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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신체로 느끼는 것이 가치를 만든다

조회수 2018. 5. 29. 15: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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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머리로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
몸은 단지 마음을 싣고 다니는 도구가 아니다. 그 자체로 완벽한 지성을 갖고 있다. 몸은 마음이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살면 좋은지 속삭여준다. 때로는 삶을 더 단순하고 가볍게 만들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인문학을 공부할 때 느끼는 헛헛한 지점, 실은 매우 중요한 몇 퍼센트의 앎을 삶 속에서 일깨워준다.

몸을 자꾸 잊으라고 권하는 사회에 저항하고 싶다. 몸을 삶으로 더 가까이 데려오고 싶다.

몸이 부드러워지면 마음도 부드럽게 바뀐다. 내가 부드러워지면 세상도 부드럽게 다가온다. 이는 새로운 언어가 아니다. 단지 잊었거나 삶의 어느 시점에서 놓친, 몸이 건네 왔던 말들이다.

『마음이 헤맬 때 몸이 하는 말들』(디아, 웨일북)의 머리말에 나오는 이야기다. 앞으로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신체로 느끼는 것이 가치를 만든다”는 주장이 나온다. 인간이 지능지수(IQ)가 1만인 인공지능을 이겨낼 수 없다. 정보의 저장, 보관, 이동 등은 인공지능이란 비서를 활용하고 인간이 잘할 수 있는 능력만 잘 활용해야만 한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컴퓨터는 스스로 삭제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핵심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잊는 능력, 달리 말하면 ‘편집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편집력은 저절로 키워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책을 읽으며 서평을 쓴 이들은 저절로 터득한다.


책을 읽으려면 오래 앉아야 한다. 나는 일주일에 무조건 20여 권을 읽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온몸으로 읽었다. 물구나무 자세만 제외하고 모든 자세로 읽어야 했다. 그러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이겨내지 못한다. 


인간의 최대 장점은 ‘신체성’이라는 말이 있다. 산을 오를 때 헬리콥터로 산 정상에 오르면 산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힘겹게 수많은 산의 고개를 헐떡대며 넘어야 진정한 산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책을 읽는 것 또한 그렇다. 우리가 검색으로 정답을 찾는 일만 계속하다 보면 결국 지적 무뇌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사회는 모든 면에서 우리를 편리하게 만든다. 하지만 편리함이 오히려 우리를 죽이고 있다.


나는 늘 새벽에 일어나 무조건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 자꾸 게을러진다. 게으름의 핑계는 ‘피곤한 몸’이다. 책이 좀 팔리면서 두려움이 조금씩 걷혀나가니 몸이 피곤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다. 사람이 평생 벌어서 좀 살 만하면 몸이 견디지 못해 목숨을 잃는다는데 내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나의 피곤함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몸의 상태가 나빠져서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몸-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바로 ‘몸이 그저 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신호’라는 부분이다.

보통은 욕구에 차 있거나 고통스러울 때 몸을 인지한다. 누구나 아프면 아파하고, 생리적 욕구에 바로 반응하고 산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아픔이나 욕구를 표현하는 이상의 존재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행복을 꿈꾸는지 표현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몸이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신호’라는 말이 아닐까?

몸의 표현이라고 하면 질병이나 호르몬의 변화 정도만 생각하기 쉽다. 그 차원에서만 읽어내면 몸이 정서적, 심미적 표현을 놓칠 수 있다.

몸이 원하는 소박한 행복은 무엇일까? 몸이 나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어 하는 건 무엇일까? 몸이라는 텍스트는 언제나 말을 건넸고, 또 이 순간에도 건네고 있다. 몸은 내 경험들을 기록하는 동시에, 지금 살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킨다. 어쩌면 우리는 자아 찾기를 추상적 개념 속에서 해온 건 아닐까? 몸의 감각이 알려주는 방향은 어디일까?

10여 년 전에 〈전무후무〉란 춤 공연을 본 적이 있다. 6분 출연자의 평균연령이 80이 넘어서 화제가 됐는데 그중 한 분은 지팡이를 짚고 걷기도 어려웠는데 장단이 나오자 학처럼 춤을 췄다. 그 장면은 보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머리로 춤을 춘 것이 아니라 몸의 기억으로 춤을 춘 것일까? 내 몸이 기억하는 기억은 무엇일까? 


친구들이 하나둘 쓰러지니 나도 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는 내 또래가 같은 일을 했는데 그는 많이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나는 건강한 것이구나, 하는 착각이 아니었을까? 하여튼 내 몸을 누군가에게 의탁해 상태를 점검해보고 싶지만 병원에는 가고 싶지가 않다. 대신 술은 무조건 줄이고 있다. 하여튼 요즘 몸이 내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에 따라 잠을 좀 늘리고는 있지만 잠을 많이 자는 주말에는 더 피곤한 이유를 모르겠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한번은 100킬로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11시간 42분 만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런데 그는 이 대회에서 75킬로미터를 지나면서 묘한 심리 상태를 겪었다. 피로감이 사라지면서 생각이 텅 비었다.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기운을 느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진 생각이 중요하지 않구나 하는 고요한 경지를 체험했다.

[…] 하루키는 ‘나라는 의식이 별로 대단한 건 아니’라고 느꼈다. 달리다 보니 나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순간에 ‘나’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옥 밖을 나와 하늘도 보고 바람 냄새도 맡았다. 그 순간 여행자가 되었다. 물론 달리기가 끝나고 다시 나라는 감옥으로 잰걸음으로 걸어 들어갈지라도.

그러나 감옥 밖을 자주 나와 본다면, 감옥에 갇혀 있구나 하고 알고 있다면, 조금은 달라질지 모른다. 나중에는 완전히 감옥에서 나오는 법을 터득할지도 모른다. 이 해방감을 맛보려고 마라토너는 길 위에, 요기는 매트 위에, 화가는 캔버스 앞에, 농부는 땅을 밟고 선다. 또 누군가는 그저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 순간에 붙일 이름 따위는 필요 없지만, 만약 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곧 ‘자유’가 아닐까?

나는 과거에 산에 오르는 것으로 신체검사를 대신했다. 새벽에 출발해 해질 무렵까지 산을 탔다. 그걸 이겨내면 나는 건강한 것으로 치부했다. 곧 그런 일을 다시 해볼 생각이다. 종일 걷고 며칠을 누워 지낼 수밖에 없을지라도 해보고 싶다. 아니면 단식을 보름 정도 해보고 싶다. 그런 일이 하루키의 ‘마라톤’이 아닐까?

늘 몸을 혹사해왔다. 그래서인지 좋았던 때를 자주 떠올린다. 오십 줄에 접어들면서 8개월 동안 하루 두세 시간만 자면서 매주 20여 권의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만행만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직도 청년의 몸을 지녔을지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잊고 있던 몸을 되찾으면, 분명 마음도 보드라워질 거예요.”라고 나를 유혹한다. 


그건 알겠는데, ‘잊고 있던 몸을 되찾’을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리 걸어도 체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어디 공사판에 가서 한 달 동안이라도 일을 해보고 싶다. 그런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 그걸 좀 알려주실 분은 없으신지!


원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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