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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디어를 꿰뚫은 여자, 서초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전파하다: 서초구청장 후보 이정근 인터뷰

조회수 2018. 5. 25. 17: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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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으로, 불 같은 추진력으로, 여러 분야를 설립하는 이정근이 되겠다는 약속

리: 어쩌다 선거에 나와 고생을 하고 계신거죠?


이정근: 고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즐기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는데, 제가 실제로 느껴요.


리: 굉장히 준비된 멘트 같아요.


이정근: (웃음) 그렇게 느끼세요? 사실 준비란 걸 할 시간이 없었어요. 준비기간 없이 정치에 들어왔는데요. 2016년 3월 인재영입 대상으로서 전략공천되어 서초 갑에 출마하게 됩니다.

당시의 모습. 캐치프레이즈가 지금과 사뭇 다르다.

리: 전략공천을 받을 정도로 능력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서초면 떨어지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정근: 그때 당시 새누리당에선 이혜훈과 조윤선이 치열하게 경선중이었어요. 여성 두 분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니, 중도 보수적인 이미지의 전문직 여성을 찾아 각을 맞춰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죠. 제가 마침 서초에 사는 방송인이고, 저도 재미있는 실험, 경험일 수 있겠다 했어요. 떨어질 것이라거나 어려울 거란 생각은 없었고,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리: 하고 싶은 일이라 하셨지만, 그 전에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도전하지 않으셨어요.


이정근: 없었어요. 제가 생활정치에 도전한 건 이게 처음이죠. 다만 DJ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때도 캠프에 자원봉사로 참여했고, 2012년 문재인 담쟁이 캠프에도 참여했어요. DJ 캠프는 처음부터 가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선배가 글을 좀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DJ 선생님이면 무조건 가야죠” 해서 갔던 거고요. 제가 새로운 걸 경험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에요.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와 문재인 후보 때도 제의가 있어서 갔던 거고요.


리: 언제가 제일 재미있으셨어요?


이정근: DJ 캠프 때가 재미있었죠. 대선 캠프를 처음 경험하던 때였으니까요. 제가 그때 방송작가를 하고 있었는데, 캠프에서도 후보 보조연설을 기획하고, 취재하고, 원고를 쓰고 방송을 돕는 등 멀티플레이어 역할을 했어요.


리: 97년과 2002년에는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이정근: 2002년엔 남북경제협력위원회라고, 별도의 분과에서 활동했어요. 모여서 토론도 하고, 정책도 제안했죠. 기획에 가까운 일을 했고요. 2012년 대선 때는 상근을 했어요. 97년엔 신선한 경험에서 재미를 느꼈다면, 2012년엔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절박한 사명감이 있었어요. 나라다운 나라란 캐치프레이즈가 나오기도 전이지만, 문재인이란 개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이 대선은 이겨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죠.


리: 이번 정권 교체가 이뤄지기 전의, 두 정부는 어떤 점에서 마음에 안 드셨던 거예요? 본인의 일과는 별 상관이 없지 않았나요?


이정근: 제 일은 물론, 제 삶에 상관이 있었던 건 아니죠. 서초가 그리 래디컬한 지역은 아니다 보니, 알게 모르게 젖어 있던 것도 있고요. 오히려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낀 게 그런 부분이고요. 문재인 개인이 가진 인간성이 있었어요. 제가 시민 캠프 여성가족네트워크 공동대표를 하고 있었는데, 여러 타운홀 미팅을 기획하게 됩니다.


개중 ‘미래의 아이를 만난다’고 해서, 임산부들을 대상으로 타운홀 미팅을 했어요. 그때 제가 사회를 봤는데요, 나름 대본을 썼어요. 그런데 후보가 그 대본을 따르지 않더라고요. 짜고치는 고스톱에 능하지 않다는 게 느껴졌어요.


리: 그 중에서 인상적인 답변이 있었나요?


이정근: 중국에 ‘손만 잡고 자도 아기가 생긴다’고 믿고 계속 손만 잡고 잔 부부가 있다, 이걸 O/X 퀴즈로 냈어요.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 있겠냐는 식으로 답변을 하도록 대본을 짜 드렸는데, 문재인 대통령께서 “저도 남잡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적당히 자기를 포장하고 타협하는 게 없으셨어요.


