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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억지로 꿰맨 생과 사의 경계에서

조회수 2018. 2. 6. 18: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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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만나기를

영화 <천화>(2017)는 경계를 바라본다. 모든 사이에는 경계가 있고 그 선을 지나는 모든 것들은 왜곡 또는 차단된다. 삶과 죽음, 시간과 기억,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모두 그러하듯이.


어쩌면 <코코>(2017)와 대척점에 놓인 이야기일 것이다. 후자가 기억으로써 죽음을 초월한 유대를 그린다면 전자는 기억의 상실과 삶의 단절을 다룬다.


고승은 홀로 산에 올라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깊은 숲속에 다다르면 몸을 누이고 주변의 낙엽으로 보이지 않게 덮은 뒤 눈을 감는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흙으로 돌아가는 일.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 그게 바로 ‘천화((遷化)’다.

“제주도로 향하는 밤배 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캄캄한 바다로 뛰어드는 거지.”

법정 스님은 생전에 당신이 소망한 ‘천화’를 밝힌 적이 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여기 있으리라.



그 여자, 윤정


제주도에서 혼자 지내는 윤정(이일화)는 요양원 간병인으로 일한다. 그녀가 전담하는 환자 문호(하용수)는 매일 아침 창문을 바라보며 자위를 하는 치매 노인이다. 온갖 욕설과 추행에도 윤정은 해사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누구는 윤정이 제주도에 여행을 왔다가 정착하게 된 일본인이라 말하고, 누구는 윤정은 일본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소문이 그녀를 에워싸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윤정은 누군가를 향한 절절한 사랑을 타국의 언어로 독백한다. 그녀의 마음이 발화되는 유일한 순간이지만 어떤 이에게도 닿지 않는다.

윤정이 문호의 병실을 찾은 어느 날, 그녀의 앞에 욕쟁이 할아버지 대신 온전한 정신의 노신사가 나타난다. 문호는 툭하면 윤정을 불러내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죄를 늘어놓는다. 문호가 뱉는 기억인지 망상인지도 모를 말들은 윤정의 기억을 헤집고 정신을 좀먹는다.


윤정의 본업인 바느질 공예는 단절을 극복하고픈 욕구를 담고 있다. 실을 꿰어 잘린 천 조각들을 잇듯, 그녀는 뒤얽힌 관계를 가다듬고 자신의 시간을 촘촘히 엮으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뜻과는 달리 악몽이 현실의 틈을 비집고, 기억의 조각들은 하나둘 사라져 간다.


떠나요, 제주도, 검은 바다로


푸르고 맑은 제주도의 기존 이미지는 을씨년스러운 섬으로 전복된다. 바다가 둘러싼 제주는 육지로부터 고립된 공간이다. 짙게 깔린 안개는 시야를 차단하고 시커먼 파도는 위협적으로 철썩인다.


대문이 없는 제주도처럼, 극중 인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로의 땅을 밟는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고 개방적이지만 그만큼 배려와 존중이 결여돼있다. 무례한 질문을 던지고 원치 않는 간섭을 일삼는다. 그 중심에 종규(양동근)가 있다.

종규는 남의 집 곳곳을 둘러보며 등장한 이후 끊임없이 타인에게 손을 뻗는다. 초면인 수현(이혜정)을 선뜻 돕고 외로운 나온(정나온)과는 몸을 섞는다. 경계를 허물고 다니는 종규는 사실 스스로 만든 틀에 갇혀 고립된 상태. 칠 줄 모르는 기타를 굳이 들고 다니고, 소설을 쓰겠다며 앉아선 술만 마셔댄다.


자신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꾸며 살아온 종규가 윤정에게 흥미를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그는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한 윤정을 영혼의 동반자라 여긴다. 그러나 영적 교감을 중시한다던 종규는 윤정이 보여준 약간의 슬픔 앞에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혼자 있기엔 너무나 외롭고 둘이 있자니 온몸에 상처가 남는다. 마음을 줬더니 몸을 탐한다. 문을 열면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고 잠그면 밖에서 쉼 없이 두드린다. 타인에 대해 전부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모른다.


윤정은 이도 저도 아닌 불안정한 경계에서 한없이 가볍게 존재한다. 주변엔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맴돌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영혼들이 배회한다. 진실과 거짓,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윤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출렁이는 밤배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뿐이다.

현실의 모두가 그렇다. 가벼운 존재들이 겨우 서로를 얽어낸 것에 불과하다. 본질은 절단된 조각인 탓에 통할 수 없다. 꿰어진 실은 언젠가 삭지만 바늘이 지나간 자리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계속 다치고 아파야 한다. 그럼에도 애써 붙들고 있는 까닭은, 가볍게라도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다른 존재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천화>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채로 소멸하는 ‘천화’, 곧 죽음과 같다고 말한다. 이는 삶을 비관하고 죽음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다른 조각을 세게 잡아 당기거나 찢트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존재의 자각을 돕는다. 간접적 소통인 셈이다. 그로 말미암아 조금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도록. 검은 바다에 뛰어들지 않도록.

에필로그: 또 다른 단절


<천화>는 어렵게 만난 영화다. 상영하는 곳이 예술영화관을 포함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고, 그마저 심야 시간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조건이 맞지 않았다. 겨우 찾은 극장은 한없이 적막했고 먼저 앉은 세 명의 관객만이 암전 속에서 기척을 내고 있었다.


관객에 닿지 못한 채 막을 내리는 영화가 칠흑 같은 밤바다 앞에 선 윤정과 겹쳐 보였다. 고립과 단절을 이야기하는 작품마저 그 굴레에 묶여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소통을 성사할 수 있을까. 부디 많은 이들이 윤정을 만나기를, 그로 인해 존재를 둘러싼 경계를 자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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