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투성이의 외로운 두발 생물들에게 던지는 '뜻밖의 질문들'

조회수 2018. 1. 31. 15: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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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풍성한 오류'에서 찾고 있다.

우리는 왜 외로워야만 하는가


플라톤의 향연에는 <개구리>와 <구름>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등장해서, 누군가에게 끌리는 것은 전생의 반쪽을 찾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물론 마지막에 가서 소크라테스에게 옴팡지게 논파당하지만.


그럼에도 전생에는 우리가 한 몸이었다는 이야기는 그리도 아름다워서 이 이야기를 토대로 헤드윅의 가장 사랑받는 넘버 <The origin of love>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 주인공 헤드윅은 ‘우리가 어떻게 이토록 외로운 두발 생물이 되었는지’ 라고 노래한다.

자신의 반쪽이 곧 자신인 류현진 (아님)
진짜 반쪽은 이 분이셨다고 함 (아니었으면 좋겠음)

이건 아주 원초적인 궁금증이다. 대체 우리는 왜 이토록 외로워야만 하는가. 처음 이런 궁금증을 가졌던 순간을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돌이켰다. 기억으로는 네다섯 살 때였다.



내 생애 첫 질문들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조수석에 앉은 엄마 뒤편에서 나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달은 자동차를 따라오는 것처럼 움직였다. 다른 모든 사물들이 뒤로 빠르게 떠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달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 장면을 짧은 삶 동안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마음에 콕 박히듯이 신비했다

엄마, 엄마한테도 저 달이 우리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그럼.
나랑 똑같이 나무들은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고?
그럼.
사실 달은 지구에서 40만 km 떨어져 있으며, 그 크기는 3천 4백 km에 달하므로, 사람이 이동하더라도 실제로 달을 관찰하는 각도의 차이는 크지 않고, 따라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나는 엄마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발 더 나아간 질문을 했다.

그러면 엄마도 내가 지금 엄마 목소리 듣는 것처럼 내 목소리가 들려?
그렇지.
내가 엄마를 만지면 엄마도 나처럼 내가 만져져?
당연하지.
엄마도 내가 말하려고 생각하듯이 생각하고 말하는 거야?
그래.

옆에서 동생은 베이비시트에 앉은 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정말로 이해가 안 되어서 막막한 기분으로 다시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엄마가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으니까 그렇지.
엄마는 어쩐지 대답이 귀찮으셨을지도 모른다

그 대답은 나에게 있어 전혀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바랄 수도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한 다음에도, 중학생이 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아주 어릴 적에 가졌던 그 질문은 나를 괴롭혔다. 나의 지각 밖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감각하고 사고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내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도가 무엇이지?

물론 데카르트처럼 답을 내진 못했다

언제쯤 그 궁금증이 스러졌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질문을 굳이 입에 담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던 기억은 있다. 아주 본질적인 궁금증들을 매 순간 떠올리며 살아가기엔 삶은 복잡했고, 매 순간 지루하면서도 불안하게 삶을 타격해 왔기 때문이다.


그 지루한 불안에 익숙해지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어른스럽게 지루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법을 익혀냈다.



어른이 된 내게 다시 던져진 ‘뜻밖의 질문들’


이 책은 당혹스럽게도 기껏 익혀낸 이 어른스러운 일상을 뒤집어서 처음부터 문제제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뜻밖인’ 일이다.


저자는 ‘뜻밖’이라는 말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의 ‘뜻’은 우리의 경험과 믿음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밖’에 대해서 의아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은 불편하다. ‘밖’이라는 바운더리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면 ‘안’도 유지되기가 어렵다.


처음에는 우리의 감각세계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키던 책은, 우리의 감각세계를 기초로 구성된 모든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인지, 존재할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사실인지, 우리의 시각과 사고는 믿을만한 것인지, 심지어 사실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 의문은 공감과 연대, 마음과 영혼, 사랑과 삶에 이르기까지 나아간다.

우리가 통 속에 든 뇌라면? 그리고 어떤 미친과학자가 그 통 속에 자극을 주고 있는 거라면?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같이 불편했다. 그것은 내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념이란 내 감각세계를 넘어서는 법칙이 존재한다는 믿음 위에 세워지는 구조다. 그것은 단순한 믿음을 넘어서는 관찰과 축적의 결과다. 끊임없는 관찰의 결과 수치화한 1G라는 중력의 이름이 그렇고, 갈릴레이가 목성의 궤도를 그림으로 그려가며 발견해 낸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 관찰과 축적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감각세계를 신뢰함과 동시에 우리 모두가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전제를 강화시키는 상호작용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질문들 앞에서 나는 외로웠다. ‘왜 책상 위를 흘러내린 물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는가?’ 라는 질문에 ‘중력, 중력 때문이지!’ 라고 호쾌하게 대답할 수 없어서 너무도 외로웠다.


