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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모르는 포항 선거 5연패의 남자

조회수 2018. 5. 16. 18: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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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지방선거 특집: 포항시장 후보 허대만 인터뷰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대체 몇 번째 선거시죠?


허대만(포항시장 후보, 이하 허): 이번으로 일곱 번째, 그동안 1승 5패의 전적을 기록했습니다.


리: 그 1승도 굉장히 근 20년이 지났죠.


허: 그렇죠…. 내리 5패죠.

포기를 모르는 이 남자…

리: 험지 포항에서 왜 계속 나오세요? 


허: 지역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1당 구조를 깨고 싶어요. 1당 구조를 깨지 못하면 지역의 새로운 성장의 동력이나 목소리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금 지역주의에 기반 둔 양당의 지역 체제는 철저한 기득권 덩어리입니다. 그걸 깨뜨려야 해요.


리: 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기득권이 그렇게 욕을 먹는 겁니까?


허: 정치적인 독식이죠. 특히 포항은 포스코를 둘러싼 경제적인 독식이 강력히 구축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진입을 철저하게 막죠. 정치적으로는 신인이나 다른 정당의 시도가 막히고,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모험을 할 수 있는 시도가 막히죠.


리: 독식을 강조하시는데, 그래서 잘못된 예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허: 돈을 좀 벌면 새로운 투자를 하고 싶어 하잖아요? 근데 포항에서는 투자 길이 딱 하나에요. 포스코에 납품을 하는 거죠. 그것도 한국당 주변에 끼지 못하면 진입조차 못 해요.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렇게 흘러갑니다.


리: 일반적으로 지역 기득권이라고 하면 대체로 토건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포항은 특이하네요?


허: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포항은 특수한 상황이 있다 보니 조금 달라요. 집권당이 포스코 회장을 임명하다시피 하고, 국회의원들이 결탁해 이권을 나누는 구조가 오래 지속되어 온 거죠. 극단적으로 이익을 본 게 이상득 의원이고요.

형만 한 아우 없다지만, MB가 어떤 면이든 워낙 대단한 분이시라(…)

리: 이상득 의원이 한 5~6선 정도 했나요? 이상득 재임 기간에 포항의 발전이 정체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허: 내리 6선을 하셨죠. 발전이 아니라 뒷걸음질 친 수준이죠. 포항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R&D 투자가 잘되는 지역이에요. 포스코를 정점으로 수직적인 구조화가 이루어졌죠. 그래서 MB정권 들어오기 전만 해도 축적된 자산이 굉장했어요. 그런데 이 MB 5년 동안에 떨어진 게 너무 커요.


리: 대통령의 형이니까 되려 정부 예산을 잘 따오지 않나요? 실제로 정지되었던 사업이 꽤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고요.


허: 포항 밖에 계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DJ나 노무현 정부 때부터 하던 사업이 대부분이에요. 항만, 철도, 도로 같은 기반시설 사업은 MB 시절에 특별히 늘어난 게 아니고, 원래 예산이 크고요. 이상득 의원 덕에 정부 예산을 새롭게 투자받은 게 거의 없어요. 기대치가 엄청 높았는데 오히려 거덜 내놓은 거죠.

출처: 경향신문
‘만사형통’(萬事兄通)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영일대군’으로 불렸던 이상득 전 의원은 포스코 비리로 현재까지 2심에서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았다.

리: 박근혜 정부 때는 어땠나요?


허: 연장선상에 있었으니 큰 차이는 없죠. 결국 정치적인 독점은 지역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국회의원이나 시장, 지방 의회, 권력이 성과에 책임도 안 지면서 신임을 받고… 이런 게 완전히 깨져야 해요.


리: 상대 후보는 지역의 맹목적인 지지를 받았고, 후보님은 매번 질 게 뻔한 선거에 나온 셈이네요.


허: 또 선거하면서 남긴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나름대로 선거 때마다 내놓는 지역 비전, 좋은 이미지, 의미 있는 투표 수… ‘패했지만 생각보다 표를 많이 얻었네?’ ‘경북의 다른 지역 민주당 후보보다 많이 나왔네?’ 이건 저 개인의 능력이 표에 반영된 거죠.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기회가 오는 날을 기다려 왔어요. 그리고 지금이 그 기회가 아닌가 생각하고요.


리: 이번에는 왠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허: 그렇죠. 객관적인 정세의 변화, 지역의 여론 같은 걸 따져봤을 때 이 추이를 잘 살리면 이길 수 있다.



