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에겐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조회수 2018. 3. 16. 16: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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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은 '거절 왕'이다. 본인이 불편하고, 내가 싫어할 것 같으면 바로 거절한다

※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내 남편은 ‘거절 왕’이다. 주말에 시댁에서 갑자기 오라고 하는 등 곤란한 요구를 할 때면,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중간에서 칼같이 자른다. 가끔은 내가 민망해서 오히려 그 요구를 절충해서 수용할 정도다.


그에게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 본인이 불편하고, 내가 싫어할 것 같으면 바로 거절한다. 덕분에 나는 마음이 편하다. 분명 며느리인 나한테 물었으면 시부모님이 서운해하실까 봐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전전긍긍했을 게 뻔하다. 결혼 2년 차, 나는 아직 시부모한테 예쁨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며느라기’에 있다.


 

너는 ‘거절 왕’인데, 나는 왜 ‘호구왕’


시댁에 가면 나는 평소보다 더 친절한 사람이 된다. 어머님의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쳐 드리고, 아버님의 안부를 묻고, 조카와 까꿍 놀이를 하느라 바쁘다. 이 평화로운 거실 풍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친정집에서의 나였다면 보고 싶은 채널 틀어놓고, 엄마 말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누워서 빈둥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댁에서는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거실에 앉아 싹싹한 며느리 역할을 해낸다. 그동안 남편은 주로 자기 방에서 컴퓨터를 한다. 밥 먹고 과일 먹는 시간에나 대화에 참여할까, 그 전에는 목소리 듣기도 힘들다.


그에게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 본인이 편해야 한다. 그가 편하게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느라 식구들과 소통을 하지 않으니, 내가 자꾸만 무리해서 그 공백을 메우게 된다. 아무리 좋은 분들이라도 시집 식구는 어렵다.


겉으로 웃고 있다 해서 불편한 마음마저 사라질 수는 없건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마워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 차마 뭐라 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웹툰 ‘며느라기’ 의 한 컷. 남편이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분명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 문제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당신이 무리한다고 해서 자기한테도 같은 방식을 강요하지 말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남편이 처가에서 그러하듯 나 역시 시댁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말없이 앉아 있어도 괜찮은 걸까. 혼란스러웠다. 누가 강요한 적도 없는데 시댁 식구들과 하하 호호 하려 애쓰는 내가 호구고, 문제인가 싶다.

 


원인은 착한 여자 콤플렉스?


웹툰 ‘며느라기’의 주인공 민사린을 보면 기시감이 든다. 시부모한테 예쁨받으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나서서 하고, 불편한 순간에도 내색하지 않으며, 남편한테 그 고충을 충분히 전하지 못하는 모습이 나와 똑 닮았다. 이런 사람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타인의 기대에 민감하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욕구를 잘 알아채서, 거기에 맞출 줄 안다. 싫은 소리 잘 못 하고, 어쩌다 거절이라도 할라치면 죄책감에 시달린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닌가 고민한다.


이런 사람들은 아홉 번을 맞춰주고도, 딱 한 번 자기 맘대로 하면 이기적이라며 비난받기 십상이다. 실제로 상대는 그렇게 느낄 것이다. 이전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 말이 먹히는 사람이니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진짜로 이기적인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말에 상처받지 않는다. 내가 나를 위해 살 듯,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면 되는데 그게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오히려 ‘이타적’이라는 단어 아래 자기 멋대로 희생해놓고, 그 보상심리로 상대방에게 뭔가를 원하는 게 더 문제라고 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성별에 따른 차이다. 나처럼 눈치 보고 죄책감에 취약한 유형은 여성에게서 더 흔하다. 착해야 사랑받는다는 메시지를 듣고 자라난 탓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착하다’를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형용사로 정의한다. 바르다는 것은 사회의 규칙을 잘 지킨다는 뜻이고, 상냥하다는 것은 눈치가 빠르고 사근사근하며 부드럽다는 뜻이다.


결국, 착하다는 것은 순응적인 인간을 가리키는 말인 셈이다. 그런데 세상이 정한 규칙이 불만스럽고, 타인의 기대보다 내 욕구에 따라 살고 싶다면? 이 지점에서 죄책감이 싹튼다. 단지 내가 원하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다.


