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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지 말아야 할 남자

조회수 2019. 4. 15. 1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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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뒤(?)로 마시는 왕세자?

2004년 6월의 일입니다. 영국에서 항암치료 전문가 200명이 참석한 콘퍼런스가 열렸었는데, 거기서 한 연사가 괴이한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현대의학에서 시행하는 항암치료 대신 ‘커피 관장’을 하면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당 시술은 거슨 요법(Gerson Therapy)이라는 민간요법의 일종으로, 항문을 통해 커피를 장에 주입하면 몸에 있는 독소가 빠져나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황당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건의료계의 항암치료 전문가 수백 명이 모인 학회에서 그런 주장을 당당하게 내뱉은 이가 있던 겁니다. 바로 찰스 왕세자죠.



커피를 뒤로 마시는 왕세자


찰스 윈저(Charles Windsor). 65년이 넘도록 왕세자 자리에만 머물러 ‘영국의 영원한 왕세자’라는 짓궂은 별명까지 붙은 인물이지만, 아직도 그의 왕위 계승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는 90살이 넘었는데도 아직 뛰어난 건강을 유지 중이고, 왕세자 본인의 나이도 70을 넘긴 상태이니 자칫하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죠.


국내에서는 이런 불행 아닌 불행만 주로 알려지다 보니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은데, 보건의료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절대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위험한 남자입니다.

찰스 왕세자

앞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 찰스 왕세자의 민간요법에 대한 사랑은 보통을 넘어섰습니다. 민간요법, 본인들의 좀 더 고상한 표현으로는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을 신봉하기 시작한 것이 수십 년이 넘어 평소에도 그런 괴이한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 여러 차례였습니다.


물론 그런 민간요법을 믿는 것이 범죄행위는 아닙니다. 본인이 본인의 몸에다가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처벌할 수는 없죠. 문제는 그가 민간요법을 홍보하기 위해 그의 사회적 지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이 의료계 컨퍼런스에서 저런 황당한 주장을 내놨다면, 아마 참석자의 다수가 즉시 야유를 보내거나 심한 경우에는 주최 측에 의해 컨퍼런스 홀 밖으로 쫓겨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영국에서 그런 발언을 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입헌 군주국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왕실에 대한 예우가 당연시되고, 그런 왕실에서도 계승 서열 1위에 있는 영국의 왕세자이다 보니 참석자들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공격적인 언행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참석자들은 불편한 침묵으로 소극적 항의의 의사를 내비쳤고, 공식적인 비판은 그로부터 한 달 뒤에야 나왔습니다. 영국 최고의 암 권위자 중 하나인 마이클 바움 교수가 무척이나 정중한 어투로 「영국의학저널」에 이런 글을 실었죠.


왕세자님의 권위를 이용해 난치병 환자들에게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을 사용하길 권할 때는, 본인의 권위가 의학적 지식수준이 아니라 본인의 혈통에서 기인한 것임을 인지하고 좀 더 조심히 사용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찰스 왕세자는 그의 권위를 민간요법 확대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6년에는 아예 세계보건기구(WHO) 총회에 참석해 ‘대체의학’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당뇨병이나 고혈압도 모두 대체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내놨습니다.


2007년에는 그가 사랑하는 민간요법들을 영국의 전 국민 무상의료 서비스인 국가보건서비스(NHS)에 포함시키기 위해 그의 영향력을 부적절하게 행사해서 조작된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죠. 권위를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모범적인 예시인 셈입니다.

커피를 이용해서 관장하는 기구

재밌는 건 찰스 왕세자의 ‘보고서 조작 지시’가 폭로된 것이 그의 민간요법 사랑이 가져온 뜻밖의 결과란 것입니다. 그는 1993년에 ‘통합의료재단(Foundation for Integrated Health)’을 설립해서 ‘대체의학’과 ‘보완의학’에 대한 효과와 안전성을 검증(이라기보다는 홍보)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저명한 독일 의학자이자 대체의학 연구자인 ‘에드짜르트 에른스트’를 영국에 초빙했거든요. 그렇지만 그는 왕세자의 뜻에 따라 비윤리적인 연구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엄밀하게 대체의학들을 검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판자로 돌아서자 뭇매를 맞은 전직 대체의학 시술자


에른스트 교수는 원래 대체의학 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을 정도로 대체의학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동종요법(Homeopathy)이라는 기묘한 대체의학이 있는데, 그는 실제로 그런 치료법을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에서 일했었죠.


동종요법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떤 물질이든 극도로 희석하면, 그 물질의 순수한 기운(?)만이 남아서 몸에 좋은 영향을 주면서도 부작용이 없는 만능 치료제가 된다는 것이죠. 이걸 동종요법사들은 ‘물의 기억’이라고 하는데, 희석 비율을 표시하는 고유의 단위까지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양파를 C30으로 강화(potentiation)시킨 치료액은 원래의 양파 액을 100분의 1로 희석시키는 작업을 30번 반복한 것입니다.