뼛속까지 포항 사나이, 덜컥 시의원이 되다


리: 포항 태생이시죠?


허: 17대 할아버지 때부터 여기 사람이죠. 철두철미하게 뼛속까지 포항사람이에요. 학교도 영흥초등학교, 포항중학교, 포항 대동고등학교 나왔습니다. 우리 애들도 여기 살고, 손자들도 대부분 여기서 살게 될 거예요. 모두가 포항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 살아왔어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도 포항이라는 도시를 통해서 봤어요. 그러니 포항은 저의 전부죠.

이 영흥초등학교가 얼마나 대단하냐면 무려 이명박, 이상득을 낳았으며 김무성의 부친이 세운 학교이다

리: 학교에서는 어떻게 지냈나요? 


허: 굉장히 어렵게 학교생활을 했죠. 사실 아버지가 9살 때 돌아가셨거든요. 그래도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운동도 잘 해서 서울대 정치학과를 갔어요.


리: 왜 정치를 전공하셨나요?


허: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기고 수단이라고,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불공평한 것에 대한 불만은 있었어요. 우리 때도 이미 빈부격차가 눈에 띄기 시작했으니까요. 87학번이었고 마침 6월 항쟁할 때였으니까, “학생이 데모를 해야지, 왜 공부를 하냐?”는 분위기였어요. 자연스럽게 1학년 때부터 서클이나 학회에 참석했죠. 그런데 몇 달 만에 세상이 바뀌는 걸 경험했죠. 우리는 굉장히 특수한 학번이었어요.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가 입학한 지 넉 달 만에 세상은 바뀌었다.

리: 본인은 6월항쟁 때 어떤 걸 하셨나요? 


허: 그냥 형들 따라 다녔어요. 명동성당 농성할 때였는데, 거기 들어가다 잡혔어요. 선배들은 잘 도망갔는데 나는 촌놈같이 생겼나 봐요. 그대로 잡혀서 남대문 경찰서에서 며칠 구류를 살았죠.


리: 구류 들어갈 때는 무섭지 않으셨습니까…


허: 아뇨, 남대문 경찰서에 학생들이 가득했으니(웃음). 학교에 있는 기분이었죠.


리: 6월 이후의 대학 생활은 어떠셨어요?


허: 군에 갔다 돌아오니까 학회에 웬 선배가 있더라고요. 86학번이었는데 소위 빵을 자주 드나든 사람이었어요. 서경석 목사 강연회 벽보를 붙이더라고요? 그게 인연이 되어서 서경석 목사를 알게 되었어요. 그분이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경실련 대학생 조직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그때 같이 했던 친구가 녹색당의 하승수 전 공동위원장이에요. 같이 연합 대학생회도 만들었죠.


리: 완전히 시민운동 1세대네요? 그때는 시민운동이라는 이름도 잘 안 붙었을 때인데 어떠셨나요?


허: 1987년 이후 정치적인 정당성을 가진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전의 과격한 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웠죠. 시민들의 동의를 넓게 받을 수 있는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의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었어요.


리: 현실적인 방식으로 눈을 돌리신 것 같은데?


허: 차근차근 가야죠. 한 방에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운동권 안에서는 경실련의 방식이 개량주의라고 공격도 받는 상황이었지만, 다른 방식의 사회운동은 도저히 성공할 것 같지 않았어요. 정권 타도로 세상이 변할 것 같지 않았던 거죠.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고요.


리: 혹시 취업이나 고시 생각은 없으셨어요?


허: 생각은 했어요. 대학 4학년쯤 되어서도 활동은 계속했지만 대학원에 입학도 해 놓은 상태였죠. 그런데 마침 서경석 목사가 포항에 왔는데 저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너 고향이 여기니까 여기서 경실련 만드는 일에 참여 좀 해라.”


리: 서경석 목사가 한 사람의 인생을…


허: ….


리 : 경실련 활동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게 있었다면 뭘까요?


허: 조금 막연했지만 지역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비합법 운동을 하던 선배들, 서경석 목사 같은 분들이 시민운동을 하려고 막 나오던 시점이었어요. 그러다 박원순 시장이 하던 참살연, 지금의 참여연대 같은 게 막 만들어졌던 시점이었어요. 저도 포항에서 경실련 간사 일을 2년쯤 하다가 1995년도 지방선거에서 덜컥 당선되어 버렸고요.


