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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년'과 '화냥기'라는 말 없으면 예술 못합니까?

조회수 2018. 10. 16. 10:0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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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언어는 약자 배제를 고착화·정당화한다.
출처: 이외수의 페이스북
요새 너무 경색되고 ‘미투’다, 이런 것들이 있다 보니까 서로가 움츠러들어서 뭐 개그라든가 유머라든가 조크를 하려도 […] 사회가 무서워졌어요.

- 코미디언 심형래(19금 버라이어티 심형래 쇼 기자간담회 발언 중)
문학이 버려야 할 말이 너무 많아졌어요 형님

- 시인 류근, 11일 이외수의 「단풍」에 대한 페이스북 댓글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올드보이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생각하는 그 좋았던 ‘옛날’은 무엇인가. 그들이 마음껏 ‘혐오’하고도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시절을 뜻한다. 흑인을 조롱하고 여성의 외모와 몸매를 비하하고, 장애인의 행동이 개그의 주요 소재가 됐던 그때. 시의 화자가 빨랫줄에 걸린 속옷을 보면서 여성의 가슴을 상상하고(복효근), 여성을 때리고 나서 자아를 찾고(박남철), 여성을 ‘조립식 침대’라고 대상화하며, 잘 길들여준 여성의 옛 남자에게 감사한다던(류근), 그것들이 떳떳하게 ‘문학’의 이름을 가지던 그때.


물론 올드보이들은 억울할 것이다. 앞서 ‘혐오’라고 일컬은 것들은 그들에겐 관습이었고, 권장되는 일이기까지 했다. 사회에 만연한 엄숙주의를 깨고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에 이들은 일종의 뿌듯함도 느꼈을지도 모른다.


시대가 달라졌다. 젠더권력을 가진 남성의 시선과 잣대로 세상을 규정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이가 많아졌다. 트위터에서는 누군가 이외수의 「단풍」에 대한 미러링으로 「은행」이라는 시를 썼다. 또 ‘남애시인고간’이라는 이름의 계정에서는 여성을 대상화한 시의 미러링 시를 올린다. 그들의 시에서 남성들의 신체가 적나라하게 비유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그간 남성시인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얼마나 여성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출처: 강생이 모리와 산책빌런의 트위터
「은행」

‘정상’이자 ‘보편’의 위치에서 사회를 규정하고 약자에 대해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던 지위에 있던 이들이,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그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 끌어내림’을 당한 이들은 “표현의 자유가 없다”, “무섭다” 등등의 말로 ‘억울함’을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작품을 통해 ‘보편’의 위치에 서서 대리만족하던 독자 내지 소비자들은 그들의 충실한 지원군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도구화하지 않고서는 힘을 얻지 못하는 언어라면, 그 언어의 토대란 빈곤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대중을 상대로 ‘언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내가 쓰고 싶어서’ 혹은 ‘그게 가장 적확하다고 느껴져’ 혐오 발화를 한다? 고민 안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릴 적에 ‘짱깨’라는 말을 자주 썼다. 중국인들이나 혹은 중국 음식을 지칭해 그런 말을 했다. 약간 껄렁하게 “야 짱개 시켜 먹자~” 하면 웃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 즐겨 썼던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왜 ‘짱깨’라는 말을 쓰냐고 지적한 적이 있다. 난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그냥 쓴다”고 했고, 그 이후에도 지적을 받자 “누군가를 비하할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안 쓰려고 하지만 종종 입에서 튀어나올 때도 있다.


이처럼 ‘혐오 단어’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담은 비유는 재미있어서, 감각적이라고 느껴져서, 관습이라서 그냥 쓴다. 당연히 수많은 개그맨과 시인도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을 비하할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면 끝인가? 의도와 별개로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혹은 교과서에까지 접하는 그들의 언어는 성차별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배제를 고착화·정당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출처: EBS
교과서 속 성차별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어원은 차치하고 이외수 작가가 쓴 ‘화냥기’라는 말을 보자. ‘남자를 밝히는 여자의 바람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자의 바람기를 지칭하는 말은? 없다. ‘화냥년’이든, ‘화냥기’든 일방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다. 어떤 행동을 하는 여성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데, 그 행동을 하는 남성을 지칭하는 말은 없을 경우(걸레, 맘충 등등) 그것이 혐오 표현이라고 여기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물론 혐오표현은 부조리를 드러내거나, 혹은 서사의 전개를 위해 예술작품에서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외수 작가의 시에 어디 그런 ‘맥락’이 있나. 단풍을 ‘화냥기가 있는 여성’에 빗댄 것에 불과하다. 이게 불가피하고 대체할 수 없는 비유인가. 젊은 사람들은 ‘저년’과 ‘화냥기’를 빼고 단풍에 대한 시를 쓸 수 없냐고 따졌다. 하지만 이외수 작가는 모든 비판자의 블락, 그리고 오늘 ‘감성마을 단풍 오르가즘’이라는 포스팅으로 응답했다.


DJDOC의 ‘수취인분명’ 가사,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에 비판이 쏟아진 이유는 박근혜라는 공인의 잘못이 아니라 박근혜의 여성성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시대가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꼭 그렇게 약자를, 혹은 누군가의 약자성을 비하해야 하느냐고. 적어도 다른 방식은 없었는지 고민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다행히 서효인 시인은 그 물음에 응답했다. 한국일보 기사에 의하면 그는 시집 『여수』를 내기 위해 기존에 쓴 시를 묶으며 ‘여성혐오’가 엿보이는 시어를 고치거나 다시 썼다. ‘여공들’을 ‘젊은이’로, ‘아줌마’를 ‘학부모’로 바꿨다. 시 「서귀포」에서 4·3 항쟁을 회상하는 부분 ‘젊은 남자는 섬 말 쓰는 아녀자를 잡아서 궁둥이 사이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를 ‘미아들은 섬 말 쓰는 사람들을 잡아도 몸 어딘가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수정했다.

서효인 시인

그가 한국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했던 말은 이번 ‘단풍 논란’에서 더욱 새겨들을 만하다.

폭력적인 장면이나 처연한 분위기를 살리는 장면에서 여자를 폭력의 제물로, 배경적 소재로 써 왔던 게 한국문학 특유의 버릇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여성혐오를 무슨 예술적 영감인 양 이야기하던 올드보이들의 시대는 끝났다. 여성을 비롯한 약자와 소수자를 비하하지 않아도 예술은 가능하다. 그것은 ‘자기 검열’ 보다는 창작자로서 관습과 편견을 넘어서는 과정에 더 가깝다.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서효인 시인처럼 혐오를 거부하는 ‘다른 길’을 선택하는 움직임도 늘어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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