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폭풍의 진전: 온난화 세계의 자연과 사회
※ 이안 앵거스(Ian Angus)의 「The progress of this storm: Nature and society in a warming world」를 번역한 글입니다.
현대 녹색 문헌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의 종말’ 같은 제목들이 붙은 서적들과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자연을 보호하고 싶은 환경주의자들과 대조적으로, 몇몇 집단에서 자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들이 인계받았고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별 짓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 멋있는 일이 되었다. 그런 견해의 옹호자들은 그저 인간들이 자연 세계의 일부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론과 실천에서 자연과 사회는 문자 그대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적는다.
이 견해의 옹호자들은 세 진영으로 나뉜다. 생태근대주의자는 자연의 종말을 경축할 이유로 간주한다. 우리는 인류를 자연에의 의존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무엇이든 그것의 유물을 우리에게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기 위해서 그 과정을 확대하고 심화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의 상실을 애도하지만 어떤 출구도 찾지 못한다. 사회와 자연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소규모의 개혁만이 가능하다. 세 번째 조류는 우리는 희망을 갖고서 파국주의를 삼가해야 하지만 환경 비용의 상승 때문에 지구의 생명 지지 체계들이 붕괴하기 전에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비개연적인 주장 외에는 희망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데 2015년에 출판된 『화석 자본(Fossil Capital)』이라는 책으로 권위 있는 도이처 메모리얼 상을 수상한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은 “기후 변화에 의거하여 자연·사회 접합점에서 유통되는 몇몇 이론들을 면밀히 검토”하는 한 편의 강력한 에세이 『이 폭풍의 진전(The progress of this storm)』을 저술했다. 명료하고 설득력 있는 산문에서 그는 ‘자연의 종말’ 테제는 인간 사회와 나머지 자연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깊은 혼동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활동가들은 흔히 철학적 논의를 우리의 한정된 시간의 낭비로 간주하여 회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말름이 적었듯 이론은 실제 행위를 돕거나 방해할 수 있다. “몇몇 이론은 상황을 더 명료하게 하는 반면 다른 이론들은 그것을 모호하게 한다.” 행위는 우리가 보게 되듯 전혀 부족하지 않은 흐릿한 차트와 막연한 사유가 아니라 충돌하는 힘을 얼마간 정확하게 표시하는 개념적 지도들에 의해 가장 잘 조장된다.
그의 비판은 구성주의(constructionism, 자연은 인간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와 혼성주의(hybridism, 사회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은 밀접하게 결합해 그것들을 구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관련 개념에 집중한다. 두 접근 방식은 브뤼노 라투르의 영향력이 있는 작업에서 고무되는데, 그의 신봉자들은 라투르를 당대의 가장 중요한 프랑스 철학자로 찬양한다.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 라루트를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에 놀란다.
‘과학학’에 대한 그의 기여는 실제 과학자들로부터 조롱을 반복적으로 유발했다. 악명 높은 한 사례에서 그는 람세스 3세가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린 과학자들은 틀렸는데, 그 파라오는 수천 년 전에 사망했지만 결핵을 유발하는 박테리아는 1882년에야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명백히 그 질병은 인간들이 구성하고 나서야 존재했다! 그런 어리석음은 그의 사도들의 작업도 특징짓는다. 예를 들면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은 이렇게 적는다.
그리고 말름이 ‘마르크스주의를 가장한 노골적인 혼성주의’ 견해라고 부르는 제이슨 W. 무어(Jaseon W. Moore)는 가장 근본적인 물리학 법칙들도 문화적으로 결정된다고 선언한다.
누군가가 인지하고 나서야 질병이 존재하게 되고, 열역학의 법칙들과 일각수의 현존이 의견의 문제가 되는 세계. 이것들은 테리 프랫쳇(Terry Pratchett)의 디스크월드 환상 소설 가운데 하나의 전제일지도 모르지만 사회와 자연에 대한 진지한 고찰의 전제는 아니다.