리: 정말 갑자기 덜컥 당선이네요-_-…


허: 시민단체 간사 활동을 하면서 지역 이슈에 많이 결합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전국 최초, 최대의 산업폐기물 매립장이 있었는데 그게 붕괴한 거예요.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시트를 제대로 깔지도 않고 매립을 했어요. 당연히 무너졌죠.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들과 연대해서 신문사에 글을 쓰고 그랬어요.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선배들이 있었고, 그 선배들과 선거를 해서 젊은 20대 시의원으로 당선된 거죠. 그때 발을 들이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됐죠.



우당탕탕 시의원 생활: 절충하는 법을 배우다


리: 하필 그때 붙으셔서 20년을 고생하시고…


허: 하하(헛웃음)


리: 경실련 운동을 할 때 중앙에서 했다면 할 수 있는 게 더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왜 포항을 선택한 거죠?


허: 포항은 가능성이 많은 도시에요. 지방자치 제도에 대해서도 기대가 많았어요. 과거에는 정책을 중앙 정부에서 결정해서 전국적으로 집행했어요. 그런데 지방자치제도는 한 지역에서 성공한 정책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제도에요. 그래서 대한민국 전체를 바꿀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방법이고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포항에서 만든 제도가 전국에 확산되고, 그렇게 포항에서 시작해 대한민국을 바꿔보고 싶었죠.


리: 현실정치로 들어가시니 어떠셨어요?


허: 마침, 그때 포항시장이 민주당 사람 박기환 시장님이었어요. 이런저런 조건이 맞아서 30%대 초반 득표율로 된 거죠. 그때 박기환 시장하고 손발 맞춰서 여러 활동을 했죠. 하지만 굉장히 힘들었어요.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지금껏 유일한 민주당계 포항시장인 박기환 전 시장. 박 전 시장은 이후 시장 선거에 두 번 더 도전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리: 견제가 있었나요? 


허: 시의원 다수의 정치적 성향과 전혀 달랐어요. 게다가 지역에 우호적인 세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죠.


리: 그때 하고 싶은 게 굉장히 많았을 텐데, 자꾸 부딪쳐서 진행이 안 되어서 아쉬운 게 있었나요?


허: 있었죠. 낙하산으로 온 단체대표들을 교체해보자는 계획을 실행한 적이 있는데, 시청 감사에 회계부정이 걸린 사건이 있었어요… 그렇게 1번 타깃으로 삼은 게 문화원이었어요. 시에서 감사를 했는데 회계 부정이 있었거든요. 감사 지적사항을 빌미로 직원들을 혼내고 이걸 문화원장 교체까지 이어가자 했어요.


리: 시작부터 막 나가는군요(…)


허: 그래서 문화원장 사표까지 이어졌는데 황당한 게, 그 사람이 사임하고 나니까 딱 분위기가 바뀌더라고요. ‘야, 지금 시장하고 짜고 바꾸려고 드는구나.’ 그래서 분위기 봐서 천천히 하려고 했죠. 그런데 시간을 가지니까 신기하게도 그 사람들이 현직 시장에 대한 우호 입장으로 태도가 바뀌더라고요.

권력이 이렇게 무섭다(…)

리: 일종의 적폐청산이었던 건가요? 


허: 또 95년에 포항이 시·군 통합을 했어요. 영일군과 통합해서 통합 포항시가 됐죠. 경상북도에서 경주시, 구미시 등 10개 통합시가 등장했죠. 그런데 통합 과정에서 남은 공무원들을 포항에 구청을 2개 만들어서 다 거기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포항은 통합이 되었는데 외려 공무원 숫자가 늘었어요. 이 공무원을 줄여서 예산 절감을 꾀했죠.


리: 으… 밥그릇 문제라 쉽지 않을 듯한데요?


허: 계산해 보니까 절감할 수 있는 예산이 꽤 컸어요. 그런데 막상 폐지하려니까 저항이 상상을 초월해요. 그래서 의회에서 논의가 치열하게 펼쳐지다 결국 집행을 못 했어요. 시의원이 다 상대 정당인, 정치적인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과제를 설정하고 밀고 가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간 미워도 다시 한번이 먹혔던 대구경북 지역

리: 이번에 시장이 되셔도 어마어마한 저항에 부딪힐 수 있겠는데요. 


허: 저는 반대파나 공격하는 사람과의 타협, 절충 같은 건 잘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지금까지 버틴 거고요. 야당일 때는 항상 지역 예산 헛된 데 안 나가는지 감시하면서도, 포항 예산을 지키거나, 다른 지역 현황에 대해서도 협조하기도 했고. 그런 건 인정을 받았죠.



