. 누나는 ‘실제로 마감이 다가와도 연락을 뚝 끊는 일은 없겠지’ 하고 넘어갔다.


정말 가스미의 말대로 그로부터 한동안 가스미의 동생은 전화를 하지 않았다. 무려 한 달 하고 보름 동안 전화가 오지 않았던 거다. ​누나는 먼저 전화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몇 번인가 전화해 볼까 싶었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라면 불쾌해 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연락이 끊긴 지 한 달 반이 지났을 무렵, 다시 연락이 없으면 이대로 흐지부지 끝나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누나는 휴대전화 화면에 뜬 그의 전화번호를 보고 화들짝 놀라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면서도 설렘을 느꼈지만 그는 그동안 바빴던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전처럼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조용히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달 반의 공백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해졌다고 누나는 말했다. 그 뒤로 몇 번인가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연락이 오지 않는 기간이 있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가스미의 동생은 말했다.

이번 일은 죽을힘을 다해서 해야 할 것 같아. 그래서 한동안 통화를 못할 거야.

​가스미의 동생과 마지막 통화를 한 다음날 저녁, 누나는 가스미의 집에 놀러갔고 두 사람은 텔레비전을 보며 가스미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문득 가스미가 이런 말을 하더란다. 복싱 시합 결과에 따라 고백할지 안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는 남자가 나온 프로그램을 기억하느냐고.

자기 동생이 그 비슷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이 열리는데, 그 시합에서 도전자가 이기면 자기 동생이 고백한다고 했다고. 그 얘기를 들은 누나는 쑥스럽기도 했지만 화도 났다. 왜 그런 결정을 남한테 맡기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을 함께 시청했다. 복싱 시합 결과로 고백을 하겠다는 가스미 동생의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시합이 시작되자 누나의 눈이 텔레비전에 고정되었다. 복싱 문외한인 누나는 난생 처음 자기도 모르게 “날려 버려”라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엄청 흥분해서 도전자를 응원했다고 한다.


물론 기적이 일어났다. 도전자가 이긴 거다. 후련한 기분으로 가스미와 얼싸안고 승리를 만끽한 누나가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쳐다보고 있을 때 가스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기 있잖아, 내 동생 직업은 권투선수야. 그리고 지금 막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됐어.

그리하여 나는 생일을 누나네 집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인 매형과 함께 보냈다. 선물은 매형과 친한 작가 이사카 코타로 씨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친필 사인본을 받았다.


원문: 북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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