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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프리랜서] ③ 세상에서 가장 소심한 퇴사 준비

조회수 2019. 4. 30.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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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퇴근

회사를 떠나 프리랜서가 되기로 마음먹고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일하게 될까 상상하며 정보를 뒤지는 과정은 잠깐의 마취제 같은 즐거움을 주었다.


그사이에 내가 속한 팀의 환경이 점점 더 팍팍해지는 것도, 몇 달 새 세 명의 직원이 나보다 먼저 퇴사한 것도 내 결정이 옳음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근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막상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코앞에서 마주한 ‘퇴사’의 위압감은 멀리서 지켜보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인턴이나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적은 있어도 몇 년이나 다니던 진짜 직장을 때려 치고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회사에 남은 미련이 없다 해도, 지금껏 쌓은 경력이 아깝다는 마음이나 월급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까지 완전히 상쇄된 것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불안감은 희한하게도 모순적인 조급증이 되어 찾아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회사를 떠나지 않으면 어느 순간(아마도 다가올 월급일이나 카드 대금 결제일에) 결심이 약해져 발목이 잡힐 것만 같았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당장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절차에 맞춰 입사한 이상 퇴사하는 순간까지는 절차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달이 나가는 월세며 아직 만기를 채우지 못한 적금을 생각하면 무작정 기분대로 행동하는 것도 분명 현명한 대책은 아니었다.


나는 사직서를 던지고 내일부터 출근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3개월 안에 다가오는 적금 만기일을 잠정적 퇴사일로 점찍었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면, 만기까지 월급으로 적금을 붓다가 이자까지 야무지게 타서 시원하게 그만두는 편이 퇴사의 쾌감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같은 길을 먼저 간 선배들의 말을 들어보니 퇴사 통보는 퇴사 예정일보다 한 달 전에만 하면 되는 것 같았다. 굳이 그보다 앞서 퇴사 계획을 알릴 필요 없다는 조언은 매우 타당하게 들렸고, 나는 그렇게 두 달 동안 비밀을 품은 채 겉으로는 태연하게 회사생활을 계속했다.


물론 달라진 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이미 곤죽 상태인 팀원들에게 추가 업무를 얹어주면서 “혹시 힘들어? 힘들면 꼭 솔직히 말해야 해.”라고 덧붙이던 상사에게 처음으로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가 아니라 “힘들 것 같습니다. 이미 다른 일이 너무 많아요.” 라고 대답해보았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용기 내 던져본 대답은 치켜 올라간 눈썹과 까딱이는 어깨 정도의 반응만 남기고 허공으로 빨려 들어간 듯 허무하게 흩어졌다. 덕분에 나는 새삼 내 결심이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새삼 내 결심이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기왕 3개월을 더 버티기로 한 거, 남은 기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퇴사 후의 생활에 아주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보태야 한다는 오기도 생겼다. 나는 직장인으로서 보낸 마지막 3개월 동안 ‘지름’을 최대한 자제하고 악착같이 저축을 했다.


지금 구입하는 구두 한 켤레, 원피스 한 벌 값이 언젠가는 절박한 일주일 치 최저 생계비가 될지 몰랐다. 회사 생활이 미치도록 답답할 때마다 자기 위안 삼아 접속하던 인터넷 쇼핑몰도 끊고, 은근히 생활비를 많이 잡아먹는 외식 약속도 최대한 자제했다.


하지만 이러한 절약은 퇴사까지 남은 기간 동안 내가 했던 소심하디 소심한 다른 준비들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한 축에 속했다.


