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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신과함께”, 기형적인 영화의 치밀한 계산

'지옥행 테마파크'를 스윽 지나가는 영리한 영화 <신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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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 <신과함께>에 대한 후반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용누설을 원하지 않으시면 이 글을 닫아 주세요.


<신과함께>를 보게 되었다. 이로서 최근 개봉한 3편의 한국영화 <강철비>, <1987>, <신과함께>를 모두 보게 되었다.


3편 모두 대중영화로서 크게 흥행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지만, 재미있는 점은 사람들 사이에서 별말이 오가지 않았던 <신과함께>가 조용히 천만이상의 관객이 들었다는 점이다.(현재는 1,300만 명을 뛰어넘었다)

<신과함께>는 솔직히 낡은 이야기이다. 의인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권선하고 죄의식을 사면받는 과정에서 한없이 신파에 빠진다. 동명의 뉴미디어 웹툰의 뉴매체성과 화제성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제작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기본설정을 제외하고는 웹툰의 내용과 별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수많은 웹툰 기반의 영화들이 실패했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 부분에서 이 영화는 매우 영리하게 조율되어 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잘 만들어진 두 영화에 비해 꽤나 도전적인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강철비>와 <1987>은 기본적으로 물 들어올 때 배를 저은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대세를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간 작품에 대해 한 표를 주는 것이 그리 이상한 선택은 아닐 것이기에 말이다.


<신과함께>는 분명 흥행이라는 관점에서 ‘선택’과 ‘집중’에 성공했다고 본다. 제작자가 원작에서 본 가능성은 cg를 통해 ‘지옥을 경험한다’라는 것이 주는 원초적 에너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인간이 온전히 지옥을 체험한다면 유쾌한 경험으로 남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측면에서 영화는 핵심이 되는 시각적 체험을 적당히 피해감으로써(이 조절이라는 것이 상당한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의 불쾌함을 줄이려고 한다. 왜냐하면 슬래셔 영화가 한국사회에서 1000만 영화가 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진정한 체험보다는 지옥행 테마파크를 그냥 스윽 지나가는 전략을 쓴 것이다.

테마파크 지옥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과함께>는 지나치게 열심히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니 기형적인 외양을 띌 수밖에 없다. 한국의 서비스산업의 과잉 친절의 기괴함과 묘하게 닮아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한편에선 그렇게만 이야기하기에는 이상하게 용기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과함께>가 웹툰의 내용을 따르지 않은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많은 웹툰 기반의 영화들이 실패한 이유는 늘리고 늘려진 웹툰의 시간을 2시간 내외의 영화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미생>이 성공한 것은 <미생>의 대사를 그대로 복제할 수 있는 시리즈물이었기 때문이다. 엄연히 다른 매체인 만큼 웹툰에서 영화적인 것을 찾아내는 적극적 변환과정이 필요하다.



1.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을 이끌어 낸다. 또한 사회는 그 관념에 당대 도덕을 입히고 사람들을 위협해 통합의 계기로 삼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적 사고가 다양한 사후 세계에 대한 상상과 연계되어 있으니 그에 대한 서사는 인간 조건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볼 수 있다.


갑작스레 지옥으로 향하는 것은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칠(수도 있는^^) 일이기에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로 이끌려 들어간다. 이러한 설정을 cg 기술을 이용해 좀 더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웹툰에 비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비교 우위의 부분이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우리 관념에 뿌리박혀 있는 단 0.1%의 가능성마저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내지는 못하기에, 꿈속에서라도 두려워 할 것이다. (현대 종교의 역대급 흥행성공은 아마 이런 맥락+커뮤니티 서비스가 주된 요소가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분명 보편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는 꿈의 공장이라 하지 않는가?



2.


하지만 그런 측면에서 제작자들은 영화의 시각적 체험이 사람들을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지옥에서의 잔인한 형벌을 대사를 통해 관념적 전달은 하되 시각적으로는 잔인하지 않게 꽤나 절제되어 표현되어 있다.