한 번의 승리 이후 5전 5패를 겪다


리: 시의원 생활이 끝난 뒤에는 자민련으로 가셨나요?


허: 네. 그때는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이 여기 국회의원이었어요. DJP 연합정권 시절인데, 새정치국민회의에서 후보를 안 낼 테니 대신 자민련으로 하자 했던 거죠. 그때 통합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합당했고, 노무현 등은 합당하지 않고 DJ의 새정치국민회의로 갔어요. 저와 박기환 시장은 박태준 회장이랑 같이 한 거죠. 일종의 연합공천 형식으로 저는 도의원에, 박기환 시장은 시장에 출마했어요. 그런데 둘 다 떨어졌죠.


리: 박태준 회장이 밀었는데도 질 정도면…-_-;;


허: 지역주의 선동이 정말 어마어마했죠…. 마지막 유세 때 한나라당 정장식 시장 후보가 무슨 말을 했냐면 “여러분, 6월 4일 날 목포의 눈물을 부르시겠습니까, 영일만 친구를 부르시겠습니까?”라고 했어요.

지역감정에 쓰라고 나온 노래가 아닐 텐데(…)

리: 이야… 


허: DJ정부였으니까 통했던 지역주의 선동이죠. 최초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시기였으니까 박탈감이 심했던 거예요. 시장 선거의 경우에는 51대 49로 졌어요. 박태준 회장이 공천해 준 사람들도 다 떨어졌어요. 그리고 장사도 하고…. 그러다 정권 바뀌면서 야당이 되고 첫 선거인 2008년 총선에 다시 출마했죠.


리: 애초에 포항에서 민주당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게 제정신이 아닌 듯한데…


허: 제가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해요. 1987년도에 대학 다닐 때 DJ는 가택연금 되어 얼굴도 볼 수 없었어요. 그런데 6·10 이후에 연금에서 해제가 되고, 첫 대중 연설을 성남에서 한다고 해서 성남까지 갔었죠. DJ의 현실감각과 문제의식은 정말 철저한 현실 정치인의 자세였어요. 그리고 정치에서의 성취… 이 모든 것들을 존경해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하죠.


리: 2002년 대선부터 노무현을 열심히 밀고 민주당을 밀었는데, 포항에서는 쉽지가 않았잖아요? 선거하는 데 어땠어요?


허: DJ가 1988년도에는 6% 나왔고 1992년에는 11%, 1997년 당선될 때는 13%였어요. 2002년에 노무현은 20% 쫌 넘었어요. 젊은 층이 굉장히 많이 참여했던 선거였죠. 이번에 문 대통령 지지율이 22.8%였는데, 다자구도였으니까 굉장히 많이 받은 거죠.


리: 포항 사람들이 자유한국당에 대해 실망감을 많이 느낀 것일까요 아니면 민주당에 대한 믿음이 표심으로 표출된 것일까요?


허: 일단 한국당에 대한 실망감이 굉장히 커요. 공격적으로 느껴질 정도예요. MB에 대한 실망감이 워낙 크기도 하고요. 고향 사람이니 기대가 컸는데 이번에 지진 났을 때도 500만 원밖에 안 냈다는 소문도 돌아서 원성도 자자했죠. 포스코 자원 외교 이런 것 때문에 구속이나 되고…. 여태 MB를 동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진정한 민주주의의 수호자 이명박(…)

리: 참 신기하네요…. 


허: 그러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까지 나오니 뭐…. 실망감이 엄청 커요. 그러다가 정권이 바뀌어 버렸단 말이에요? 문 대통령에 대해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없진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굉장히 많아요. 분위기 자체가 많이 달라진 거죠.


리: 지금은 그렇지만, 지난 15년 동안 희망이 없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허: 민주당이 2002년 이후 정당 지지도가 5%를 넘은 적이 없었어요. 선거가 90일 남았는데 민주당 지지도는 5~6% 정도고 한국당은 60%를 넘기고 그랬어요. 맨날 이러니 황당하죠. 그래서 노무현 이후에는 과제가 분명해졌어요. ‘지역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이걸 위해서 도전하는 사람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어요.


리: 그래도 보통 못 버티고 떠나지 않나요?


허: 그래도 다행인 게 선거에서는 15%를 넘겼으니까…. 일정한 지지층은 항상 있었던 거예요. 그분들이 공감해 주고 도와주셨죠. 그게 비빌 언덕이었어요. 그래서 다음 선거에 나가야 한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나갔어요. 안 그랬으면 벌써 패가망신했죠.