여성이 협동, 양보, 포용, 희생, 겸손, 친절, 배려, 봉사, 돌봄, 미소 같은 단어 대신 자기주장, 경쟁, 공격, 욕심, 성취, 자신감, 뻔뻔함, 무례함, 자기 시간, 무표정과 같은 특성을 택하는 것을 이 사회는 곱게 보지 않는다.


후자는 강함/유능함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남성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이 고리타분한 이분법이 학교와 직장에서는 무너지고 있지만, 가부장적인 가족문화 내에서는 공고하게 살아 있다.


결혼하고 나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시가에서 며느리는 서열상으로 가장 끄트머리에 있다. 반면 처가에서 사위는 장인, 장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백년손님이다. 내가 감정노동을 자처하는 동안 남편이 자기 편한 대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런 맥락 때문이다.


나는 시가에서 명절 음식을 만들 일이 없고, 어머님이 설거지도 시키지 않아 육체노동에서 제외된다. 그것만으로도 고맙게 느껴지는 처지에(그게 옳은 건 아니지만 이미 나는 고마워하고 있다.) 감정노동마저 쉽게 거부할 수 있을까?


사위가 과묵하면 듬직하고 믿음직스럽게들 여기지만, 며느리에게도 그런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질까? 예쁨받는 며느리가 되는 길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말도 잘 붙이고, 더 자주 찾아뵈면 좋아하시겠지.


이제 곧 결혼한 지 3년 차, 나도 좀 편해지고 싶다. 무리하지 않고 내 컨디션에 따르고 싶다. 죄책감 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다. 남편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면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거 하나 버리면 되는데…


도대체 ‘며느라기’가 뭐라고 졸업하는 게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살아서 어디든 간다”는 우테 에어하르트의 말을 들려주며,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그걸 추구하는 게 맞다고 등 두들겨줄 인생 선배가 있었다면 힘이 덜 들었을까.

 


커뮤니티 게시판에 하소연하는 그 마음을 알겠네


2070년까지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렇게 긴 명절은 없다는데, 이 좋은 연휴를 반기지 않는 며느리들이 커뮤니티에는 넘쳐난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명절 스트레스에 관한 게시글은 대체로 두 종류로 압축된다. 


첫째, 일정 관련 유형이다. 시댁에서는 일찍 와서 늦게 가라 하는데, 며느리들은 늦게 와서 일찍 가고 싶어 한다. 일찍 가봤자 전이나 더 부치고 애는 언제 낳을 거냐 친척들한테 잔소리나 들을 게 뻔하니, 늦게 도착해서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추석 당일에는 친정으로 출발하는 시간 때문에 다들 고민이다. 한 끼 더 먹고 가라거나 시누이를 보고 가라는 제안에 발을 동동거리는 경우도 많다.


전날 시댁에 가서 자고 명절 당일에 아침을 함께하는 것도 일종의 프리미엄인데, 딸 내외를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이다. 이럴 바에야 추석은 시댁 먼저, 설에는 처가 먼저 하는 식으로 번갈아가면 좋으련만 남편들은 그 주장에 일단 반대하고 본다.


두 번째 유형은 역시나 제사 노동에 관한 불만이다. 남편 조상 모시는데 생판 남인 며느리 손을 빌려다가 제사상 차리게 만들고, 정작 남자들은 거실에 앉아 노는 게 부당하다는 하소연이다. 당연한 얘기인데 사연에 등장하는 남편들은 하나같이 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너만 참으면 되는데 왜 유난이냐,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기 바쁘다.


가부장제 하에서 가만히 있으면 자기는 편한데, 구태여 이 상황을 바꿀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분통 터진 아내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말이 있다. 여기서 부당함을 느끼는 자기가 정말 이기적이냐는 거다. 댓글들은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이기적인 건 남편이에요.

동의를 구하지 마세요. 거절하세요.

시댁에 원하는 시간에 가서, 원하는 만큼만 머무르다 가세요.