가끔 노출되는 짓밟히고 깔려 죽는 모습은 멀리서 지나가며 보여준다. 가까이서 묘사할 때는 형벌의 고통을 재빨리 스쳐 지나간다. 지옥 세계의 장렬함과 장대함은 전달하되, 지옥 그 자체를 특정 강도 이상으로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신과함께>의 지옥은 이렇게 판타지 세계처럼 묘사되거나 아예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재판장면은 잘잘못이 명확해 검사들을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재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테마파크의 수많은 장애물들이 요식행위인 것처럼, 이 재판들은 모두 요식행위이다.



3.


그러다 보니 이 영화의 서사는 기형적이다. 서사는 거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테마파크의 서사들이 빈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그 지옥 속으로 들어가서 모험을 할 최소한의 명분만 만들어 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감독은 꽤나 지속적으로 비슷한 서사 전략을 사용해 왔던 것 같다. (<미스터 고>, <국가대표>, <미녀는 괴로워>) 가장 좋은 예는 <국가대표>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4.


 <신과함께>의 서사는 <국가대표>와 정확히 일치한다. 영화 <국가대표>는 미국 스키점프 국가대표였던 하정우가 입양으로 헤어진 엄마를 찾아 한국에 돌아온다. 하지만 그건 그저 이야기를 밀어가고 있을 뿐이다. 다른 멤버들의 가정사도 그저 나열식 신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감독은 아주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묘사되는 스키점프 장면의 시각적 효과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스키점프를 하며 바라보는 세상과 마치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을 전달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큰 체험적 쾌락을 줄 것이라 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 역시 점프 장면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서사는 단순해서 괜히 엄마만 찾아 헤매다 어느 순간 이야기는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다.

<국가대표>의 하이라이트였던 스키점프 장면

<신과함께>는 여기에 더해 개연성을 제거 조절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지옥의 시각적 효과가 절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지옥에서의 재판이 개연성이 높거나 복잡한 도덕적 문제를 안고 있다면 지옥에서의 경험은 좀 더 현실감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의 완벽한 선인에 가까운 평면적 인물을 두고 별 의미 없는 재판을 치루어야 한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갈등은 마지막 재판에서의 어머니와의 에피소드이지만, 사실상 그것조차도 누구도 그 결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완벽한 선인에게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어머니로부터의 용서’라는 과정도 하나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예정된 마지막 코스를 지나 공포체험을 마치고 안전하고 상쾌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5.


<신과함께>는 볼거리를 위해 서사를 희생시킨다. 하지만 그 볼거리마저도 희미하게 보여주다 보니(<국가대표>에서는 스키점프장면을 정말 시원하게 보여준다) 도대체 이게 작품적으로 무엇을 위한 영화인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 정도로 기형적이다.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누구도 작품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영화관을 점령했고, 급기야 천만 관객을 훌쩍 넘어 버렸다.


그는 분명히 낡은 이야기를 영리하게 새롭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와 영상의 짜임새라는 상식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나는 이것도 이것대로 꽤나 용기 있는, 혹은 무서운 선택이라고 본다. 대세를 따르는 영화들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6.


감독은 ‘사람들은 신기한 구경을 좋아하고 그것은 언제나 유효한 흥행전략’이라 보고 있는 것 같다. 격변하는 정치의 계절, 응어리진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해소되는 바로 그 시점에도 그는 묵묵히 볼거리를 만들어 내며 스스로를 증명해 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노무현을 팔아볼까?’, ‘북핵 위기를 팔아볼까?’ 고민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말이다.


평론가들은 왠만해선 그의 작품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가는 감독의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냉소주의인가 아니면 그저 자본의 논리에 맞춰 그저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영화를 만들면서 이토록 허영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감독은 영화라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바닥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고, 그 단순한 어떤 것이 문화적으로 고도화된 사회에서도 다수 대중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효한 코드라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해 내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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