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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대준다고 예술가를 가둘 수는 없지"

조회수 2019. 3. 8. 13: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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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예술이 결합해 이뤄낸 환상적인 열매

르네상스라는 문명사적 전환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탄생했다. 우리는 르네상스라고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들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역사의 미술관』 『지식의 미술관』 등 미술평론집 수십 권의 저자인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미술가 자체도 중요하지만, 사실 미술가가 존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이들의 뒷얘기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역할을 한 메디치 가문에 초점을 맞춰 강연을 하겠다. 
출처: 홍석희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지난 11월 29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르네상스 미술과 메디치 가문’을 주제로 강연했다.

당대 피렌체의 역사·지리적 상황


피렌체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도시국가가 각축하던 이탈리아 5개 주요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피렌체가 유럽 문명에 르네상스라는 새 바람을 불러온 것이다. 이주헌 평론가는 특히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발원지가 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 이유는 피렌체가 고대 문화유산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점이다. 두 번째는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 전쟁으로 피렌체가 유럽 전역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 평론가는 “지주 귀족은 돈이 힘이란 걸 느끼게 되면서 도시로 진출해 도시 귀족화하고, 도시에서는 부유한 상인이 재물을 쌓으며 힘과 권력을 얻게 됐다”며 “귀족 계급과 부유한 상인 계급의 상호 수렴이 일어나면서 시민계급의 사회적, 정치적 해방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상업이 활발해진 만큼 도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해방된 시골 농노들은 도망쳐 도시의 노동력으로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평론가는 “부유한 상인들이 자녀 교육에 신경을 쓰며 상류사회가 등장했다”며 “교육 중시 풍토 속에서 그들은 진보적이고 지적인 패트런이 됐다”고 설명했다. 패트런은 미술용어로 경제·사회적으로 예술가를 보호한 애호자를 뜻한다.



르네상스가 꽃핀 토양, 자유와 돈


피렌체 시민들은 공화정에 대한 자부심과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활짝 꽃필 수 있는 중요한 토양이 됐다. 또한 중세 말 이탈리아는 유럽의 여타 지역보다 부유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뉘른베르크 연대기(Nuremberg Chronicle)』에 담긴 피렌체 풍경.

이 평론가는 “알프스 이북 귀족과 달리 이탈리아 귀족은 도시에서 살았고 상업과 금융에 뛰어들었다”며 “이탈리아는 해상무역이 발달해 상인들과 금융업자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금융혁명 덕분에 이탈리아는 당시 유럽의 금융을 독점했다. 실제로 상거래를 기록하는 복식부기 원리와 환어음, 신용장, 예금계좌 등이 이탈리아에서 출현했다.


13~14세기에 걸쳐 당시로써는 새로운 개념인 신용을 제공하는 사업이 출발한 곳은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였다. 그는 “1394년 설립되어 100년간 운영된 피렌체의 메디치 은행은 막대한 부의 축적을 이루며 메디치가가 정치와 문화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반이 됐다”며 “메디치 가문은 자본과 예술을 결합해 피렌체를 불후의 걸작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자본과 예술의 결합이 르네상스의 핵심적인 동력이었다.



메디치가의 위대한 여정이 시작되다


1397년 메디치 은행을 창업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부의 성취에 집중했다. 이 평론가는 “당시 제비뽑기로 공화정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는데, 조반니는 벌금을 물고 참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정치도 멀리하며 은밀하게 부를 쌓은 그는 자식들에게 ‘대중의 눈에 띄지 않게 처신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부유하지 않았던 집안의 경제력을 빠르게 성장시킨 조반니는 사망할 때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시민 중 하나가 됐다.

출처: 위키백과
브론치노가 그린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초상.

대부업에 대한 당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대부업이 대금업, 동성애, 신성모독과 같은 선상의 죄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돈을 벌고자 했던 조반니는 환전상 길드에 가입했다. 이 평론가는 “조반니는 흑사병이 창궐해도 매일 화폐를 출납해야 하는 은행 특성상 문을 닫으면 안 된다며 지독한 사업가 정신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메디치 은행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의 천재성은 오늘날 지주회사를 처음 창안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조반니는 메디치 은행이 번성하자 유럽 각지에 지점을 내기 시작했다. 각 지점은 독립된 조직이지만, 지점장 지분은 10~40%, 나머지는 메디치의 피렌체 본점이 투자했다. 직원의 고용과 해고, 급여 모두 본점이 결정했다.


