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The Guardian의 「‘There is no such thing as past or future’: physicist Carlo Rovelli on changing how we think about time」을 번역한 글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흘러가는’ 강물이라 생각합니다. 그 경우 죽음은 강가에 우리를 내려놓는 것이 될 겁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영원히 앞으로 흘러가지요. 그런데 정말 시간이 그런 것일까요?
시인들은 때로 시간을 주춤거리고, 기어가고, 느려지며 심지어 멈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또 과거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물건이나 사람, 장소에 새겨졌다고 표현하지요. 줄리엣이 로미오를 기다릴 때 시간은 더디게 흘렀을 겁니다. 아마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이 다시 한번 아버지의 전차를 빠르게 몰아 ‘밤을 즉시 몰고 오기를’ 바랐겠지요. 우리는 너무나 현실 같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도 평소 느끼던 시간이라는 개념이 환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책을 쓰는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입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Seven Brief Lessons on Physics)』은 블록홀에서 양자에 이르는 주제를 단순하고 참신하게 설명해 세계적으로 130만 권이 팔렸습니다. 그의 신작 『시간의 순서(The Order of Time)』는 시간에 대한 시적이면서도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그저 ‘흐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시간에 대해 가진 개념을 모든 면에서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로벨리가 수학했던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교회 앞에서 만났습니다.
60대 초반의 작은 체구를 가진 그는 약간 들뜬 모습으로 추억에 잠긴 듯했습니다. 그는 지난 2010년부터 마르세이유의 이론물리센터에서 양자중력센터를 이끕니다. 그전에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10년 정도 지냈습니다.
그는 볼로냐를 거의 방문하지 않는 듯, 볼로냐의 오랜 친구들과 연락했습니다. 우리는 대학가를 거닐었습니다. 베르디 광장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깃발과 낙서, 플랭카드 등이 파시스트에 대한 반대와 쿠르드족 지지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2016년 이집트에서 살해당한 캠브리지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줄리오 레제니를 기억하자는 팻말도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운동권이었습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무엇을 주장했을까요?
이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이 너무 급진적이었다고 말하며, 사유재산을 없애는 것이나 질투 없이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LSD가 있습니다. 그는 LSD를 몇 번 해 보았습니다. 그 경험은 후에 그가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데, 특히 시간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상합니다.
그것은 실재의 구조가 완전히 전복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물건들이 번쩍이며 이상한 형태를 취하는 환상을 보았고, 또한 그 경험 중에도 스스로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가 LSD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 때와 자신이 학생일 때 칼라브리아 해변에 누워 아인슈타인의 책을 읽으며 이 세상이 사실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그 위대한 물리학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물결치는 시공간 속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할 때의 느낌은 매우 비슷했습니다.
그는 보수적인 베로나 출신의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렸다고 말합니다. 이제 90대인 그의 아버지는 카를로가 어렸을 때 그의 선생님이 카를로는 그런대로 잘하고 있다고 말하며, 단지 머리가 좀 길고, 급진적이며, 종종 경찰과 부딪힐 뿐이라고 말했을 때 크게 놀랐습니다.
한때 이탈리아에서 학생운동은 긍정적인 분위기였지만 1978년 한 급진파가 전직 수상인 알도 모로를 납치해 살해하면서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고, 로벨리는 물리학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계 경력은 남들과 다릅니다.
학계는 일반적인 직장에서 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보였고 그는 몇 년 동안 직장을 잡기보다는 자신의 호기심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 토렌토의 한 연구팀으로 가서 몇 달 동안 자신의 차에서 잠을 자며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크리스 이샴과 같이 연구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고, 앱해이 아쉬테카와 리 스몰린과 같이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의 책이 인기를 끈 것도 다른 이들에 비해 좀 늦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양자중력 공부를 끝내고 나서 2004년 첫 책을 썼습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입문서에 해당한다면 『시간의 순서』는 조금 더 어렵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내가 과학을 위해 하는 일, 내가 깊게 생각하는 것, 내게 중요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로벨리가 물리학자로서 남긴 업적은 크게 보아 아인슈타인과 양자 이론이 채우지 못한 영역입니다. 일반상대론은 모든 것이 연속적이면서 휘어진 시공간을 다룬다면, 양자이론은 불연속적인 에너지가 상호작용하는 세계를 다룹니다. 로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두 이론은 모두 성공적이었지만 이들을 연결하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론 물리학에서 이루어지는 주요한 작업 중 하나는 이 두 이론을 모두 설명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시공간이 그 자체로 미세한 구조로 꼬여 있는 알갱이라고 말하는 로벨리의 루프 이론, 혹은 루프 양자 중력은 그 문제의 가능한 답 중 하나입니다.
