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끔찍하게 아파도 견뎌야만 하는 이유

조회수 2018. 5. 2. 18: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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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은 어쩌다가 일어난 것뿐이다.

삶은 아사리판이다

삶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다 봐줄 것처럼 굴다가 ‘그래 별 일 안 생기는구나’ 하고 방심했을 때쯤 내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이제껏 발생한 모든 사고는 사실 그렇게 발생했을 것이다. 사악한 누군가가 ‘한 번 망해봐라!’ 하고 저지르는 게 아니라 실수에 점차 무뎌지고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사람들의 무신경함이 모여 저질러지는 것이다. 


4년 전 그 참사도 그렇게 발생했을 것이다. 우연히 발생한 사고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자명하게 억울한 일이다.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일말의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조차 사고는 억울한 일이다. 책임을 인정해도 그 무게는 무겁기 마련이다. 마치 자신이 이 아사리판의 피해자가 된 것만 같다고 느낄 지경이다.


사고로 느끼는 애꿎음은 가해와 피해 구분을 떠나 보편적인 감정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책임 소재에 관계 없이, 일상을 잃고서 슬픔 속에 사는 모두를 위한 글이다.



리와 윤석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는 벽난로에 차단막을 설치하지 않고 집을 비운 실수로 아이들을 잃었다. 리를 심문하는 경찰이 말했듯 리는 그날 밤 수많은 사람이 수없이 저지르는 실수를 했을 뿐이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밤늦게까지 탁구를 쳤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술과 코카인에 취했다. 술에 취해 TV를 봤고, TV를 보다 맥주가 떨어져서 벽난로를 잊은 채로 맥주를 사러 나갔다. 딱 한 가지 달랐던 것은 그날의 실수가 유난히 무거웠다는 것이다.

리 챈들러

김영하 단편소설 「아이를 찾습니다」의 주인공 윤석도 마찬가지다. 자고로 마트란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 아니던가. 윤석이 최신형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대형마트에서 아내에게 카트를 맡긴 사이, 아이가 사라졌다. 어린 아들이 사라지면서, 주말이면 마트에서 장을 보는 평범한 중산층의 일상도 함께 사라졌다. 가세는 기울었고 아이 엄마는 정신줄을 놓았다. 실종된 아이가 돌아오지만, 윤석이 찾던 두 볼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이는 없고, 화가 잔뜩 올라 컴퓨터를 내놓으라는 낯선 초등학생만 있다. 


두 사람은 사고의 책임자이면서 가해자이고, 동시에 피해자다. 죄가 있다면 365일 24시간 긴장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것뿐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젖어 들어 방심해버린 것뿐이다. 매 순간 깊게 관여하여 보내지 못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 실수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지나치게 호됐다. 두 사람에게 삶은 너무 아팠다. 이제 책임 소재를 명백히 하고, 이들에게 실수를 꾸짖고,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들을 굳이 표현하자면 그저 ‘슬픈 사람들’이다.


리는 고향을 떠나 슬픔과 후회 속에 살았다. 시종일관 춥고 흐린 날씨는 리와 닮았다. 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세대 주택의 잡역부로 일하면서 빛도 잘 들지 않는 방 안에서 딱 죽지 않을 만큼 삶을 꾸역꾸역 유지하는 것이었다.


윤석도 그렇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아이를 찾는 전단지를 인쇄할 비용을 벌었다. 곰팡이가 피어 다 무너져가는 집이었지만 몸을 뉘일 집을 구했고, 꿋꿋이 밥을 떠먹었다. 너무 슬프면 더 열심히 전단지를 돌렸다. 일상이 무너졌지만 두 사람은 슬픔과 후회 속에서 살아냈다. 그의 정신과 육체가 망가지려고 해도 정신과 육체 어느 하나 죽어버릴 때까지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삶을 감내했다.


자기 삶을 감당할 수 없어 슬픔을 있는 그대로 품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리의 아내 랜디(미셸 윌리엄스)는 전적으로 리를 탓했다. 리가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모쪼록 무시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품어서는 살 수 없었다. 슬픈 만큼 더 열심히 리를 미워했다.