양파 액을 10^30배로 희석하면 당연히 그 안에 양파 성분은 존재하지 않고, 사실상 맹물에 가깝지만 동종요법사들은 이걸 치료액으로 처방합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랍스터 칩’에 들어있는 랍스터 양은 양심적인 수준이죠.

문제는 이런 사이비 요법이 실제로 치료 효과(?)를 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플라시보(placebo) 현상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질병에 주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시보 효과란 ‘상태가 호전될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실제로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는 인지적인 착각을 말합니다. 예컨대 에른스트 교수의 자서전 『이상한 나라의 의학자』에는 그가 동종요법을 시행하는 병원에서 직접 경험했던 한 가지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에드짜르트 에른스트, 『이상한 나라의 의학자』
한 번은 우리가 병동 회진을 돌면서 지나가는 중에 한 여성 환자가 급성 천식 발작을 일으켰다. 내가 본 가장 심각한 천식이었다.

단 몇 분 만에 그녀는 우리 눈앞에서 질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 내 상사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태도로 환자에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바로 주사를 놓겠습니다. 분명히 효과가 바로 있을 거예요. 1분 이내에 상태가 좋아지실 겁니다. "라고 말했다. (…)

상사는 간호사에게 식염수 주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그것이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염수 주사는 완전한 플라시보 요법이기 때문이다. (…)

식염수 주사를 놓고 몇 초 후에 그 환자는 정상적인 호흡을 시작했고 안색도 보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편안해졌다.

에드짜르트 에른스트 저, 『이상한 나라의 의학자』

아무런 약이 들어있지 않은 식염수를 주사하는 것도 이런 강력한 플라시보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에른스트 교수는 실제로 임상에서 일하는 의사로서 저런 것들을 접했고, 그는 이런 치료법이 효과가 있음을 의학적으로 입증하고 싶어 영국 엑시터 대학의 대체의학 연구자 자리에 지원하여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커피로 관장하면 암이 낫는다는 것이 거짓말임을 알 듯, 그가 연구한 대부분의 대체의학 치료법들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대체의학의 유효성에 대한 근거를 생산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막상 연구 성과가 쌓일수록 모래성 같은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에드짜르트 에른스트 교수

그 결과 에른스트 교수는 대체의학계의 공공의 적이 됐습니다. 찰스 왕세자의 연구 보고서 조작 지시도 그로 인해서 들통이 났고, 그간 효과가 있다며 홍보를 하던 다양한 대체의학들이 그의 엄밀한 조사를 통해 아무런 치료 효과가 없음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는 왕세자의 분노를 불렀고, 그는 결국 그가 몸을 담고 있던 엑시터 대학에서 조기에 은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대체의학에 비판적이지만, 정확히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지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책을 하나 냈습니다.



대체의학 연구에 헌신한 의사의 간청


의학자가 쓴 대체의학에 대한 글이라 딱딱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분은 글에서 꽤나 유머를 잘 구사하는 분입니다.


책의 원제는 입니다. 단순히 번역하면 ‘대체의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라는 평범한 의미인 것 같지만, 이걸 약어로 줄이면 ‘SCAM’이 됩니다.


영어로 ‘사기’라는 뜻이죠. 그래서 최근 출판된 번역서는 『대체의학이라 불리는 사기』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습니다.

이 책은 대체의학이 무엇인지, 대체의학 연구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설명 같은 학술적인 영역의 지식은 물론이고 실제로 그가 대체의학 신봉자들에게 공격받으며 배운 그들의 수법까지도 ‘사기꾼이 되는 방법’이라며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죠.

1. SCAM 강의를 할 때는 높은 비용을 요구하라. 그러면 주최자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고, 당신의 높은 수준이 강조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당신의 통장이 건강해진단 것이다.

4. 15분 늦게 도착하라! 이러면 주최 측의 흥분과 청중의 수용성을 고조시킬 수 있다.

10. 주최 측이 당신의 강의에 대해 시간제한을 뒀을 것이다. 그걸 무시하라! 그런 따분한 제약에 압박을 받는 건 아마추어들뿐이다.

11. 강의가 끝난 후 질문 시간은 어떤 발표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당신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도록 이미 앞에서 조치를 해뒀다. 따라서 질문 시간은 취소되거나, 있더라도 아주 짧을 것이다.

에드짜르트 에른스트, 『대체의학이라 불리는 사기』

별로 막 딱딱하진 않겠죠? 이런 식의 좀 더 학술적인 내용에 더 관심이 많다면 『대체의학이라 불리는 사기』를 추천해 드리고, 좀 더 말랑말랑하게 부드러운 내용으로 관련 내용을 배우길 원하신다면 역시나 국내에서 번역 출판된 에른스트 교수의 자서전 『이상한 나라의 의학자』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보건의료 계열 전공자에게도 권하고 싶을 정도로 유익한 내용이 많으니, 대체의학에 관심이 많으신 분은 일독을 권합니다.


원문: Coldtongue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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