리: 그래도 15%는 나왔군요.


허: 2010년도에 시장선거에 나갔을 때는 경상북도 23개 시군에서 민주당 기초단체장 후보가 저 혼자였어요. ‘혼자라도 나가야 한다면 나가야지’ 했는데 진짜 혼자였죠.

출처: 나무위키 갈무리
낙선, 낙선, 낙선, 낙선, 낙선, 낙선(…) 그래도 모두 보전선인 15%는 넘겼다….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리: 사모님이 엄청 고생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 언제 결혼하셨어요? 


허: 95년 12월 24일에 결혼했어요. 시의원 생활할 때.


리: 그때까지만 해도 월급 받았으니까 이 고생을 할 거라고는 전혀 몰랐겠죠….


허: 그렇죠. 그래도 둘 다 낙천적인 편이라 괜찮아요. 걱정한다고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낙선해도 스트레스 안 줘요. 속으로야 뭐 잡아먹고 싶겠지만, 하지 말라 그러면 더 할 거 같으니까(웃음). 애들도 방임하는 편이에요. 전혀 엉뚱한 데로 가는 게 아니면 다 자기 알아서 할 거로 생각해요.


리: 시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교육 정책은 무엇이 있을까요?


허: 교육 비용을 덜어 주는 정책을 생각할 수 있죠. 포항은 이제야 초등학교 무상급식을 시행했어요. 전국에서 가장 뒤떨어지는 거죠. 전국 평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확대해 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압도적으로 낮은 대구경북의 위용

리: 다른 지역은 교복 무상 지원을 이야기하는데…. 


허: 그러니까 교육 제도 개혁이 아니라 부담 경감 차원부터 접근해야 해요. 출산을 지원하고, 보육을 지원하고, 초중고 급식을 지원하는 내용을 지자체가 감당해서 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쪽으로 접근해야죠.


리: 사실 교육보다 보육 쪽이 정말 많은 케어가 필요하죠.


허: 공보육화라고 할까요…? 공공어린이집을 확대해서 균질화된 교육을 제공해야 해요. 돈 없는 애들은 영세한 곳, 여유 있는 애들은 여건이 좋은 곳, 그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생기는 격차를 줄여야죠. 작게는 어린이집 비용을 지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는 애를 집에서 키우겠다’ 할 때 홈스쿨링에 대한 것까지도 형편에 맞게 지원해야겠죠.



포항이 전부라는 사람: 새누리가 잃은 것을 되찾을 때까지


리: 새누리가 계속 잡지 않았다면 많은 부분이 바뀌었을 것 같네요.


허: 지금까지의 포항은 50년 동안 산업도 정치도 단조로운 도시였습니다. 한 정당만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수직 계열로 발전한 도시죠. 생각도 한쪽으로 몰려 지나치게 보수적이었어요.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가 거의 사라진 도시 분위기였죠.


리: 그렇다면 기존의 포항과 앞으로의 포항은 어떻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세요?


허: 제가 시장이 된다는 건, 그런 분위기를 깨뜨리겠다는 의의가 있어요. 정치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철강 이외의 산업을 20년 전부터 이야기했어요. 철강 산업 이후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급격하게 도시가 몰락할 거예요. 철강 산업이 앞으로도 계속 국제적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고, 유지된다 하더라도 이 도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 거거든요.

출처: 한겨레
굳건할 것 같던 포스코도 이제 적자를 내기 시작했다. 참고로 다시 흑자로 돌아선 상태이긴 하다(…)

리: 하지만 산업 유치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허: 지금 포항이 그나마 잘해온 건 포항공대 주변으로 R&D 투자를 오랫동안 많이 해 왔다는 거예요. 특히 가속기, 나노, 바이오산업에 대한 잠재력이 많이 쌓여 왔어요. 포스코의 투자가 이 인프라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해요. 물론 단기간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포스코의 자본과 지금까지 투자했던 기술 행정력이 잘 결합되면 가능하리라 봐요.


리: 그 과정에서 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허: 정부의 지원, 투자를 연결하는 역할이 행정이에요. 그걸 잘 접목할 수 있는 것은 한국당보다 우리가 낫고요. 정치적으로든 산업적으로든 문화든 다원화되어 역동성이 살아나는 도시를 만들고 싶어요.