이 평론가는 “(예를 들어) 런던의 메디치은행 직원들은 서로가 얼마를 받는지 아무도 몰랐다”며 “오직 피렌체 본점만이 알고 통제를 했기에 지점들이 장사가 잘된다 하더라도 독립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훗날 메디치 가문이 정치에 참여할 때 적용한 기법이다. 그는 “메디치 가문 사람이 모든 정보와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메디치 가문이 모든 것을 움직였다”고 말했다. 사람들을 적당히 대접하되 서로 떨어뜨려 놓고 위에서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국부’가 된 메디치 왕조의 첫 군주


조반니는 자식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아랍어를 습득했고 고문서를 수집했으며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며 예술인과 교류했다. 학문과 예술 보호에 앞서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패트런이었다. 이 평론가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에 관여한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위대한 정치인이었다”며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그는 죽고 난 다음 국부로 대접받았다”고 설명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1518~1520년경 폰토르모가 그린 코시모 데 메디치의 초상(왼쪽)과 우피치 광장의 코시모 입상.

코시모에게 인생이란 권력과 안녕, 부와 천국 사이에서 욕망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작업이었다. 젊을 때부터 모든 일을 심사숙고해 애늙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인내와 신중함을 중시하고 여론을 앞세운 뒤 야망은 감추는 데 능했다.  


이 평론가는 “아버지 충고를 받아들인 코시모는 현실적으로는 상인이다 보니 스스로를 잘 감추면서 모든 권력을 배후조종했다”고 설명했다. 이 덕분에 코시모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 부자로 인식됐다.


이 평론가는 “코시모가 메디치 가문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고 행사했다면 가난한 서민들은 코시모가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은인자중하는 태도로 대중의 신망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공화국 피렌체를 사실상 군주국으로 전환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현실과 신앙의 모순을 예술로 극복하다


코시모는 대부업에 관한 부정적 인식을 예술로 극복했다. 이 평론가는 “코시모는 수많은 그림, 조각 등을 만들고 공공시설에도 투자했다”며 “기업이 광고를 통해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것처럼, 메디치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예술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코시모는 대부업과 정치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피렌체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다.

출처: 이주헌
산마르코 수도원. 프라 안젤리코의 여러 프레스코 벽화 작품을 볼 수 있다.

코시모는 막대한 자본으로 산마르코 수도원을 재건했다. 수도원 안에는 코시모의 후원을 받은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 벽화 작품이 있다. 가난한 수도사들은 코시모의 도움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보며 명상하고 기도할 수 있었다.


이 평론가는 “수도원의 제단화에는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등장한다”며 “피렌체 시민들은 그림을 보자마자 이것이 메디치 가문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곳곳에 있는 예술작품으로 메디치 가문을 예전의 대부업자 보듯 업신여길 수 없었다.



재능 있는 예술가를 알아보는 안목


학문과 예술에 정통한 코시모는 예술가의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을 지녔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했다. 그중 한 명이 도나텔로라는 조각가였다. 도나텔로는 동성애자였다. 그의 대표적 작품인 다비드상에도 동성애 성향이 반영됐다. 많은 이는 도나텔로를 혐오했으나 코시모는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이 평론가는 “대다수 피렌체 시민들은 도나텔로를 후원하는 코시모를 보며 수군댔지만, 코시모는 오히려 시민들의 태도에 거부감을 보였다”고 말했다. 코시모는 ‘예술가는 예술가일 뿐이고, 성적 취향이 아닌 예술작품으로 그를 평가해야 한다’는 태도였다. 코시모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이 끝까지 도나텔로를 후원했다. 도나텔로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에 감복하여 자신도 죽으면 메디치 가문 무덤 가까이 묻히길 소망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태리 피렌체 우피치미술관에 있는 도나텔로 조각상.

코시모는 리피의 방탕한 생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리피의 방문을 잠갔는데, 리피는 그것마저 뚫고 여자를 만나러 나갔다.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코시모는 오히려 리피에게 사과했다. 그는 “예술가를 가두는 게 아닌데 내가 어리석었다”며 “이제 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마음껏 그리라”고 했다.


이 평론가는 “코시모가 사회적 편견 없이 예술적 재능의 소중함을 강조했다”며 “메디치 가문의 혜안과 안목으로 르네상스라는 예술의 꽃이 피어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코시모는 초기 르네상스 회화의 대가인 필리포 리피 또한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리피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16살 때 델 카르미네수도원에 수도사로 입문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였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 결국 수녀와 야반도주를 했고, 수녀는 임신했다. 이 평론가는 “수도사와 수녀가 야반도주해 임신했으니 당시에는 충격적 스캔들이었다”며 “그때 코시모가 교황에게 간청하여 리피에 대한 용서를 얻어냈다”고 설명했다.



피렌체 공의회를 열어 그리스 바람을 일으키다


코시모는 지적인 호기심도 컸다. 1439년 그리스 정교와 가톨릭교회가 오스만튀르크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공의회를 개최했다. 많은 비용이 들었기에 교황청도 공의회를 개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코시모가 나섰다. 그는 교황에게 무료 숙소 제공과 비용 대출을 약속하고,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열도록 했다.