중력이란 그 자체로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들에 대입했을 때 하나의 답으로만 도출되는 관찰 결과다. 그러므로 ‘지금껏 계속 떨어졌기 때문에 중력이 있다고 믿는 거 아니냐’는 되물음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사실 2015년 LIGO는 중력파 검출에 성공하였으며… (탕)

무엇보다 감각세계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해 되묻는 매우 본질적인 질문들 앞에서는 네다섯 살배기 아이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쌓아왔던 인류의 모든 역사와 발견들이 나의 감각세계 안으로 응축되어, 실존을 의심당하는 경험은 어떻게 해도 유쾌할 수는 없다. 서로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어왔던 모든 존재들이 ‘정말?’ 이라는 의문 하나만 놓아두고 내 삶 밖으로 툭툭 떨어져 나갔다.



춥고 외로워도 때로는 환기가 필요해


물론 저자가 지구평면설을 신봉한다거나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까지 끄집어내게 만드는 이유는, 이토록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질문들의 다발이 그야말로 ‘뜻밖’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게 바깥은 어디까지인지, 안쪽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정말 안쪽이었는지. 삶에서 얻어왔다고 믿어왔던 것들, 인류라고 생각한 동질의 종이 얻어왔다고 믿어왔던 진리들을 모두 내려놓은 채 눈을 감고 처음부터 삶을 되짚어나가는 과정은 무척 외롭다.


그러나 그래서 산뜻하기도 하다. 창문을 꼭꼭 닫고 따뜻한 방안에 누워서 귤을 까먹는 건 행복하지만, 언젠가 창문을 열고 서늘한 바람을 집 안에 들어오게 하지 않으면 환기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이 책은 ‘뜻’의 창문을 열고 ‘밖’ 공기를 마음에 불어넣는다. 바깥 공기는 외롭고 맑다.

이불 밖은 위험하지만 때론 환기가 필요해



풍성한 오류가 나를 증명한다


‘진리의 앙상한 가지 대신 풍성한 오류의 바구니를 넘겨 달라’는 문장을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다.


어쩌면 당신과 내가 서로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오해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실재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노력해서 타자를 위해 할 수 있다는 것이 기껏해야 ‘나였다면 어땠을까’ 수준 이상으로 다다를 수 없다는 뼈아픈 발견. 우리의 영혼이 실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이 모든 것은 어떤 ‘진리’도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삶을 좀 더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는 풍성한 오류를 건네주고 있을 뿐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생각보다 쉽게 설명되기도 한다는 걸 어릴 때 엄마의 대답에서 배웠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조차도 신의 존재를 고민했다. 오로지 자신의 감각으로만 세계를 파악하는 이 외로운 두발 생물들은 신에게조차도 완전하게 마음을 의탁할 수 없다.

마더 테레사도 신의 존재를 고민했다. 신에게 의탁하는 것이 쉬운 해답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오히려 이 책은 그 증명을 ‘풍성한 오류’에서 찾고 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되돌아보는 외롭고 나약한 자신, 그렇기에 확신하고 무지르듯 결정할 수 없는 자신을 그 자리에 온전하게 놓아두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곳에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가장 큰 근거일지 모른다.



‘옳음’의 순간을 위하여


나는 앞으로도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서 살 생각이다. 세상에는 옳고 그른 것이 있고,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 위해서 잊어서는 안 될 태도가 있다. 나의 ‘옳음’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 찬란한 선의는 마치 핵폭탄의 찬란한 빛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옳음’의 순간을 위해서 이 책은 우리의 책장에 꽂혀 있어야 한다.


그저 자기 몸을 통해서 감각하고 경험하며, 심지어 판단하는 수많은 인간들이 지금도 세상에 부딪히면서 새롭게 그 감각세계의 경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은편에 있는 자들의 눈 속에서, 혹은 옆에 서 있는 자들의 눈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바로 ‘바깥’에서 온 질문들이다.

마치 소인국에 나타난 걸리버처럼.

얼마 전에는 망원경으로 달을 보았다. 달을 본 날은 음력 12월 3일이었다. 오른쪽으로 가느다랗게 붙은 하얗고 예쁜 눈썹달을 보았다. 그러나 초승달은 오른쪽으로 붙은 모양이 아니다. 남반구에서는 아마 반대로 붙은 초승달을 보았을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 지구의 남쪽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초승달, 내 바깥의 세상을 상상했다. 분명 그 달도 아름다웠으리라.

출처: DAUM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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