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력'은 그런 영화가 아니다

조회수 2018. 2. 13. 15:5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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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물을 고의적으로 실패하는 사회물

개인적으로 〈염력〉을 보는 데는 상당한 결심이 필요했다. 관객들의 입소문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나만 당할 수 없기 때문에 추천을 한다는 웃지 못할 댓글들도 있었겠는가. 감독의 전작 〈부산행〉 역시 뭔가 투박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부산행〉은 분명 뼈대가 좋았기에 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가 이토록 평이 좋지 않은 것에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한 것이 문제가 아닌가 짐작했다.


그는 분명 능수능란한 감독은 아니다. 하지만 직접 본 〈염력〉은 만듦새는 투박할지언정 최근 한국 영화 중 사회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작품으로 보였다. 그것은 단지 이 영화가 용산 참사를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감독은 히어로능력물을 한국화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헬적화 시켜버린다. 시시한 영웅은 염력을 노인네 오줌 줄기처럼 사용하다 손쉽게 권력에 투항해 버린다.


영웅이 무력화된 슈퍼히어로물은 어떤 성장과제도 리비도의 발산도 성공해내지 못하고 관객은 멘붕에 빠져버린다. 생각해보면 어떤 히어로물에서도 〈염력〉처럼 찔끔거리며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장르를 달리했지만 감독의 전작 〈부산행〉의 화끈했던 좀비들을 한번 떠올려보라. 그렇기에 이 영화의 특이점은 바로 그곳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염력〉은 히어로물을 고의적으로 실패하는 사회물이며, 사회물로서도 대세를 배신한다.

장르도 시대도 배신한 영화


히어로물이 성립하는 근본적인 조건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자아만큼은 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비루할지라도 내 속에 들어 있는 가능성을 발현시켜 낸다면 위대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어떤 믿음/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그것조차 믿지 않으면 로또라도 당첨되기를 비는 마음을 완전히 버릴 순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히어로물은 기본적으로 성장에 대한 이야기인 경우가 많으며 소년·청년 주인공이 상당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히어로물 장르가 고도화됨에 따라 영웅의 캐릭터는 아주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고 있다.



욕망하지 않는 히어로


그런데 〈염력〉의 주인공 석헌은(류승룡 분) 신파의 주인공이 될법한 가난하고 늙은 아저씨이다. 그는 수십 년 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딸과 아내를 버렸으며 건물 경비원을 하며 소주 한 잔을 인생의 낙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바닥 인생이다. 그는 같은 건물에 있는 은행의 커피믹스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뽀릴 수 있으며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대충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미 믿음을 저버렸고 희망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그에게는 구조적으로 성장의 과제가 존재할 수 없다. 힘을 가지고도 겨우 나이트클럽에 취직하고 싶어 할 뿐이며 자신의 가족이 편안히 먹고살 돈을 바랄 뿐이다. 마술가가 되어 세계를 누비라고 권하는 것은 타인이며 그는 그에 대해 별 현실감이 없다. 석헌은 사실상 생존 이외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인물이다.

보수적 캐릭터의 입장에서 바라본 용산

 

공교롭게도 이 영화에서 류승룡의 캐릭터는 1000만 영화 중 하나였던 〈7번 방의 기적〉에서의 캐릭터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기에 가장 보수적인 캐릭터가 바로 두 역에 들어 있다. 〈7번 방의 기적〉에서의 바보 류승룡에 대한 열광은 장·노년층의 면책에 대한 책략에 가까웠다. 자신이 살아오며 저질렀던 모든 과오는 ‘딸과 가족을 위해 바보처럼 일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그들이 영화관에서 눈물을 흘리며 보냈던 모종의 항변이다.


하지만 자신을 바보에 이입하는 것은 산업화 세대의 희생자 전략으로서 보수적 대중들의 영악한 책략에 가까웠다(수년 뒤의 박근혜 정권 하 〈국제시장〉에서의 그들은 유화적이지만 좀 더 영악해지고 당당해진다). 영화 〈염력〉은 늙고 가난한 석헌들이 (당시 철거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을) 2018년이라는 지금의 시점에서 되돌아본 용산 참사에 대한 이야기로 읽으면 훨씬 쉽게 읽을 수 있다.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건물 경비원인 석헌은 어느 날 약수를 마시고 염력을 얻지만 자신은 그 힘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아내가 죽고 딸 루미로부터 연락을 받은 후, 딸이 철거 현장(누가 보아도 용산 참사 현장이다)에서 싸우고 아내 역시 그 현장에서 용역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딸이 현장에서 빠져나오기를 권하지만 딸은 포기하지 않고 싸움을 계속한다. 그즈음 자신의 힘을 알게 된 석헌은 딸이 위험해 처하자 딸을 돕고 조금씩 싸움에 참여한다.