나는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가지고 있던 신용카드의 유효기한을 최대한 연장했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은행을 찾아가 마이너스 통장도 최대한도로 뚫었다. 더럽고 치사해도 회사가 보장하는 월급과 4대 보험을 잃는 순간 우리나라 금융권이 나를 헌신짝처럼 버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회사원이라서 누릴 수 있던 금융 혜택의 기간을 최대한 연장해둔 것은 결과적으로 엄청나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4대 보험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은행과 카드 회사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정말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업무 중에는 다른 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전에 없이 열심히 관찰했다. 번역가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예전 같았으면 담당자에게 휙 전달하고 말았을 번역 서류를 한 번 더 꼼꼼하게 살펴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리부나 총무부 등의 지원부서 업무를 최대한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는 두 부서에 전화를 하거나 메일을 쓰는 것만으로 해결되었던 여러 가지 일들(연말정산, 세금계산, 비용처리, 물품주문, 하다못해 프린터 토너 교체까지)을 이제부터는 스스로 처리해야 할 테니까.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타박 타박 흘러갔고, 어느새 달력에 조심스레 쳐놓은 빨간 동그라미로부터 딱 한 달을 앞둔 날이 찾아왔다. 그날 아침, 나는 수능 날에도 먹지 않았던 우황청심환을 우물거리며 현관문을 나섰다.

퇴사를 통보하던 날은 막상 퇴사를 하던 날보다 더 떨렸다. 말의 힘이라는 게 참으로 대단해서, 그 짧은 단어 하나를 툭 내뱉은 순간 내 안에만 꽁꽁 간직하고 있던 결심이 갑자기 공식적인 절차의 시작점으로 변한다는 게 무서웠다.


나는 출근을 한 뒤에도 한참 동안 슬슬 눈치만 보며 입을 떼지 못했다. 내가 얘기를 꺼내려고만 하면 팀장이 갑자기 통화를 시작하거나 회의에 들어가는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고, 지금껏 애써 세운 계획을 어그러뜨리지 않으려면 오늘 안에는 반드시 통보를 해야 했다. 나는 달달 떨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팀장의 자리로 찾아갔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아니기만 해 봐’라는 힐난 섞인 눈초리를 애써 모른척하며 지금 당장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운을 뗐다.


팀장과 회의실에 들어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퇴사 결심과 날짜를 알린 순간부터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듯 정신없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본디 회사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일사불란한 것인지, 아니면 최근 우리 팀의 연이은 퇴사 사태로 이골이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헌 사람 한 명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새 사람을 꽂아 넣는 과정은 요철 하나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나는 팀장과 부서장을 시작으로 온갖 얼굴들을 대면하며 며칠에 한 번 간격으로 면담을 했다. 더러는 만류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내가 대단히 특별한 직원이었던 것도, 내 자리를 채울 다른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 만큼 대개는 형식적인 확인 절차의 선을 넘지 않았다.


한 달 사이에 내가 담당한 일들을 대충 마무리하고, 인수인계 리스트를 만들고, 퇴근할 때면 사무실 책상에 있던 개인적인 물건들을 하나씩 집으로 가져왔다.


퇴사 과정은 전반적으로 로망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한 장씩 품고 다닌다던 사직서도, 알고 보니 펜으로 눌러 쓰는 종이 서류가 아니라 정 없는 전자결재로 대체된 지 오래였다.


그것도 ‘사직서’가 아니라 ‘사직 신청서’인지 ‘퇴직 신청서’인지 뭔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의 양식으로. 내가 내 발로 나가겠다는데 도대체 누구한테 신청을 하라는 거야? 입 속으로 볼멘소리를 하며 적어낸 이놈의 신청서도 그나마 몇 번이나 반려를 당했다.

험난한 퇴사의 과정

이미 절차를 모두 마치고 형식적으로 올린 결재가 튕겨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사직 신청을 다시 올리라는 윗선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너무 당황해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가 적어낸 두 단어짜리 퇴사 사유(‘팀 부적응’)가 나를 그 팀으로 발령 내거나 관리한 누군가의 업무능력 평가에 불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으니, 이왕이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만한 개인적 사유(대학원 진학, 유학, 건강 악화 등)를 적어서 결재를 다시 올려달라고 했다.


그 '불이익을 받을 대상'에 내게 전화를 건 사람 본인이 포함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나는 목전까지 치민 한 보따리의 말대꾸를 꾹꾹 누르며 높으신 분의 요구대로 회사에 남을 누구에게도 피해가 되지 않을, 보다 개인적인 사유를 적어서 재결재를 올렸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이익이 아닌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소모된 나는 2015년 어느 초여름, 최후의 퇴근을 했다.


원문: 서메리의 브런치


서메리,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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