출처: 위키백과
화가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여행’. 피렌체 공의회 때 비잔틴에서 온 사람들의 화려함을 반영한 그림이다.

이 평론가는 “코시모가 이 공의회를 중요시한 건, 당대 최고 인문학자들이 피렌체에 와서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피렌체 시민들이 지적 자극을 받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의회 과정에서 코시모도 인문학적 소양을 더 쌓게 됐다. 특히 플라톤 권위자인 게미스토스 플레톤에 감명받은 코시모는 플라톤에 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주치의 아들인 피치노가 플라톤에 열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코시모는 그를 돕기 위해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많은 인문학자가 여기서 토론했다. 플라톤 아카데미는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때까지 이어져 유럽의 사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보다 훌륭하고 매력적인 독재자는 없을 것”


피렌체 르네상스의 가장 강력하고 열정적인 후원자가 로렌초 데 메디치였다. 이 평론가는 “로렌초 치세 때가 피렌체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다”며 “그의 죽음과 함께 피렌체의 황금기가 저물게 된다”고 말했다.


로렌초 역시 어릴 때부터 가풍에 따라 공부에 매진했다. 늘 최고 선학(先學)들에 둘러싸여 토론했다. 이런 영향으로 로렌초는 이탈리아 문학사에 남는 뛰어난 시인이 됐다.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그는 피렌체의 문화와 예술 후원자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출처: 위키백과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화가 조르조 바사리가 그린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상화.

로렌초는 증조할아버지 조반니나 할아버지 코시모와 달랐다. 그는 돈 벌기를 귀찮아했다. 경제가 정치보다 낮은 차원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강한 권력의지를 갖고, 정치를 자신의 본업이라 여겼다. 자연히 은행업은 침체했고 자산도 줄어들었다.


이 평론가는 “로렌초의 정치권력은 세습원리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며 “권력에 법적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대중으로부터 지지받고 권력을 단단히 하는 데 노력을 쏟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에너지를 온전히 내정에 쏟을 수 있었기 때문에 피렌체의 문화예술은 백화난만을 맞을 수 있었다.



예술가들 지원에 모든 정력을 다 쏟다


금전적 여유가 많지 않았던 로렌초는 선조들만큼 많은 예술품을 사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다른 유력자들에게 후원받도록 도울 수 있었다. 비록 경제적 자본은 줄었지만, 사회적 영향력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건축가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 화가 기를란다요, 조각가 베로키오 등 수많은 르네상스 대가가 후원을 받아 뛰어난 예술가로 성장했다. 로렌초가 미술과 건축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출처: 위키백과
루이지 파 팜로니가 만든 레오나르드 다빈치 조각상(왼쪽)과 다니엘 다 볼테라의 미켈란젤로 초상화.

그중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이태리가 낳은 위대한 천재 예술가들이다. 로렌초는 자신보다 세 살 어린 레오나르도를 자기 집에 데리고 살면서 후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스포르자 공작에게 보내진 다빈치는 지속적 후원 속에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역사적 걸작을 남길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가 설립한 예술학교에서 성장했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인문학자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 참석시켰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을 위해 ‘줄리아노 데 메디치’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피렌체 르네상스는 메디치가의 작품


로렌초는 서적과 원고를 수집해 메디치 가문의 장서를 확장했다. 특히 손실 위험이 큰 그리스 희귀본을 찾아서 소장했다. 소유자가 팔지 않으면, 삽화가를 고용하여 사본을 제작할 정도로 열의가 넘쳤다. 교육 분야에서는 피사 대학과 피렌체 대학에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사랑했다.

출처: 위키백과
피렌체 전경.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싹을 틔우고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다.

예술작품이 종교적 장식이 아닌 지성과 상상력의 독창적 표현물이라는 근대적 사고가 처음 생겨난 곳이 이탈리아다. 그중에서도 피렌체가 본산이다. 이 평론가는 “예술에 관한 자의식이 충만했던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전례 없는 형식의 르네상스를 일으킬 수 있었다”며 “그 예술가들 모두가 한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으니 그 집안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라고 강조했다.


메디치 가문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술 후원자이자 선구적인 금융인들이었다. 르네상스의 원동력은 근대 금융의 힘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주헌 평론가는 “메디치 가문은 돈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며 “돈은 혈액 같은 것이고 그것이 순환하며 정치와 권력을 구성하고, 문화와 예술을 만발하게 했다”고 말했다.


피렌체 르네상스는 돈과 예술이 결합해 이뤄낸 환상적인 열매라고 할 수 있다. 피렌체에서 시작한 르네상스는 로마를 거쳐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다.


원문: 단비뉴스 / 필자: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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