리: 사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달변이 아니잖아요. 써 주면서 답답하진 않았나요?


이정근: 전 오히려 인간미를 느꼈어요. 제가 덕(德)이란 글자를 좋아해요. 덕장이 필요한 지금 순간에, 이분의 덕이야말로 우리에게 행복을 주겠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도 정말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갖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또 문재인 대통령은 본인을 돕는 분들께 하대를 한 번도 하지 않는다고 해요.


리: 그렇지만, 2012년엔 낙선했어요.


이정근: 아팠어요. 몸살을 굉장히 오래 앓았습니다. 석 달 정도 가더라고요. 그때 캠프에 있던 친구들이 대부분 그랬어요.



서초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심는 정책이 필요하다


리: 그리고 아픔을 떨쳐 일어나, 2016년에 연락을 받게 되시는 건가요? 그 전에는 다른 활동은 하지 않으셨어요?


이정근: 안 했어요. 저는 당원으로서 활동하던 것도 아니었고요. 내가 대표 선수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거든요. 저는 MC가 아니라 작가니까. 작가들은 대체로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향도 아니에요. 사실 저는 굉장히 독특한 케이스죠, 방송작가 중 국회의원에 도전한 건 아마도 제가 처음이 아닐까요?


2016년 중앙당에서 국회의원 출마 제안이 왔을 때 응했던 단초가 2012년에 있었어요. 그때 제가 시민캠프에 있으면서, 노란 스카프에 담쟁이 모자를 쓰고 투표 독려 피켓을 들고 동네를 돌았어요. 사람들이 다들 절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한 분이 핫팩과 베지밀을 주시면서 “저도 응원합니다”라고 속삭이시더라고요. 왜 속삭이시냐고 물어보는데, “이 동네에서 먹고 살려면 이럴 수밖에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심지어 전라도 해남 출신이다, 이런 말만 해도 힘들다고.


리: 사실 의원이란 중앙을 위해 입법활동을 하잖아요? 이를 위한 전문성이 중요한데, 내가 정말 의원이 되어도 될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이정근: 말씀하신 것처럼 입법활동을 위해선 보통 전문 직능에서 많이 오죠. 저 스스로를 평가할 때, 제가 기획력이나 추진력은 상당히 탁월하더라고요. 그럼 전문적인 입법활동에 뭘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정책집을 만들었는데, 두 가지를 넣었어요.


하나는 인성교육이었어요. 제가 전문 교육자는 아니지만, 인성교육 기획자거든요. 서초가 마음이 허한 동네에요. 빛과 그림자가 극명한 곳이더라고요. 넓은 평수의 고층 아파트, 우아한 외식, 외국 유학… 하지만 마음의 밭이 기름지지 않아요. 나눌 줄도 알아야 하고, 경쟁에서 페어플레이를 해야 하는데요. 마음의 근육도 튼튼하지 않아요.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는 유연성이 없더라고요.


리: 음…


이정근: 서초에서 교육 정책을 1번으로 얘기했는데, 서초구에서도 초등학교 시설이 굉장히 열악하더라고요. 부지가 워낙 작다거나, 학교가 오래됐다거나, 학생 수가 줄어든다거나 하는 태생적 한계는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내부 시설도 열악했어요. 적어도 서초에서만큼은 학교 시설이나 학교 보안, 교육시스템은 갖춰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생애주기별 인성교육에 따르면, 초등학교 때까지의 아이들에겐 ‘호연지기’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다리를 튼튼하게 해 주는 거죠. 운동장에 나가서 뛰어 놀고, 마음의 지평을 넓혀 주는 것. 스포츠를 통해 패자와 승자를 배우는 것. 패자에게도 패자부활전이 있다는 걸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거에요. 지덕체 중 중요한 게 체다, 그래서 서초의 체육구청장이 되어 1인 1체육을 보급하고자 해요. 이게 생애주기별 인성교육에 들어있는 거죠.