리의 형 조 챈들러(카일 챈들러)의 부인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사건과 크게 관련이 없지만, 역시나 슬픔에 빠져 사는 인간이다. 그녀는 맨 정신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어 술을 마셨다. 신앙을 믿는 것을 넘어 신앙에 중독됐다. 


마찬가지로 윤석의 아내는 정신줄을 놓았다. 이들은 삶을 감내할 수 없어 아예 지워버리거나, 어딘가에 깊이 몰입해 면죄부를 얻으려 했다. 슬픔과 후회를 빠르고 쉽게 잊어버릴 방법이었다.



슬프면 슬퍼해야 한다


슬프면 슬퍼해야 하고, 후회가 되면 후회해야 한다. 그 에너지를 애먼 대상으로 돌려서 직면한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 감정에 깊게 관여해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 잔인하지만 그런 삶이 오직 진실이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술을 마시고, 신께 기도하면 당장 그 슬픔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은 아사리판이므로 슬픔을 애써 지운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특별히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 슬픔을 애써 지운다고 삶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을 견뎌낸다면, 견뎌내는 당신에게 슬픔은 여전히 남겠지만, 적어도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리에게 조카 패트릭(루커스 헤지스)의 존재는 새로운 기회다. 리는 이른 나이에 죽은 형 조를 대신해 아버지 노릇을 해야 했다. 하지만 두려웠다. 아이를 잃었던 고향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돌아가야 하니까.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그때가 떠오를 테니까. 자신의 아이도 지켜내지 못한 사람으로서 보호자가 된다니 두려웠을 것이다. 리가 조카 패트릭의 양육권을 지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일이었다.

리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 왔던 아버지의 역할을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완전히 모자란 아버지지만, 그간 끊어냈던 사회적 관계를 되살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차에 패트릭을 앉히고, 밴드 연습을 하려는 패트릭을 친구 집에 데려다주었으며, 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넘어 그 집에 들어가 친구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리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기 때문에 대화 상대로 적합하지는 않다.


아버지를 잃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패트릭이 공황장애를 겪을 때 곁에 있어 주었고, 미숙한 탓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냐’라고 패트릭에게 물었다. 이 과정에서 리는 서서히 삶을 회복했다. 영화가 끝날 때 리는 여전히 슬펐지만, 패트릭과 공을 주고받으며 슬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윤석도 그렇다. 돌아온 아이가 금방 기쁨이 되지는 않았지만, 한 세대를 넘겨 그 기회를 얻었다. 어찌 됐건 윤석은 마침내 품 안에 아이를 안아 들었다. 소설은 이렇게 끝났다. 윤석은 이제 슬프고 후회스러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을 것이다.



삶이 끔찍하게 아파도 당신이 견뎌야만 하는 이유


소설가 김영하는 소설을 쓰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고,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

견디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다. 당신을 지켰으면 좋겠다. 임의의 순간에 어쩌다가 임의의 사건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뿐이다. 영화의 리와 소설의 윤석이 그랬듯이 당신의 삶에도 새로운 희망이 찾아올 것이다. 슬픔과 후회를 모두 껴안고 끙끙대더라도, 임의의 순간에 모든 것을 빼앗겼던 것처럼, 정말 갑자기 임의의 순간에 다시 웃을 수 있는 일이 생길 것이다.

감독과 작가의 위로는 섣부르지 않다. 함부로 힘내라고 하지 않는다. 당신의 슬픔과 후회가 어떤 것일지 그저 묘사한다. 함께 끙끙 앓고 견뎌낸다. 오히려 내가 주인공보다 더 괴롭다고 느껴질 정도다. 어떤 사람들은 우울하다면서 영화관을 나와버리고, 책을 덮어버린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를 본다. 할리우드적 행복에 취한다.


두 작품은 그런 사람에게 아사리판 저 끝에 희미하게 빛나는 희망을 맛볼 기회를 선사하지 않는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이 끔찍하게 아파도 당신이 견뎌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삶을 덮어버리지 말고, 환상이 주는 행복에 취하지도 말자. 나는 당신이 희망을 발견할 때까지 함께 슬퍼하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하겠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원문: 김의뭉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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