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통해 성평등으로 나아가기: '툴리'

조회수 2018. 12. 17. 1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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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기적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저주라고 말한다

※ 이 글은 영화 〈툴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면 글을 닫아 주세요.


〈주노〉의 제이슨 라이트먼과 디아블로 코디 콤비가 〈툴리〉를 통해 다시 한번 만났다. 특히 〈주노〉를 비롯해 〈어바웃 리키〉 〈죽여줘 제니퍼〉 〈영 어덜트〉 등 여성 중심적 서사를 선보여왔던 디아블로 코디의 실력이 〈툴리〉에서도 발휘된다. 〈툴리〉는 이미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이제 막 셋째 아이가 태어난 마를로(샤를리즈 테론)가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를 고용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아낸다.


제이슨 라이트먼과 디아블로 코디는 둘의 이야기를 통해 임신과 출산 이후 겪는 여성의 경험, 독박육아와 돌봄노동과 가사노동과 가족관계 등의 경험을 숨 가쁘면서도 유기적으로 경유한다. 이를 통해 제시되는 것은 단순히 독박육아로 인한 극단적 피로감과 우울함을 폭로하는 것만이 아닌 연애, 결혼, 임신과 출산, 육아 등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여성의 삶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숨이 턱 막힌다. 만삭의 마를로는 주의력 결핍 과다활동 장애를 겪는 것 같은 아들과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을 기르는 육아를 전담한다. 9개월간의 임신으로 마를로의 몸과 정신은 피폐해졌고, 피곤함은 얼굴을 녹여버릴 기세로 그의 피부에 들러붙어 있다.


남편이 직장에 가 있는 동안 만삭의 몸으로 두 아이를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던 중 셋째 아이를 낳고 아들이 다니던 유치원은 더 이상 그를 돌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통보를 한다. 악재가 겹친 마를로는 오빠가 제안했던 야간 보모를 들이기로 결정하고, 툴리가 그의 집에 도착한다.


마치 수차례 일을 해본 것처럼 능숙하게 일하는 툴리는 마를로에게 “나는 아기가 아니라 당신을 돌보러 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툴리는 육아뿐 아니라 그동안 밀렸던 청소와 요리까지 해결해준다. 마를로는 정말로 오랜만에 푹 잠자고 아이들, 남편과 함께하는 문자 그대로의 생활을 되찾는다.

〈툴리〉를 여기까지만 본다면 독박육아의 고됨만을 폭로하는 영화로 읽힌다. 하지만 영화는 반전을 심어 놓는다. 마를로와 툴리는 어느 날 교외를 벗어나 브루클린에서 술을 마신다. 툴리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마를로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돌아오는 길 마를로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를 낸다.


그런데 사고가 난 차량의 조수석엔 툴리가 없다. 이어지는 병원 장면에서 마를로의 결혼 전 성이 툴리였음이 밝혀진다. 툴리는 마를로가 부른 보모가 아니라 마를로의 26살 시절이 투영된 환영이었던 것이다. 이 반전은 신체의 약화와 독박육아 등으로 인해 찾아오는 산후우울증을 보여줌과 동시에, 결혼 이후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기르는 역할을 맡아버린 여성의 삶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그것을 생명과 사랑의 기적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건강과 삶에 피폐함을 가져오는 저주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무엇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여성적인 경험, 그러한 삶을 보여주며 이것은 저주이자 기적임을 보여준다.

툴리의 환영이 보이고 난 후 마를로가 보여주는 표정을 단순히 산후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적 영향으로만 볼 순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신체와 정신이 모두 피폐해졌음 또한 명확하게 드러난다. 결국 〈툴리〉가 마를로로 대표되는 임신-출산-육아에 걸친 여성의 삶을 경유하여 드러내는 것은, 선택지가 저주이든 기적이든 간에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지금의 구조다.


마를로가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홀로 아이들을 키우든 툴리를 소환해 이를 기적으로 보이게 하든, 남편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출장도 다녀오고 밤엔 침대에 누워 게임기를 쥐고 좀비들을 쏴 죽일 뿐이다. 마를로의 오빠 또한 보모라는 일종의 아웃소싱을 제안할 뿐, 그가 실제로 아이들을 돌보는 데 얼마나 동참하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남편은 마를로가 사고를 당한 이후 병원에서 “우리를 사랑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여기서 ‘우리’는 마를로와 자신만을 칭하는 것일까, 세 아이를 포함한 가족 전체를 말하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너와 나라는 일대일적인 애정을 벗어나 우리라는 틀로 부부 혹은 가족을 지칭하고, 이러한 말이 실천으로 옮겨갔을 때 성 평등한 가족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육아와 가사노동에 있어서 남편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선 관계적, 감정적 실천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툴리〉의 가장 큰 성취다. 때문에 ‘우리’라는 단어는, 마를로와 같은 여성의 삶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공감했을 때 가능한 말일 것이다. 그 ‘우리’ 안에 툴리가 포함되어 있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원문: 동구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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