애들 앞에서 운동실력을 자랑하는… 아니 시범을 보이는 이정근 후보

리: 사실 국회의원은 결국 이를 제도로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관건인데요.


이정근: 전 서초의 모범이 잘 살고, 인프라가 좋고, 아파트가 비싼 게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생애주기별 인성교육을 해야 한다는 거에요. 강의실에서 할 수 있는 교육이 있는가 하면,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교육도 있죠. 요즘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먹기 전에 반찬 홀라당 다 먹어버린다고 혼내면 말 안 들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게, 각자 국그릇이든 좋아하는 반찬이든 하나씩 들고 건배를 하는 거예요.

잘 상상이 안 되지만 국그릇으로 대체해보자 (…)

리: 그게 잘 이루어질까요?


이정근: 놀이처럼 만들면 아이들은 정말 좋아해요.


리: 반응이 어떻던가요?


이정근: 인성교육이라고 하면, 반응이 다들 ‘고리타분하다’며 회의적이에요. 하지만 제가 가진 강점 중 하나가, 상대방을 잘 설득해요. 대중적으로 강의도 잘 하고요. 그런 걸 통해서 제가 속한 집단부터 호응을 이끌어가고자 해요. 대중적으로 연설을 할 순 없으니까, 이런 인터뷰와 같은 개별적인 기회를 통해서 계속 말하는 거죠. 아이들에게 호연지기를 키워주고 싶습니다, 체육구청장이 되고 싶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서초를 만들고 싶습니다, 1대 1 꿈나무 후원을 하는 제도를 만들고 싶습니다…


리: 1대 1 꿈나무 후원이란 어떤 건가요?


이정근: 지난 동계올림픽에서 컬링이나 스켈레톤처럼 뛰어난 성취를 거둔 종목이 있었잖아요? 1대 1 바우처든, 후원이든 서초 무슨 초등학교 어떤 운동부에 단돈 만 원씩이라도 후원을 해 주는 거에요.


리: 스포츠 뿐 아니라 다양한 예능 분야에도 연관될 수 있겠군요?


이정근: 예능도 가능하겠고요. 그 아이가 수학 영재다, 그럼 여기에 대해서도 꿈나무 지원을 할 수 있겠죠. 서초에 사는 사람이 진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의 부자가 될 수 있도록, 봉사하고 나누도록 하는 거예요.



여성으로서 정치를 한다는 것


리: 후보님도 자원봉사를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본인이 이건 정말 뿌듯했다고 생각하는 봉사활동이 있었나요?


이정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로타리 봉사고, 하나는 걸스카우트 봉사에요. 걸스카우트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학생 때도 하고, 사회에 나온 후 중앙연맹 이사로 지도자도 했어요. 정치를 하면서 기본 철학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거기서 구축됐다고 생각해요. 걸스카우트의 모토는 ‘소녀와 젊은 여성을 위해, 그들의 리더십을 키워 글로벌 국제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돕는다’ 는 것인데요. 이게 정말 제 사명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소녀와 젊은 여성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약자에요.


리: 후보자님이 일반적으로 볼 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여겨질 텐데, 여성으로서 차별받았다고 생각하시는 포인트는 어떤 게 있으셨나요?


이정근: 기자, 방송작가, 대학교수 등 전문직을 많이 밟아왔고, 운 좋게도 눈에 띄는 차별은 없었던 것 같아요.


리: 기자, 교수 같은 경우는 성비가 매우 왜곡된 직종이잖아요.


이정근: 방송작가는 90%가 여성이에요. PD는 90%가 남자고요. PD와 작가를 종속 관계로 볼 수도 있겠지만, PD는 회사 소속이고 작가는 프리랜서라 그렇게 보긴 어려워요. 또 작가가 전체 기획을 이끌어 나간다는 점에서 볼 때 거기에서 성차별이 발생할 여지는 적어요. 또 기자도 여성지 ‘여원’에서 했기 때문에… 결국 정말 운 좋은 케이스인 거죠.


