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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행복할 때 나는 최악을 생각한다

조회수 2018. 12. 27. 1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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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듯이 행복하고 더할 나위가 없이 좋을 때 항시 최악을 생각한다.

'상한가'


SNS 글쓰기를 시작하고 난 뒤 내 생활은 소위 상한가를 치고 있다. 무슨 팔자에 없는 방송 출연에 심사위원에 경이로운 일이 지속되는데, 으레 그렇듯 못된 버릇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불안증'


지난한 삶을 살면서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타고난 낙천성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차악의 솔루션을 생각한다. 온몸에 멍이 들고 상처가 나 피가 뚝뚝 떨어져도 한 점만 바라보고 묵묵히 걷는 끈기. 거기에 아무리 많은 생채기가 나도 '별거 아닌데?'하고 넘기는 낙천성은 나를 살게 해준 원동력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다 잘 될 거야'라는 말로 온통 뇌를 채워 버리기 때문에 가능한 낙천적 최면 상태랄까.


문제는 역의 상황에서도 이런 성질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미칠 듯이 행복하고 더할 나위가 없이 좋을 때 항시 최악을 생각한다. 전주로 내려와 집 안을 추슬렀을 때 이 불안증이 돋았고, 몸이 아팠다. 몸이 좋아지고, 기자 일이 손에 붙었을 때 갑자기 공황증이 찾아왔다.


어디론가 떠나야지 하고 베이징에 왔는데 김정남이 죽고, 사드가 터지고, 트럼프가 오고, 김정은도 3번이나 베이징에 오고, 사람이 갑자기 하나 줄면서 혼돈의 아노미를 맞았다.


돌고 돌아, 요즘. 너무 일이 잘되고 좋은데 마음 한쪽에서 몹쓸 불안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동요 없이 잘 버텨내는 나는 감사하고, 어여쁘기까지 하다. 반대로, 좋은 일이 있을 때 제대로 즐길 줄 모르고 불안해하는 나는 꼴도 보기가 싫다.

그래서 '자랑교'의 교지를 생각하며, 또 「어른은 어떻게 돼」 박철현 작가님을 생각하며 자랑을 해봤다.

음. 어색하고 좋은데? 라는 생각과 집어치우자는 생각이 들었다. 안 어울려. 몸에 안 맞아. 그만하자. 양화대교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데 엄마가 떠오르는 것이 기분이 이상하다. 엄마는 돈이 없을 때, 그러니까 극도로 돈이 없을 때 묘한 재주를 발휘해 집 안을 이끌어 왔다. 


일례로 1997년 가을 IMF가 조선반도를 뒤덮었을 때였다. 우리 집은 어김없이 아버지의 실직을 맞았다. 사실 원래 별로 바깥 일을 안 하시기 때문에 실직에 따른 큰 충격은 없었지만, 문제는 은행 빚이었다.


다행히(?) 당시 온갖 사업체가 부도를 겪으면서 땡처리하는 물건들이 시장에 쏟아졌다. 때문에 생필품 가격이 내려가 우리 집 생활비는 오히려 줄었다. 하지만, 20% 후반대까지 치솟은 은행 이자는 카드 돌려막기로 살아가는 우리 집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 우리는 엄마의 수입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고, 엄마의 월급은 부업 포함 70~80만 원 선에 불과했다. IMF의 후폭풍이 거세게 불던 98년에 나는 막 고딩이 됐었다. 누나도 지역 국립대에 입학해 새내기 생활을 시작했던 때다.


기본적으로 매달 나가야 하는 돈만 세어 봐도 카드이자 30만 원, 집세 17만 원, 누나나 내 용돈 13만 원 등이 필수로 빠져나갔다. 거기에 누나와 내 등록금을 별도로 마련해야 하고, 그 나머지로 살림을 꾸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4인 가정에 20만 원으로 생활이 가능하긴 한 건가? 혹여 지인의 경조사라도 생기면 흰 봉투를 앞에 두고 고뇌하던 엄마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반대로, 지금 엄마는 빚도 없고, 생활비도 넉넉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내가 있으므로 재정에 여유가 좀 생겼다. 말 그대로 흑자 재정. 이런 상황에 놓이니 어떻게 하실 줄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여행만 주야장천 다니시는 걸까?


엄마는 주변에서 누가 돈이 급하다면 빌려주기 급급하고, 심지어 나한테 꿔다가 빌려주기까지 한다. 한번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짜증을 낸 적이 있다. 말 수가 워낙 없는 양반이라 대꾸는 안 하셨다. 돌이켜 생각하니 옛 생각이 나서 그러시는 거 같기도 해서 짠하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다.


다시 돌아와 요즘 너무 행복에 겨워 사는 입장에서 이 넘치는 행복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감당을 못하는 나를 보면서 엄마를 벤치마킹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넘치면 나누면 된다. 나누다 보면 좀 나눔이 부족하게 되니까. 어디서 빌려다가 나누겠지? 그러면 나는 또 '마이너스'. 마이너스는 내 주특기 아닌가. 그럼 또 채우고, 넘치고, 다시 퍼주고, 부족하면 다시 채우고, 이렇게 선순환시킨다.

생각해보니 찢어지게 가난한 순간을 넘어섰을 때부터 엄마는 남을 도우셨던 거 같다. 내가 삼수를 마치고 집 빚을 다 털고 상경을 앞뒀을 무렵이니 2005년쯤부터 시작됐을 거다.


지금은 내가 다 건네받아 살을 붙인다고 붙였지만, 당시 엄마만큼 대범하게는 못하는 꼴이니 새삼 엄마의 대범함에 경외감을 금치 못하겠다.


현인은 보통 저기 TV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경우가 많다. 행복이 넘쳐서 부담스러우면 바가지로 휙휙 텀벙 첨벙 퍼내 버리자. 불안증이 시원~하게 가셔버리게. 변태같고 좋은데?


원문: 돼지터리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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