문과라서 잘 모르겠지만, 개쩌는 것 같다(…)

리: 역동성이 살아나려면 젊은 층이 유입돼야 할 것 같은데… 


허: 포항 인구가 조금 정체되었다가 감소하기 시작했어요. 출생률과 사망률을 비교하면 별로 차이도 안 나요. 그런데도 인구가 줄어드는 건 젊은 인구가 빠져나가기 때문이에요. 젊은 사람들을 붙잡아야 해요. 포항공대에 오는 젊은 친구들도 졸업하면 취업이든 창업이든 여기서 안 하려고 해요. 수도권 가서 창업해서 성공한 기업들이 꽤 있던데, 그런 친구들을 붙잡을 수 있는 시스템을 짜야 해요. 창업공간이라든지 장비 등을 준비해서요. 지금도 테크노파크나 창업고용센터가 있지만 약하죠.


리: 기존에는 왜 잘 안 돌아갔을까요?


허: 제가 볼 때는 이 지역 경제가 지나치게 포스코에 의존했어요. 워낙 잘 나갔으니까요. 그래서 새로운 산업이나 창업에 대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도 막연히 생각할 뿐 손에 잡힐 만한 걸 만들지 못했어요. 이제는 절박한 상황까지 왔어요. 포스코도 절박하고, 포항시 전체도 절박해요. 이제는 여유 부릴 시간이 없어요.


리: 포항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만이 여럿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생각나시는 건 어떤 게 있나요?


허: 남북 사이에 불균형이 좀 있어요. 남쪽은 공단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근로자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데도 문화공단, 교육시설이 다 부족해요. 북쪽은 그나마 좀 낫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시 전반적으로 문화 인프라가 많이 부족해요. 1인당 영화관 수 이런 걸 비교하면 많이 떨어질 거예요. 문화를 많이 구축해야 해요. 시의원할 때 이미 문화예술지원 기금 설치 조례를 만들었었어요. 그런데 살펴보니 그동안의 기금을 다 털어먹어 버렸더라고요. (한숨)

이런 게 있긴 하다(…)

리: 본인 스스로 생각하는 허대만은 어떤 사람인가요? 


허: 인내, 끈기요. 여러 번 낙선했지만 여러 번 잘 견뎠어요. 그러다 보니 정권이 바뀌었어요. 그 오랜 세월 같이 했던 사람들이 이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위치가 되어 있고, 저도 포항에서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었어요. 그래서 참, 잘 버텨 왔구나 싶죠. 게다가 제가 위암 3기였는데, 다행히 치료도 잘 되고 회복도 빨리 됐어요. 포기하지 않고 잘 참아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해요.


리: 시장이 된다고 하면, 이전의 포항시와 허대만의 포항시는 어떻게 다를까요? 어떻게 기억되었으면 좋을까요?


허: 공직사회의 분위기가 달라지도록 만들고 싶어요. 포항의 공직사회가 커요. 한 2,000명 돼요. 큰 재원과 인력, 권한을 가져서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죠. 그런데 포항의 공직사회는 보수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해요. 원래 관료 조직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이에요. 저는 시장 역할의 절반은 공무원들을 훈련하고 교육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공직사회의 분위기를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바꿔내지 못하면, 아무 일도 못 할 거예요.


리: 포항에서 이런 걸 전국으로 보급하고 싶다, 딱 한 가지만 말씀해 주세요.


허: 포항만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포항은 대한민국의 1%에요. 인구도 1%고, 면적도 1%고, 해안선 길이도 1%에요. 사실 포항에서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싶은 것보다는 포항만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바다를 잘 활용하는 사업이 되었으면 하고요. 과메기는 사실 포항 바닷가 일부에서만 먹던 음식이에요. 제가 시의회를 하던 박기환 시장 시절에 전국화를 시작했어요. 공무원들이 이걸 들고 전국을 찾아다니면서 확산되기 시작했고, 먹기 쉽게 개량도 했죠. 포항만 할 수 있는 것이 전국화된 셈이에요.

출처: 연합뉴스
박기환 시장은 발로 뛰며 전국에 과메기를 보급한 분이기도 하다(…)

리: 갑자기 웬 과메기 이야기를… 


허: 저는 포항의 가능성이 제철소에도 있지만, 바다에 기반 둔 걸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남북관계가 개선되잖아요? 포스코 고로에 무산 철광석 들고 오고, 여기서 뽑아낸 쇳물로 동해선 철도를 만들고, 시베리아 중국 가는 철도를 만들고 싶어요. 그런 걸 좀 빨리해보고 싶어요. 통일시대의 시장이 꼭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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