그런데 정치를 시작하면서 성차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느꼈지요. 저는 재작년 인재영입 때 처음 입당을 했기 때문에, 당내에 계파도 없었죠. 여성으로서 발붙이고 활동하기가 굉장히 낯설고 힘든 곳이더라고요.


리: 지방선거 인터뷰를 하며 여성 후보자는 처음 뵙는 건데요. 특히 지방선거에선 여성 후보자가 적어요. 총선에서는 밀어주는 제도라도 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이정근: 여성 정치인이 조직이나 계파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요. 동창회, 군대, 향우회 같은 조직이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데, 여성이 여기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어요. 남성은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순간 이미 가지고 있는 그물망 같은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지만, 여성은 동네 목욕탕, 미용실, 수다방 같은 게 전부거든요. 그러니 30%, 50% 쿼터를 주고 육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그런 게 지금은 없는 거예요.


리: 서초구의 교육 수준은 굉장히 높은데요. 대기업 공채를 보면 여성 비율이 20%가 안 돼요. 사실 성적은 비슷하잖아요. 구 차원에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이정근: 양재동 R&CD 지구가 첫 테이프도 끊었는데요. 전 이걸 4차산업혁명 지구로 육성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에 청년 센터를 만들어, 해외 유학생이 거기에서 일할 수 있도록, 1인 스타트업 클러스터 같은 것도 만들어보고 싶고요. 청년 아파트 같은 것도 가능하다고 봐요. 반포천 쪽을 활용하거나, 반포 4동 정보사터널 쪽 소형 빌라촌도 재구성해 볼 수 있을 테고요.


리: 공공임대 공약이 나올 때마다 비판이, 왜 이렇게 비싼 곳에 짓느냐, 외곽에 지어 싸게 임대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건데요.


이정근: 저 지역들은 이미 소형 빌라가 들어서 있어요. 여기가 언덕배기라 노인은 물론 차도 올라가기 힘든 지역이에요. 여길 남해 독일마을 같은 지구로 재구성하는 거죠. 사실 청년들은 뛰어서도 올라갈 수 있어요. 또, 반포 1동 쪽도 가면 원룸 다세대가 굉장히 많아요. 강남도 마찬가지고요. 반포천 복개천 위에 스포츠센터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많은데요. 그 위에 청년 주택을 값싸게 만드는 식으로. 다만 아직 완성된 공약은 아니에요.


리: 음…


이정근: 청년 공약은 두 개에요. 청년 스타트업 지원하는 것. 실제로 있는 기업, 양재 R&CD 입주기업과 아웃소싱 형태로 매칭시키는 거에요. 원스톱으로 R&CD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또 한 가지는 청년 주택인데요. 어느 지역이나 집값 떨어진다며 반대하는데, 우상호 의원이 남영역 위에 청년주택을 짓는 좋은 안을 냈죠. 저는 민달팽이유니온 대표와도 친해서, 서초 어디가 적당할지 논의하곤 해요. 서초의 다양한 공약을 검토해봤는데, 청년을 위한 공약이 없었어요. 그 틈새가 양재 R&CD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사회적 주택’의 공급 및 관리를 맡고 있는 민달팽이 유니온.

리: 지역 내에서 소득이 떨어지는 곳을 위한 대책은 어떤 게 있을까요?


이정근: 서초구를 권역별로 나누면, 반포지구, 방배권역, 양재권역, 서초권역 이런 식으로 나누거든요. 권역별로 특장점이 다 있어서, 권역별 맞춤형 개발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리: 기존엔 지역 선거하면 개발 이슈가 많았는데, 이번엔 문화, 환경, 교육 공약이 많았어요. 환경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정근: 환경 문제가 두 가지가 있잖아요? 대기, 녹지 등을 뜻하는 ‘환경’이 있고, 교통, 입지, 섹터를 말하는 ‘환경’이 있죠. 서초는 이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어요. 재개발 지구가 엄청 많아요. 보통 환경정책이라고 하면 전자를 말하는데, 우리도 전자에 대해 자유롭지 못해요. 특히 경부고속도로 인근의 매연, 분진은 말할 수가 없죠. 경부고속도로 지하화를 해야 합니다.


