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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교육이 무의미한 이유

조회수 2018. 4. 18. 11: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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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명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게 모두 틀린 말이었다면?

공감(empathy)이라는 개념은 오래도록 심리학, 교육학, 조직학, 경영학, 윤리학 등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문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 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꾸려가는 사회 질서 속에서 공감이라는 키워드가 가질 수 있는 가치와 잠재력에 대해 섣불리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심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협상이나 설득 등 비즈니스 중요 영역에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혹은 인간 행복의 기본 뼈대라 할 수 있는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등 여러 사람과의 원만한 대인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분명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고 봤고 실제로도 그러한 것이 사실 아니겠는가.


한편, 사회 통합의 측면에서 봤을 때 요즘과 같이 성(性), 세대, 계층 등을 둘러싼 집단 간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혐오의 시대’에서는 공감 담론에 대한 중요성이 더 높아지는 듯하다. 서로 화해하고 더 나은 공동의 길을 모색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처지에 대한 공감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처지에 대한 공감…(아님)

그러나 공감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공감 능력이 ‘높다·낮다’ 단 하나의 기준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공감에 관한 최근까지의 심리학 연구 결과들은, 공감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사실 공감은 단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공감은 인지적(cognitive) 공감과 정서적(affective) 공감으로 구분된다. 인지적 공감은 상대방의 생각이나 감정 등을 의식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는지를 측정하고자 하는 것이며, 정서적 공감이란 공감 행위로 인해 촉발되는 정서적인 변화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쉽게 이야기하면, 인지적 공감은 상대방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아는’ 것이고, 정서적 공감은 상대방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이 상호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두 개념은 엄연히 독립적인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맞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공감 능력을 평가하면서, 단지 ‘높다/낮다’라고만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가령 ‘인지적 공감 능력은 뛰어나지만, 정서적 공감 능력은 부족한 사람’이 있다. 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고, 상대방에 대한 개인적/맥락적 단서들을 고려하여 지금 현재 상대방이 어떤 감정,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를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일에는 능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이해의 영역에 머물 뿐, ‘공유된 경험’, ‘대리 경험’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에는 서툴다.


이런 경우, 그의 공감 능력은 ‘높다’고 봐야 하는가, ‘낮다’고 봐야 하는가? 반대의 경우에도 가능한 이야기다. 정서적인 공감 능력이 뛰어나서 상대방이 울 때 같이 울고, 누군가 웃을 때 같이 웃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정작 그 사람은 상대방을 따라 울고 웃었지만, 정작 상대방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의 공감 능력은 높은가? 아니면 낮은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런 이유로, 단순히 공감 능력이 높다/낮다 라고 판단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교육 현장에서 ‘공감 능력을 높이자’는 식의 단순화된 구호도 어쩌면 공허하다. 인지적/정서적 공감이 있고, 어느 한 가지가 낮아도 다른 어느 한 가지가 높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감 능력을 그대로 외부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이 이해하고 느낀 바들을 능수능란하게 숨기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공감 능력을 재단하고 개입하려는 노력은 보다 신중하게 이루어져야만 할 필요가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가장 흔한 교육 주제 중 하나가 바로 공감 능력에 대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워야 더 유능하고,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 흔히 ‘공감 교육’을 시키려는 이유다.


그러나 공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공감 기술을 가르쳐주기 전에 먼저 따져봐야 하는 것은 피교육자들에게 그것을 위한 적절한 ‘동기’가 마련되어 있느냐는 점이다.


‘공감 교육’을 논할 때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바로 ‘공감 능력을 잘 키워주면 알아서 잘 공감을 하고 다닐 것이다’는 안일한 예측이다. 그러나 공감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와 공감 능력을 발휘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이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나르시시즘은 타인을 착취하고 이용하면서까지 자기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확인받고자 하는 심리를 주된 특징으로 한다.


심리학자들은 소위 ‘정상 범주’로 분류되는 일반인들 누구에게나 나르시시즘 성향이 조금씩은 다 들어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학자들 간의 공감대일 뿐, 사실 나르시시즘은 본래 정신장애의 하나로 간주되어 오던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각종 정신 장애들의 목록이 담겨 있는 DSM을 살펴보면 자기애성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항목이 존재한다.


DSM에는 자기애성 성격 장애자들이 주로 보이는 특징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공감 능력의 결여(lack of empathy)’다.

‘공감 능력의 결여’.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사이코패스나 반사회성 인격장애 등을 떠올리게 되지는 않는가? 혹은 나르시시스트들은 마치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뇌 부위(이를테면 ‘거울 뉴런’)가 어떠한 이유로 손상되어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된 상태거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던 심리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면 이상한 일이다.


흔히 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해 중요하게 요구되는 역량이 바로 공감 능력이다. 공감을 통해 인간적인 친밀함을 쌓든, 혹은 협상/설득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든 어쨌든 공감 능력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자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들의 삶을 추적해보면, 그들이 실제로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성취를 거두는 경우가 적지 않게 관찰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나르시시스트들은 공감 능력이 ‘없’는데. 독단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할 텐데. 나르시시스트들이 특별히 지능이 더 뛰어나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 도대체 어떻게?


최근 심리학계에서는 나르시시스트들의 공감 능력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나르시시시트들은 공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공감 능력이 낮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감해야만 할 ‘동기’가 없다는 이유로 굳이 공감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나르시시스트들이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 짓기에는 인지적/정서적 공감 능력이 각각 어떠한지 그간 충분한 고려가 있었는가? 나르시시스트들의 공감 능력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은 아래의 두 가지 명제가 모두 참임을 가리키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1. 나르시시스트들은 공감 능력이 낮다.
2. 나르시시스트들은 공감 능력이 높다.

나르시시스트들의 정서적 공감 능력은 낮다. 그래서 정서적 공감의 표현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들의 인지적 공감 능력에는 별문제가 없다.


단지 동기의 부재로 그것을 ‘안’ 발휘하려 할 뿐이다(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적극적으로 자신이 보유한 ‘공감 능력’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각기 다른 이유로 나르시시스트들이 공감 능력을 발휘하는 장면을 보기가 매우 어려웠으니, 우리는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이다.

공감 교육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단일한 형태의 공감 교육으로는 효과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공감 개념 속에 담겨 있는 세부적인 속성(인지적/정서적 측면)들을 섬세하게 고려하지 않는 한. 그리고 정작 문제는 공감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공감해야 하는 동기의 부재일 수 있다는 점을 별도의 가능성으로 고려하지 않는 한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계속해서 누군가를 가리켜 공감 능력이 높다, 했다. 혹은 누군가를 가리켜 공감 능력이 낮다, 했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란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다. 한편, 어떠한 이유 때문에 그것이 겉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혹은 본문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위장’된 공감 능력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인지적 공감 과정을 통해 알아낸 상대방에 관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정서적 공감 표현을 꾸며낸다거나 하는 등의 시도 말이다.


공감, 정복하기에는 아직 더 들여다봐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참고 문헌


– Ritter, K., Dziobek, I., Preißler, S., Rüter, A., Vater, A., Fydrich, T., … & Roepke, S. (2011). Lack of empathy in patients with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Psychiatry Research, 187(1), 241-247.


– Wai, M., & Tiliopoulos, N. (2012). The affective and cognitive empathic nature of the dark triad of personality.Personality and Individual Differences, 52(7), 794-799.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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