당신이 맞춰주면 문제는 지속됩니다. 반드시 노라고 말하세요.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말하든 시부모님은 서운할 거예요.

한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턴 거절이 쉬워집니다.

자매애가 물씬 풍기는 이런 댓글들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선택은 어차피 내가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제물삼아 핑계 대다 보면, 상황은 결코 호전될 수 없다.


싫으면 안 하면 된다. 글쓴이도 그걸 알고 있지만 알리바이가 필요한 것일 게다. 나만 아는 이기적인 여자, 못된 년이라고 자기 내면에서 손가락질하는 죄책감을 재우기 위해서다. 그걸 알고 사람들은 댓글로 가려운 곳을 삭삭 긁어준다. 궁금하다. 그녀들이 조언해준 대로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마이웨이를 택한 며느리들의 후일담

“부당함이 극심했던 시기에 나는 일 년간 남편의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다. 남편의 가족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며느리가 찾아오지 않을 경우 그것을 강제할 만한 장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남편의 부모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현재 나는 남편의 가족들을 예의 바르게 대하지만 가부장제의 방식은 거절하고 있다. 가부장제의 성은 결혼 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견고했고 나는 말 그대로 고군분투했다.”

–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박소현

아닌 건 아니라고 또박또박 말해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결과는 시댁 식구와 안 보고 사는 것 정도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분들도 꽤 있다. 관계가 심하게 틀어진 경우라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가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파국을 감내할 용기가 있으면 관계가 극적으로 변화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처음부터 자기 캐릭터를 화끈하게 드러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웹툰 ‘며느라기’에 나오는 민사린의 형님 김서형은 할 말 있으면 그 자리에서 다 해버리는 타입이다.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다는 뜻에서 그녀는 ‘자기 인생 사시는 분’이란 영예로운 별칭을 얻었다. 나같이 소심한 사람들은 그 대범함이 부러울 뿐이다. 남편과 결혼 전에 이 부분에 대해서 오랜 시간 얘기했다면 좀 달랐을까.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의 저자 서늘한 여름밤(서밤)은 훌륭한 예시를 보여준다. 명절에는 각자 집에 가서 밥 먹고 오는 걸로 정리했단다. 그 덕에 악플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그녀는 끄떡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과 불화하더라도 자기가 행복한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리라.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출처: 서늘한여름밤
“평화? 나는 나인 채로 불화하는 게 나아.”



우리에겐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다. 시댁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랑받으려는 마음 대신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면 되지 않을까. 기시미 이치로는 그의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유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일세. 자유를 행사하려면 대가가 뒤따르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어…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선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가부장제 하에서 오는 압력을 가뿐하게 비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소심하다. 입만 살았을 뿐 틈만 나면 뒤로 숨는다. 그래서 지금껏 ‘불만’을 택해왔는데 이번 추석에는 손톱만큼 용기를 내서 ‘불안’을 택해볼까 싶다. 이번 연휴에는 시댁 식구 , 친정 식구 각각 1박 2일의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좀 과묵해지려 한다. 스마트폰 배터리 잘 챙겨야겠다. 남편이 불편할 처가 식구와의 여행에서는 할 수 있는 만큼만 대화의 다리를 놓겠다. 이렇게 다짐했는데도 내가 계속 무리하게 관계를 맺는다 싶으면, 다음 설에는 각자 식구 집에 가는 것도 고려해봐야겠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한테 미움이야 사겠지만, 나는 어쨌든 내 자신과 제일 잘 지내고 싶으니까. 다른 며느라기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눈앞의 어르신들은 언젠가 돌아가신다. 그분들이 빚어낸 풍경을 그대로 잇고 싶지 않다. 나는 가끔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게 척척 돌아가는 엄마가 있는 집을 그리워한다. 그곳에서는 늘 두 다리 뻗고 쉴 수 있었다.


한때 소녀였을 엄마는 언제부터 그렇게 부지런한 주부가 되었을까. 십 년 뒤, 누군가 내 하루를 찍어서 다큐로 보여준다면 나는 아마도 엄마의 부지런함을, 착함을 닮아 있겠지. 이대로 순응하며 살아간다면, 아마도.


원문: 김은화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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