리: 모두가 외쳤지만 할 수 없었던 공약이에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정근: 서울시 전체를 놓고 거시적 관점에서 추진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데, 경부고속도로 지하화가 그래요. 이건 국토개발계획이에요. 서초구에서 추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반장이 화장실을 옮기겠다고 공약하는 셈이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말만 하고 못 했어요. 박원순 시장과, 국토부와 조속히 추진할 수 있도록 협상하겠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라고 봐요. 이걸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밖에 없다고 봐요. 힘 있는 집권 여당, 박원순과도 친하고, 협상 잘 하는. 교통 문제, 분진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죠.

독일 함부르크는 실제로 아우토반을 지하화하고 그 위에 주택지를 조성했다.



잘 나가던 작가 생활: 우리나라 미디어의 중심부를 꿰뚫다


리: 어디서 태어나셨어요?


이정근: 전라북도 군산. 군산상고 바로 옆이었어요. 군산상고 야구부가 아주 유명했는데, 그 야구부를 보면서 자랐어요. 저 어릴 때는 과일을 도매상에서 접으로 사다 먹었어요. 그렇게 산 과일을 담벼락 너머에서 선수들을 불러 건네 주고, 그 선수들이 집에 점심 때 와서 밥도 먹고.


리: 초등학교부터 거기서 다니신 거예요?


이정근: 군산 금강국민학교를 다녔다가, 학교가 분교되어 문화국민학교가 만들어져서 거기로 왔어요. 윤택한 어린 시절을 보냈죠. 경제적으로가 아니라, 하고 싶은 걸 마음껏 지원받았던 것 같아요. 밴드부 활동도 하고, 고전 읽기 경시대회도 하고, 지금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게, 때마다 한복 입고 학교도 가고. 태권도, 탁구도 했고. 가장 풍요로운 국민학교 시절을 보낸 것 같아요.


리: 중학교 때는 그게 끝났나요?


이정근: 끝났어요. 중학교 때는 영광여중을 들어갔는데, 저 때는 멜볼딘이라고 했어요. 그게 선교사 이름 ‘메리 볼드윈’을 한글로 쓴 거에요. 선교사가 만든 학교다 보니 미션스쿨이었거든요. 교목이 어느날 저한테 ‘뭘 하고 싶니’ 하고 물어보더라고요. 제가 ‘글을 쓰고 싶습니다’라고 했는데, ‘성경을 한 번만 필사하면 글을 잘 쓸 테고, 세 번만 필사하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제가 중3 때 한 권을 다 필사했고, 이제껏 세 번 필사를 다 했어요.

이 두꺼운 걸 어떻게 3번이나…

리: 고등학교 땐 별 일이 없었나요?


이정근: 책 많이 읽고, 경시대회나 백일장 대회에 많이 나갔죠. 학력고사 보고 원광대학교에 들어갔죠. 대학 졸업 후에는 ‘여원’이란 잡지에서 기자생활을 했어요. 그때는 ‘주부생활’과 ‘여원’ 두 개 여성지가 양대 산맥이었고, 스포츠신문도 없던 시절이라 모든 연예계 가십을 여성지에서 다루던 시절이에요. 월 8만~15만 부가 나갔죠.

헤드라인만 봐도 꿀리지 않는 핫한 스캔들이 많다(…)

리: 사회 초년생으로서 잘 나가는 잡지사에 들어간 게 뿌듯하지 않으셨어요?


이정근: 그 전에 신문사 시험도 많이 봤는데, 떨어졌어요. 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보니, 호남, 여성, 지방대, 3대 약점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 ‘여원’ 시험을 봤는데, 사장님이 절 부르더니, “네 눈빛이 뭔가를 해낼 눈빛이라 뽑았다. 그런데 잡지사는 다 인맥 싸움이다. 너는 서울 사람이 아니라 그게 없으니, 2배, 3배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이후로 워커홀릭이 됐어요.