갑자기 떨어진 힘


이런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염력은 석현에게 갑자기 떨어진 힘이라는 점이다. 그곳에는 어떤 성스러운 핏줄도 숙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힘의 성격은 언급했듯 2018년 현재의 그가 과거의 그에게 부여한 힘에 가까운 것이다. 이를 사회적 맥락에서 따라가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용산 참사를 돌아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의 정치 권력이 바뀌었고 석헌은 그 변화에 별 관련이 없다. 그렇기에 지금 사회의 변화는 석헌들에게 갑자기 떨어진 힘으로 느껴진다. 직접적으로 용산의 진실을 억누르던 정치 권력이 사라졌을 때 용산을 방관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석헌이 내뿜는 염력은 바로 그 시대를 되돌아보았을 때 느끼는 현재 그들의 정념을 상징한다.


석헌의 보수적 태도는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에 가깝다. 그가 싸움에 냉소적인 이유는 경험적으로 자신과 같은 힘없는 사람이 권력에 대항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승리의 시간이 있었을지라도 그 영광은 사실상 그의 것이 아니다. 그가 철거 현장의 어린 변호사를 불신하는 이유다.


50대로 장년층으로 보이는 그가 보기에 민주화로 인해 얻은 승리는 그 같은 변호사들이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힘을 소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힘을 가져본 적도 없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헛된 욕망을 버렸기 때문이다.

외면 뒤의 잔여물


용산 참사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국가에 의한 잔인한 폭력이라는 것을 석헌도 몰랐을 리는 없다. 다만 자신의 삶을 위한 교훈이 달랐을 뿐이다. 덤비지 말라. 권력에 대항했을 때의 결과는 바로 저기 망루에서 불타고 법정에서 짓밟힌 철거민이라고.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심리적 적응 기재였을 것이다. 차라리 힘을 가진 사람들을 따르라고. 의사의 사망 소견서도 법정에서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저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이지 않는 힘, 염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경험이 복잡한 존재, 인간에게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석헌은 자신의 능력을 가장 개인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려 했다. 자신과 루미가 풍족하게 살 정도의 돈을 벌려고만 했다. 나이트클럽에서 차력을 하며. 이는 우리 사회의 모든 능력자가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기에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그가 철거현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억압되어 있던 죄책감의 발로이다.


이 영화가 철저하게 오해받는 것은 그런 석헌의 마음마저도 신파로서 은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남을 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며 여전히 가족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철거민 역시 또 다른 자신이라는 것을 모를 리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석헌은 결국 그들과 함께 술 한 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마친다. 그가 기어이 경찰을 몰아내고 딸을 구하는 것은 그런 미안함과 후회가 뒤섞인 마음이다.


그토록 쉽게 경찰에 투항하는 것은 그것이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일이기 때문이며, 자신의 마음속 신기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얻은 그의 힘은 우리 모두가 가진 국민으로서의 권능이기도 하며, 지금은 힘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어느 순간 자신에게 힘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다. 그러기에 그의 투항은 자신이 그 힘을 사용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는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신파인가? 


이 영화는 많은 사람이 지적하듯 신파다. 하지만 이상하게 내가 감동받은 부분들은 딸을 구하려는 그의 절절한 의지가 아니다. 사실상 영화는 딸을 사랑하는 마음을 제대로 그리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석헌의 아무렇게나 사는 삶이 용산의 뒷골목에 다리를 내리고 그 풍경과 사람들을 지켜볼 때다. 감독의 투박한 연출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도 했지만 죄책감을 그려내는 데에는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석헌의 죄책감은 가난에서 출발한다.


희망 없이 어질러진 석헌의 더러운 방에는 진짜 가난의 냄새가 난다. 망루 주변 투쟁했던 골목 하나하나에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도심 한복판에 솟구친 석헌을 보며 우리의 도시가 모조리 용산을 짓밟고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너의 이름을〉에서 무언가 잊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일본인들의 후쿠시마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을 보여주듯 철거 현장에서 발휘되는 석헌의 초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그 시간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모두 ‘남일당’ 망루의 방관자들이기 때문이다.



염력은 그런 영화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염력〉은 탄핵 전후로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PRO-민주화’적 시대물에 비해 대단히 조심스러운 성찰을 보여준다. 〈1987〉이 아무리 유려하고 〈택시운전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더라도 회고적인 서사의 현재성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범 386 세대의 ‘우리가 해냈다’는 서사가 그 이전 세대가 〈국제시장〉에서 말한 ‘우리가 해냈다’는 서사와 근본적으로 얼마나 다른가? 그 둘 사이에는 민주화와 산업화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희생자로서 위치 지우며 슬그머니 인정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것까지 무척 닮아 있다. 대세를 따르는 것에는 큰 혜택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염력은 그런 영화가 아니다. 〈염력〉은 그 대세를 거스름으로 인해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그는 승리한 민주화의 역사를 성공한 386의 시점에서 기념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잊어야만 하는 사건을 가장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소환한다. 이 영화에 우리가 응답하지 않은 것은 장르적 관습을 배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용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우리는 그 부정의를 해소할 만한 전망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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