모든 과학이 주관적이라면 왜 우리는 과학 부인자들의 결론이 아니라 기후 과학자들의 결론을 수용해야 하는가? 사회와 자연적 세계를 구별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적·경제적 조치가 피해를 늦추거나 반전할지 결정하고, 어떻게 지구 온난화의 사회적 추동자들을 판별할 수 있겠는가?
슬프게도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거대한 분리 때문에 학계에서 그런 넌센스에 대한 여지가 형성되었다. 2007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라투르는 인문학에서 10번째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저자다. 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발터 벤야민, 카를 마르크스보다 앞섰다.
그것이 말름의 책이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이유인데, 그는 대부분의 혼성주의·구성주의적 문헌을 특징짓는 넌센스를 벗겨서 비과학자와 비철학자 들이 따라갈 수 있는 술어로 내부의 공허함을 폭로한다. ‘사람들의 자연관은 주관적이고, 그래서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흔한 주장에 말름은 이렇게 적는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말름은 “의미가 제거된 산문, 가련한 독자에게 퍼부어지는 찌꺼기”에 대한 철학자들의 기호를 강타하는데, 독자는 전체 주제가 보통 사람에게 정말로 너무 복잡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텍스트의 그런 부분들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라고 적는다.
학술적인 환경 글쓰기의 허세를 폭로할 뿐이더라도 『이 폭풍의 진전』은 가치 있는 자원이 될 것이지만, 말름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행한다. 그의 책의 가장 큰 기여는 ‘자연은 결코 현존하지 않는다’거나 ‘자연은 자본주의적 사회에 의해 완전히 포섭되어 그것에 묶였다’는 주장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말름은 생태사회주의자뿐 아니라 모든 진지한 환경 활동가가 읽어야 하는 효과적·급진적 행동을 위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말름의 대안은 역사적 유물론인데, 그것은 자연과 사회를 분리할 수 없는 단일체로 합병하지도 않고 사회를 자연적 세계와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인간 사회는 자연적 세계 내에서 발생하고 그것의 일부지만 자연의 어떤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독자적 건설과 파괴의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독특한 특징, 창발적 특성을 보유한다.
그것이 인간들이 자연을 전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사회에 전적으로 묶여있다는 혼성주의적 주장은 자연 세계의 방대한 규모와 복잡성에 대한 두드러진 맹목성을 드러낸다. 기후 체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 파국적 결과를 나타내지만 “그것은 압도적인 복잡성을 갖춘 체계에서 모래 알갱이들의 사소한 재배열일 뿐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인간들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연쇄 반응들의 눈사태”다.
이 구절이 보여주듯 자연 세계와 인간 사회가 서로 함몰될 것이라는 관념은 터무니없고 그것을 진지하게 간주하는 사람은 세계의 문제들이 해결될 방법은 물론 그것들이 무엇인지 설명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자연과 사회에 관한 말름의 논변 전체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다음과 같은 두 구절이 그의 주요 논점을 요약한다.
그것에 의거하여 말름은 혼성주의와 구성주의에 대한 명료하고 명확한 대안으로서 기후 실재론(climate realism)의 열 가지 주장을 제시하고 지구 온난화 배후의 사회적 동학에 대한 실마리로서 사회주의적 기후 실재론의 세 가지 신조를 제시한다.
과학은 때때로 지배 계급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되었지만 “이제 한 갈래가 인간 문명의 물질적 토대를 위태롭게 하는 그들의 지배에 대한 가장 고약한 고발을 제기했다”고 그는 적는다. 결과적으로 “온난화 조건에서 살아남는 것은 첨단 과학과의 완전한 동조를 필요로 한다.”
『이 폭풍의 진전』은 현재의 지적 유행에 대한 강력한 비판, 전 지구적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도구로서의 역사적 유물론과 신진대사적 균열 이론에 대한 설명과 옹호이자 전지구적 파국을 막기 위한 과학 기반 대중 운동에 대한 요청이다.
그것은 생태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주요한 기여이며 더 넓게는 폭풍의 방향 및 그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행로를 보여주는 기후 지도의 전개에 대한 기여이다.
원문: 사물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