주말에 남산 도서관에 가서 신문, 잡지를 섭렵했죠. 그때 시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잡지잖아요. 세계를 주름잡는 고급 브랜드, 세계 지도자의 라이프 스타일, 이런 걸 보아왔으니까요. 그러다 방송 작가로 공채를 봐서 옮겼어요.

정말 눈빛이 강렬하다 (…)

리: 옮기시게 된 이유가 있나요?


이정근: 이제 인쇄매체의 시대는 끝났다, 방송매체의 시대라는 게 있었죠. 우리 잡지사에 방송작가가 아르바이트로 왔는데, 우리가 원고지를 쓰던 시절에 워드프로세서 기계를 쓰는 거예요. 방송에 나오는 대사나 지문을 다 쓰고 있는 게 무척 재미있어 보였어요. 전 그때 탐사 프로그램이 하고 싶었어요. 내셔널 지오그래피 릴 테이프를 구해서 영사관에서 보고 그랬거든요.


MBC 공채 3기로 들어갔어요. 10명을 뽑아서 1년 전속을 했는데, 1년 지나고 나니 4명 남았어요. 한 달 정도 작가 연수를 받은 뒤, 기자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PD 수첩에 배정을 해 주는 거예요. PD 수첩이 아직 안 만들어져 있던 상황인데, 거기 구조가 메인작가와 자료조사만 있는 시스템이라, 자료조사를 맡았어요.


첫 방송이 ‘피코 아줌마, 열받았다’에요. 다국적 기업인데, 아줌마들 월급을 안 주고 철수해버린 거예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애환을 다루었죠. 나중에 누가, 당시 영상이 유튜브에 돌아다닌다며 ‘자료조사: 이정근’이라고 써 있는 캡쳐를 주더라고요. 그 후 곧바로 메인작가가 되었고, ‘글: 이정근’이라는 자막이 나가게 되었죠.


리: 감개무량했겠네요.


이정근: 당시 CP가 신입 작가들을 교육시켰던 분인데, 근성이 있어 보인다고 저에게 나름 기대를 하고 계셨어요. 제 눈이 좀 매섭게 생겼나봐요.


리: 메인 작가가 되니 어떠셨어요?


이정근: 매우 복잡다단(?)한 삶을 살기 시작했죠.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고 누리는 생활이었는데, 여전히 워커홀릭이었어요.


리: 정말 오랫동안 즐기셨네요(…)


이정근: (박장대소) 예리하네요. 메인 작가로 그야말로 날렸죠. PD수첩을 하고 있는데, 다른 PD들이 계속 연락이 와요. MBC를 하고 있다 보니, KBS나 EBS 같은 다른 방송사도 하고 싶고, 그때 막 케이블 방송사도 생기기 시작했어요. 케이블에선 제가 거의 CP급 작가인 거예요. 프로그램을 다섯 개씩 했어요.


리: 그럼 프로덕션 식으로, 새끼작가도 키우면서 하신 거예요?


이정근: 아니요, 그냥 혼자 한 거예요. 물론 프로그램 소속의 보조작가와 자료조사는 있었지만요. 인간극장도 했고, 환경 스페셜도 메이킹 작업을 했고요. 하나뿐인 지구라는 환경 프로그램을 또 오래 했어요. EBS는 오래 했는데, 너무 편한 거예요. 타 방송사는 바로 시청률 표가 올라와요. 숨이 막혀요. 그런데 EBS 하나뿐인 지구를, 처음에는 땜빵을 하러 갔는데, 방송 후 아무도 전화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청률이 얼마냐고 물어봤는데, 모른대요. 다만 오래 하니까 심심해서 못 하겠지 싶더라고요.


리: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정근: EBS에서 특집 다큐멘터리를 많이 했어요. 지금도 굉장히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에요. 괭이갈매기, 노랑부리백로, 치마버섯, 대나무, 호랑이, 지리산 반달곰 등을 다루는 환경 다큐멘터리를 했거든요. 치마버섯을 미소촬영하는데, 버섯이 치마처럼 펼쳐지는 모습이 너무 예뻐요. 촬영을 하러 저도 현장으로 갔어요. 씻지도 못하고 기다리고… 그땐 그린 도트라고 해서 독일에서 시작된 환경 마크가 만들어졌는데, 그걸 취재하러 유럽에 갔었거든요. 그때 유럽의 환경 정책을 접했는데, 굉장히 좋았어요.

