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독전'에 대한 이상한 변명

조회수 2018. 6. 29. 12: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시스템의 공고함을 보여주는 어정쩡함

※ 이 글은 영화 〈독전〉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면 이 글을 닫아 주세요.


〈독전〉의 초반부를 보며 뭐 이렇게 이상하게 만들어진 영화가 있나 생각을 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었고 이야기는 단선적이었다. 연기가 전체적으로 적절하지 못했는데, 특히 중국 측 마약상 진하림(김주혁 分)과 그의 애인 보령(진서연 分)의 연기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었다.


폭발하듯 미친놈을 연기하는 두 배우는 몰입이 살짝 부족해 보여 오히려 더 보기 힘들었다. 조선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비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다 그 악을 쓰는 에너지가 어디선가 삐져나오는 순간들이 가끔 웃음을 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던 점은 몇몇 인서트 컷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다는 점이었다. 초반 마약 공장으로 향하는 슬레이터 지붕들이 이어지는 길들의 황량함이나 이후 또 다른 마약 공장이 있는 염전으로 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얻어 걸린 한두 컷이라 보기에는 탁월했고, 염전 주변의 씬도 수려했다.

그즈음 말을 하지 못하는 두 마약 제조업자의 말을 번역하기 위해 수화 전문가가 몰카 화면을 보며 경찰들에게 그들의 말을 전달한다. 그 톤이 마치 한 명이 더빙한 성우 플레이를 보는 것 같아 그 부분만 꽤 재미있었다. 전설의 마약왕 이 선생을 사칭하는 브라이언(차승원 分)이 등장하고 신학을 배운 그가 목사의 톤으로 마약 거래 및 조직 관리를 하는 어법도 재미있었다. 


그럼에도 영화가 그렇게 납득이 되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다 마지막 결투씬에서 잘린 손목이 배달되어 오고 연막탄 속에서 경찰과 조직 간의 결투씬을 보는데 몇몇 액션 장면, 경찰과 조직원과의 싸움 같은 장면에서는 굉장히 멋있고 에너지가 넘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스즈키 세이준과 ‘로망 포르노’라는 장르가 번뜩 떠올랐다.


감독이 하고 싶었던 것이 아마 그 ‘로망’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로망 포르노는 일본의 저예산 B급 영화로 적당히 정사 씬만 넣어주면 감독은 간섭없이 마음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스템 아래에서 상당한 괴작/명작들이 기어 올라오기도 했다. 로망이란 그 지나친 과장, 장르에의 몰입을 통해 발생하는 유미주의로 현실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감독이 그토록 과장된 캐릭터를 구사했던 것은 바로 그 현실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극 자체의 세계에 끌어들이고 싶었던 시도로 느껴졌다. 감독이 만든 이전 영화 중에는 〈천하장사 마돈나〉와 〈페스티발〉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내 기억으로 〈페스티발〉은 정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영화였다(다음 단락 〈독전〉 결말 스포일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을 놓치고 가짜 이 선생을 잡은 후의 원호(조진웅 分)의 감정 역시 현실적이지 않았지만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동료를 잃고 범인을 놓친 팀원들은 다시 수사하자고 말하지만 그는 지치지 말고 집에 들어가서 씻고 자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마치 B급 누아르 같은 이상한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표면적으로 공을 세우고도 경찰을 그만두고 진짜 이 선생을 찾아 나선다. 그는 수술한 개에게 달아둔 GPS를 쫓아 (한국이 아님이 분명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설경이 있는 오두막을 기어이 찾아가 이 선생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총소리가 울린다. 생각해보면 꽤 B스러운 황당함이 있는 설정이지만 보는 순간은 진지하게 빠져들었다.


이 장면에서 감독의 어떤 로망 지향을 확신했다. 류준열과 조진웅의 연기는 극을 떠받치기엔 부족했지만 이 장면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감독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밸런스도 무너져있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아 어정쩡했다. 하지만 최근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있나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었다.


최근 한국 영화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부분은 투자 기획사의 능력이 출중해지다 보니 제작과정에서의 리스크를 잘 컨트롤 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찍었던 장선우처럼) 사고 칠 것 같은 감독을 잘 거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개성 있는 이상한 영화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느껴지는 개인의 취향, 반항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 이상한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만들었던 장준환 감독이 성숙하고 유려한 근작 〈1987〉에서 개인의 취향을 드러낸 것은 겨우 이한열을 ‘강동원’에게 맡긴 것이다. 능란하고 성숙하고 균형 잡힌 방향 말고는 시스템이 열려 있지 않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 영화에서 연기가 어색했던 이유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감독은 마약범에 대한 추적 형사극과 폭발하는 미친놈을 그림으로써 보통의 주류상업영화처럼 보이게 만들어 이 작품을 성사시켰을 것이다(여담이지만 한 친구와 여관방에서 〈페스티발〉을 보았는데 그 친구는 감독이 설득의 대가라고 이야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연기를 배우들에게 설득해서 찍게 했냐고).


하지만 그러다 보니 태생적으로 정말 미친 영화를 만들 수 없었고, 그렇기에 미친놈들의 연기도 그를 잡으려 미쳐가는 형사들도 완전히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어정쩡함은 사실 한국 영화 시스템의 공고함을 그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기어이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이상한 취향을 드러내는 감독에게 나는 지지를 보내고 싶다. 나는 이 영화가 결과적으로 꽤 통쾌했다. 그래서인지 집에 돌아와 스즈키 세이준의 〈유메지〉를 보기 시작했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말도 안 되게 변태같은 영화였다. 감독이 원한 것도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와 로망이 시스템 속에서 같이 하길.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