끈 이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또 다른 방식의 답입니다. 내가 그에게 그의 양자중력이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묻자 그는 맞고 틀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논쟁을 진행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론에서 시간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아인슈타인이 오래전에 보인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기 때문에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세상에서 절대적인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시간은 그저 다른 것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그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로벨리는 시간을 ‘기하학적 공간에 대해 더 복잡하게 기하학적으로 얽혀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특히 로벨리의 이론에서 가장 근본적인 수준으로 가면 시간이 사라집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그저 인간의 ‘모호한’ 인식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침침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혹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에서처럼 그림자의 연극을 볼 뿐입니다.
로벨리에 따르면,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은 열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시간의 순서』에서 그는 왜 우리가 과거만을 알 수 있고 미래는 알 수 없는지 묻습니다. 그는 그 답이 열은 따듯한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만 흐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뜨거운 커피에 떨어진 얼음은 커피를 차갑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반대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열역학 2법칙이 말하는 것처럼 열은 한 방향으로만 흐릅니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를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인 엔트로피를 이용해 설명합니다. 과거의 엔트로피는 더 낮았습니다. 미래의 엔트로피는 더 높아집니다. 미래는 더 무질서하며, 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카드 한 팩은 깔끔하게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지만 미래의 카드 한 팩은 더 섞여 있고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엔트로피, 열, 과거와 미래는 우주의 근본적인 특성이 아니라 우리의 관찰 결과 때문에 나타나는 개념입니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로벨리의 책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물리를 처음 접하자마자 포기해버린 나 같은 사람의 요약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로벨리와 이야기하면서 내가 그의 완벽한 독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또한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배웠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듯 “시험에 통과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책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처럼 물리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 역시 그의 책을 좋아합니다. 그의 책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 중간에 있는, ‘물리학을 조금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물리를 비판합니다.
세상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로 나뉜 것도 비판했죠.
그의 글이 즐거운 이유는 그가 매우 넓은 문화적 식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역사 지식은 그의 책을 처음 읽는 이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만듭니다(그는 과학과 인문학 학생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과학사 과목을 가르칩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 루트비히 볼츠만, 로저 펜로즈가 프루스트, 단테, 베토벤, 그리고 호라티우스와 함께 등장하며 마치 블랙홀과 스핀, 확률 구름의 세계로 떠나기 전에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한껏 느끼게 만드는 듯합니다. 각 장은 로마 시대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로벨리는 인간의 삶을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우주적 관점과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슬픔과 즐거움이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차가운 과학’과 인간의 내적, 영적인 삶 사이에도 모순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는 물리학과 시를 비교하며, 두 학문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묘사하려 애쓰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물리학은 수학이라는 본래의 언어 외에도 비유와 은유를 사용해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을 겁니다. 로벨리는 인상적인 비유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시간이 부드럽게 ‘흐른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합니다.
또한 시간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시간성에 대한 모든 흔적이 사라진 텅 빈, 아쉬운 아름다움만으로 반짝이는 본질만이 남은 세상’에 버려졌습니다. 내가 읽은 모든 책 중에서 로벨리는 BC 1세기경 로마의 시인이었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장대한 서사시를 썼던 루크레티우스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로벨리는 실제로 루크레티우스의 팬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상한 생각은 아닐 겁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원자의 존재를 예견했고 이는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서야 이를 증명했으며 18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틀린 주장으로 여겨졌습니다. 로벨리와 루크레티우스의 공통점은 뛰어난 언어능력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 속 인간의 위치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이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한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주를 더 잘 이해할수록 가지게 되는, 잘못된 믿음이나 미신을 버리고 일종의 담담한 마음을 즐기면서 얻는 이성적인 관점입니다. 동시에 로벨리는 인간의 본질이 사랑, 공포, 욕망, 열정이며 이들이 바로 우리의 덧없는 삶, 곧 우리에게 할당된 매우 짧은 시간을 비로소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