예… 예상외로 예쁜 버섯이다

리: 그동안 생활 환경이 계속 변하셨겠어요.


이정근: 84년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20분을 넘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84번을 타고 20분을 가서 내렸는데, 그게 성신여대 태극당 앞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살다가, 88년 방송국에 들어가면서 89년 강남으로 넘어왔죠. 서초 지금 사는 집에는 2002년.


리: 한 10년은, 계속 바쁘고 잘 나가셨던 건가요?


이정근: 그런 편이죠. 물론 따지자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도 많았겠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려고 훈련을 하는 편이에요. 지난 20여일, 공천 끝나고 난 이후에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어요. 공천이 끝난 뒤 몰려오는 후유증 때문에.


2005년에 저를 포함해 세 사람이 공동으로 영상을 제작하는 프로덕션을 창업을 했었어요. ‘저녁의 게임’이란 영화를 만들었는데, 유바리, 모스크바 영화제 등에 나가는 성취를 거두었죠. 우리 세 사람이 영상 시대의 감독이고, 프로듀서고, 작가인데, 청소년들이 소설을 안 읽으니, 이걸 영화로 만들자 해서 ‘문학 백선’이라고 제목까지 정했어요. 감독 스무 명을 리스트업해서 다섯 편 씩을, 재능기부로 최저의 제작비로 EBS에 방송하고,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보게 하자.


제가 백 군데는 다니면서 임권택 감독 승낙까지 얻고 했는데, 결국 스폰서를 못 구했어요. 그때 문화부 장관까지 만났었는데, 그 분이 저를 문재인 대통령께 소개를 해 주셨던 거예요.

해당 영화의 포스터. 무섭...

리: 결과적으로 그 회사는 약간 흐지부지 된 건가요?


이정근: 아직까지 건강하게 운영은 하고 있는데, 그 ‘문학 백선’이라는 프로젝트는 아직도 미완인 상태로 있는 거죠.



사회생활, 직업에 대한 ‘애환의 가격’이 다르다


리: 방송계가 여성이 일하기 피곤한 업계란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이정근: 여자라서 피곤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별로 없어요. 아침에 회의를 할 때도, 자판기 커피를 꼭 남자 기자가 뽑아왔어요.


이런 건 있었어요. 제가 성격이 가리고 감추는 게 별로 없어요, 푼수 기질이 있어서요. 작가는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일주일을 꼬박 바치는 거예요. 그런데 연예인들은 볼펜 하나 들고 와서, 쉼표 찍고 리허설만 하는데도 훨씬 많은 돈을 받는 거예요.


그게 처음에는 너무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뭐지? 왜 직업적인 편차가 이렇게 생기는거지?’ 이게 방송국에 들어가서 얻은 첫 고민이었어요. 그걸 ‘직업에 대한 애환의 가격이 다르다’고 생각해 풀었어요. 받은 돈만큼의 애환을 안아야 되더라고요.


리: 막내작가들 보면 불쌍하지 않습니까?


이정근: 맞아요. 사실 서초구 지역위원장을 하면서도 똑같구나, 라는 생각을 해요. 꿈을 가지고 버티는 거죠. 물론 그때와 지금 삶의 단계는 달라요. 하지만 원외지역위원장으로서 불모지에 싹을 틔우기 위해 경험하는 고통은 똑같다는 거죠.

출처: ㅍㅍㅅㅅ
실제 ㅍㅍㅅㅅ에서도 이런 기사가 실린 적 있다.

리: 방송사에서 보조작가를 더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청년 문제와도 연결이 많이 되는 것 같은데요.


