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피로, 나를 흩뿌려놓는 일에 관하여

조회수 2018. 7. 12. 1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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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잊혀지기를 바라는 건, 이상한 일일까?

1.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의 시선에 닿아 쌓인 나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그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리하여 그에게 '나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 그래서 관계 맺는 일은 내 안에 나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고, 그렇게 더해진 나를 하나 더 짊어지는 일이다. 관계 맺는 사람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나도 하나가 더 생겨난다.


관계의 피로는 상대방을 보고 기억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새겨진 나를 감당하는 데서 더 크게 온다. 그러나 누군가는(이를테면,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걸 원치 않는다. 그렇게 분화되어, 여기저기 쌓여있길 바라지 않는다. 그 모든 ‘나들’을 기억하기에는,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 마음의 한계는 명확하다.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이 점점 신경쇠약증의 성격을 띄어간다면, 그것은 일종의 마음의 과부하, 어찌 보면, 뇌나 영혼의 한계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나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나'라는 인간이 단 하나로 단일하여, 어느 누구를 만나든 전혀 '나를 향한 그의 시각' 혹은 '나에 대한 그의 기억'을 신경 쓸 것 없이, 그저 늘 똑같은 나로 데굴데굴 굴러다닐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온전한 의미의 관계라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런 경지는 관계의 정지를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타인으로부터 오는 영향도 없을 것이고, 그의 시선도 모를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관계라기보다는 일종의 일방적인 폭력이 될 것이다. 나를 타인에게 내어주지 않는다면, 관계란 성립할 수가 없다.



2.


때때로 새로운 타인들에게 나를 설명하는 일이 지칠 때가 있다. 그럴 만큼의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이들과는 지극히 피상적인 어떤 사이 외에 관계라고 할 만한 것을 맺질 못한다. 그들을 알고자 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나를 알리고자 해야 하는데, 그럴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도대체 내가 왜? 왜 그래야 하는가? 관계에 대한 피로는 나를 설명하는 일에 대한 피로다.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적인 의존과도 관련이 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을 때, 누군가가 필요할 때, 우리는 필사적으로 상대에게 나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와 맞먹을 만큼, 상대에 관해 묻고 듣는다. 그렇게 관계는 형성된다. 그러한 관계들이 삶을 이룬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자체에 피로를 느낀다면, 새로운 관계는 생길 여지가 없다. 타인이 나에게 새겨질 일도, 내가 타인에게 새겨질 일도 없다.


또한 이 관계에 대한 피로의 이유는, 이미 내가 기존의 관계도 제대로 유지하고 있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 혹은 유지하지 못하여 흩어져버린 것들, 차마 손을 뻗어 잡을 수도 없이, 팽창하는 우주 속의 원자들처럼 끝없이 멀어지는, 그렇게 떠밀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삶은 이미 나를 제멋대로 이끌고 있으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나의 주체성이나 능동성이랄 것은 그 범주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떠내려가는 것에 대한 순응이 관계에 대한 피로를 만드는 것이다.



3.


어쩌면 이미 내가 너무 많이 나를 설명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글을 썼고, 너무 많이 표현하여, 이 세상에는 나를 온전히 아는 사람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쓴 그 많은 글들, 내가 살아온 그 많은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을 들여다보고 온전히 나를 구성하고 바라보며 기억하고 있는 그 어떤 타인이란, 대체 누구일까.


사실 나 스스로도 그 무수한 나들을, 그로 인해 쌓이고 있는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 누가, 나를 온전히 보고 있는가. 누가, 온전히 나를 기억하며, 나를 듣고 있는가. 그래서 누가, 나의 시선에 대해 알고 있는가.


관계를 맺는 일이 피로하다 느끼는 건, 이미 내가 수습할 수도 없을 만큼 너무 많은 나들을 흩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 그 무수한 나들로부터 해방되길 바라게 되고, 그 모든 나들을 저 우주의 저편으로 떠내려 보내고 싶어진다. 세상 곳곳에 흩어진 나들은 누군가들에게 조금은 거론되거나 기억되다가, 어느덧 완전히 사라지고 잊혀질 것이다.


그날을 꿈처럼 그리곤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만 할까.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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