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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의 화신, 프레디 머큐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우리의 모습이자,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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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있으면 틀리려 해도 틀리지 않아. 늘 내가 꿈꾸던 사람이 되어 있거든.

무대 위에 올라설 때, 그는 꿈꾸던 사람이 된다. 오래전부터, 어느 골방에서부터, 부모의 억압과 사회라는 장벽 안에서 집요하게 꿈꾸던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있다.


자신을 억누르던 현실을 견디게끔 했던 환상, 오랜 나날들을 이겨내게 해주었던 그 꿈이 어느덧 현실을 몰아냈다. 그 순간, 그는 꿈과 하나가 되어 있고, 자기 앞에 펼쳐진 수많은 군중은 그 꿈의 등장인물이다. 조연들이 그의 뒤에서 연주하며, 그는 꿈의 끝을 향해 달리듯 무대 위에서 모든 걸 발산한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어떠한 분열도 없다.


어쩌면 인간의 운명이라고도 할 만한 세계와의 분열, 현실과의 괴리, 세상과의 불일치와 간극은 사라진다. 무대 위에서 그는, 세계는, 삶은 하나의 온전한 전체가 된다.


그에게 삶이란 불일치이자 불균형 자체였다. 타국에서 건너와 외모부터 다른 이들과 섞여 살아가는 일, 경건한 종교적 삶을 바라는 부모와의 불화, 자기의 꿈을 응원하기보다는 별 볼 일 없게 여기는 주변과 싸움이 늘 그 안에 어떤 ‘부적절감’을 품게 했다.


어쩌면 그 부적절감, 눈앞의 세계와 온전히 일치할 수 없는 마음은 그가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이질적인 성향’에서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후 밝혀지지만, 그는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였고, 일찍부터 자신을 여성스럽게 분장하는 데 매혹을 느끼던 터였다.


그런 삶의 여러 조건은 그가 ‘완전한 일치’를 꿈꾸도록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순간, 완전히 하나 전체로 이르는 순간을 더 갈망하게 했을 것이다.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퀸』의 리드보컬이었던 프레디 머큐리의 생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 2018』는 이처럼 ‘완전한 순간’을 지향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영화는 그 몇몇 완전한 순간들, 즉 노래 부르는 이도, 노래를 듣는 이도 완벽히 몰입할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순간의 이면에 관해서도 놓치지 않는다.


전율과 희열의 순간, 일치와 완전성의 시간, 발산과 영감의 시절은 그에 대한 반작용 혹은 후폭풍을 몰고 오듯 삶의 나머지 부분들을 휩쓸어버린다. 가정은 무너지고, 오랜 동료들과 틀어지고, 배반과 공허가 들이닥치며, 세상의 적대감과 주변의 적개심이 그를 향해 달려든다.

어찌 보면 그가 원한 것은 정말로 스스로가 온전해지는 지극히 사적인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순간에는 그 이상의 유명세나 성공을 꿈꾸기도 했을 테고, 음악적인 혁명이나 모든 소외된 자들을 위한다는 것과 같은 대의에 도취하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에 관해 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어디까지가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스스로가 결정한 자기 자신으로 온전해지고 싶었다. 세상과 불화한다면, 그 세상을 부숴버려서라도 자기 자신이고 싶었다.


자기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영감, 세상의 규칙보다는 그 감각에 따르는 삶, 그 흐름 속에서 비로소 ‘꿈이 현실’이 되고 ‘스스로가 곧 세상’인 시간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감명 깊게 전해져오는 것은 사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꿈이자,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는 부적응자들이다. 우리는 살아오는 내내 세상으로부터 다양한 강요들을 당해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억누르고, 타협하며, 굴종하고, 또 때론 폭력의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되어야 했다.


프레디는 그런 세상의 폭력을 우리를 대신하여 얻어맞듯이 삶을 불태웠다. 그는 말한다. 『퀸』은 “부적응자들을 위한 부적응자들”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위한 거창한 대의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운명을 대변한 말에 가깝다.


모든 사람은 절규하고 있다. 모두에게는 상처가 있다. 누군가는 그 상처에 대해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상처를 말하며 상처 입는 자에게 열광하고, 그에게서 가장 큰 위안을 얻는다. 그것이 곧 우리의 모습이자,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프레디 머큐리는 모든 삶의 화신과 다르지 않다. 그가 노래할 때, 우리는 실현되어야만 하는 어떤 세상을 본다. 그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이고는 두려움에 떨며 엄마를 찾는 한 소년의 절규가 비난받기 보다는 이해를 받는 어떤 곳이다.


모든 이들이 손가락질하며 죽어 마땅한 존재라 낙인찍는 와중에도, 그 소년의 마음이 이해받는 어떤 세상이다. 아주 어릴 적, 그 어떠한 일도 부모의 사랑 속에서 포용될 수 있었던 아이들이 마치 그 부모의 품에서와같이 세상에서 받아들여지는 그런 세계이다.


설령 그 어린아이가 동성을 사랑하든, 피부색이 다르든, 기존의 것과는 다른 노래를 부르더라도 승리자가 되는 그런 무대이다. 모든 이들이 함께 발을 구르며 연주하고, 무대의 주인공과 구경꾼이 더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노래 부르며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동참하는 그런 시간이다. 꿈이 현실을 이기고, 이해가 배제를 물리치며, 소란이 정적을 몰아내며 세상을 뒤흔들 그런 날이다.


영화는 결코 한 남자의 완벽한 인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삶은 희열과 공허의 양극단 속에서, 지나친 불균형으로 점철되어 어떤 두려움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는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안절벽을 걷듯이 한 삶을 살아냈던 것처럼만 보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절벽을 걷는 삶이, 그 아슬아슬한 생의 투쟁이 마치 우리 삶을 대신해서 싸워준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는 내가 마땅히 싸워야 할 어떤 싸움을 대신했다. 어째서인지 그 기묘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이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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