이정근: 해요. 전 지금도 외주제작사 독립성을 위한 활동을 같이 하고 있어요. 작가들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죠. 외주제작사를 보면 1인 프로덕션이 많아요. 그런데, 방송작가를 하면서 만난 다양한 직업군의 청년들에 비하면 방송작가는 차라리 상황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치킨집 아르바이트생, 주차 아르바이트생, 마트 계산원… 제가 지나온 길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 똑같이 라면을 먹어도 좋은 환경에서 라면을 먹는 게 방송작가가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한 운동을 계속하는 단체도 등장했다. 아닐까 싶어서요.


물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순 있겠죠. 프리랜서다 보니 은행에서도 대출이 안 되고요. 원천징수 코드도 없고, 재직증명서도 안 나올 정도니까요. 그러다가 나중에 방송작가협회가 만들어지고, 여기에서 재직증명서를 발급해주기 시작한 거에요. 원고료 협상도 하고, 처우도 개선하고. 김수현 작가가 이사장을 맡으면서 많이 싸워줬어요.

출처: 방송작가유니온 페이스북
방송작가가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한 운동을 계속하는 단체도 등장했다.

리: 드라마 작가 해 볼 생각은 없으셨어요?


이정근: 어릴 때 저를 스스로 평가한 게, 감성보단 이성적인 인간이다. 가공을 하고 상상을 해서 추정해내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있는 사실을 나열하고 정리 전달하는 게 맞다고 규정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열정으로, 불 같은 추진력으로, 여러 분야를 섭렵하는 이정근이 되겠다는 약속


리: 서초구에선 그 재능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이정근: 방송작가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했고, 봉사활동을 했어요. 이 멀티펑션이 정치하는 데 도움이 많이 돼요. 예를 들어 걸스카우트 활동은 학교, 청소년 교육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었죠. 기자활동을 오래 했던 것은, 사람을 만났을 때 소통하고 그가 원하는 걸 알아내는 훈련이 되었고요. 스포츠를 오래 한 것은 지구력에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또 다양한 활동을 하다보니, 인맥이 엄청나다는 것. 제가 정치신인임에도 많은 의원들이 출판기념회에 와 주고 계시고요.


리: 마트 이야기 하셨는데요, 경력단절여성이 많잖아요. 그런데 강남3구는 경력단절여성도 교육수준 등이 높은 경우가 많은데, 그분들께 새로운 기회를 줄 계획 같은 게 있으신가요?


이정근: 여기 반포 자이라고 멋있는 아파트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 자가주거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아요. 그렇게 돈이 많은 사람들만 사는 건 아니에요. 제 공약 중에 공유사무실을 구에서 운영하는 게 있어요. 우리가 개발해야 하는 부지가 많아요. 거기 공공기여 받은 것의 일부를 은퇴 세대, 경력 단절 여성들의 재취업을 위한 공유사무실으로 공동 교육, 회계, 마케팅, 세무 서비스 공간으로 운영을 하려고 해요.


리: 강남 공유사무실 공간에도 나이 많으신 분들이 많이 와요.


이정근: 노인이 은퇴하고 나면 돈이 많아도 초라함을 느끼곤 해요. 그런데 시멘트 바닥에 대충 만들면 더 쓸쓸함을 느끼거든요. 카페처럼 커뮤니티 공간도 만들고, 방도 고급스럽게 잘 해서 입주시킬 생각이에요.


리: 상대 후보가 강력한 현 구청장이에요. 비교해서 어떤 점에서 경쟁력 있다고 생각하세요? 시정이든 구정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조금 다르기 마련인데요.


이정근: 처음은 누구나 다 있어요. 저도 4년 후에는 익숙해지겠죠. 똑같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비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저만큼 어떤 일을 열정적으로, 추진력 갖고 실천해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이건 대한민국에 최고인 것 같아요.


리: 남편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정근: 좋아해요.


리: 집에 안 들어와서?


이정근: 네.


리: 남편은 뭐 하는 분이에요?


이정근: 강의를 하는 분이에요. 97년 DJ 선거캠프를 도운 뒤 청와대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때 남편이 안 가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그거에 대해 남편이 미안한 마음을 좀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선캠프를 지원하는 데 대해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이 안 되는 지역에 공천받아서 나간다고 했을 때도 선뜻 해보라고 할 정도로 적극적 지지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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