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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음식이 음료수가 된다면?

조회수 2018. 1. 17. 17: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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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껍질을 까는 것조차 내게는 고된 노동이다

그래. 나는 초등학교 내내 개근상을 탔을 정도로 모범적인 사내였다. 하지만 나에게도 숨겨준 비밀이 있었으니. 집에서는 나무늘보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겨울방학이 되면 더욱 심해졌고, 이불 밖은 전쟁이라도 난 듯 꼼짝하지 않았다. 게으르다는 생각마저 부지런하게 느껴질 게으름. 그것이 나의 숨은 정체다.


 

먹기도 귀찮아… 모두 음료가 되었으면


귤껍질을 까는 것조차 내게는 고된 노동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킨다. 어째서 음식을 먹을 때 움직여야 하며, 젓가락이라는 무거운 기둥을 들어야 하는가.


이럴 거면 ‘차라리 세상 모든 먹거리가 음료수가 되었으면’이란 생각을 해본다. 가여운 손가락. 나는 귤껍질을 몇 개 벗기지 못하고 전기장판 위에 쓰러진다.

얼마간 잠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멀리 희미하게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골에 사는 삼촌이 고구마와 땅콩을 보냈다고? 마침 배가 고팠던 나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역시 겨울에는 고구마 음료지…

나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봐도 이것은 캔이 아닌가. 왜 알루미늄 호일로 캔을 싼 거지? 엄마는 식기 전에 먹으라며 ‘해남 자색 고구마 라떼’를 한 캔씩 주었다. ‘에이, 장난이 지나쳤어’ 맞장구를 쳐주기 위해 뚜껑을 열었다. 맙소사, 정말 고구마다.


해남 자색 고구마 라떼에서는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맛이 났다. 군고구마의 검은색과 노란색 사이에 있는 빨간 중립지대의 맛. 고구마는 우유와 같이 먹으면 좋은데, 우유를 미리 섞는 센스라니.


아무리 그래도 ‘우도 땅콩 라떼’는 너무 했다. 신께서 내 소원을 이뤄주신 건가? 그렇다면 왜 하필 이 소원을 이뤄준 것인가요. 눈물을 머금으며 우도 땅콩 라떼를 마신다. 이 걸쭉한 달콤함은 땅콩 카라멜 사탕 맛이다.


가족들은 마치 전부터 그랬다는 듯. 해남 자색 고구마 라떼와 우도 땅콩 라떼를 호호 불어가며 마신다. “왜 입맛이 없어?” 아빠의 물음에 나는 겨울이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 수박! 수박이 최고지! 아빠는 허허 웃으며 냉장고에 갔다.

 


그리고 고창 수박 에이드를 꺼냈다


여름에 누가 수박을 음료로 담가놓은 것일까? 아빠는 칼로 수박을 썰듯 줄줄이 연결된 고창 수박 에이드의 포장을 풀었다. 나는 소리쳤다.


“이건 정말 꿈이야! 이건 수박이 아니라고.”

수박이었다. 빨대로 꽂아 마시는 ‘고창 수박 에이드’에서는 수박의 깊은 향내가 났다. 빨대를 힘차게 빨수록 수박을 빠는 건지, 수박 주스를 빠는 건지 모를 정도다. 그것은 아마 수박바 같은 다른 음료와 다르게 시큼함이 더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수박은 과일로 먹어야지!”

나는 도망치듯 내 방으로 달려갔다.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해. 이불에는 내가 까다만 귤이 있을 테니까.


 

그래 여기 있다… 귤이… 다름아닌 음료수로…

나는 자리에 굳어버렸다. 상자에 담겨있던 귤, 심지어 귤껍질까지 음료수가 되었다. 나는 패닉이었다. 음료 이름이 ‘프레주 한라봉’이라니.


너무했다. 우리 집은 감귤만 먹는데! 성분표에 한라봉 과즙보다 감귤 과즙이 더 많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한라봉은 캔 뚜껑이 열리기도 전에 과즙 알갱이가 트로피카나를 외친다. 하지만 정작 마셔보니 탄산이 없다. 마트에서 자주 사는 감귤주스의 맛보다는 레모네이드의 깔끔함이 느껴진다랄까? 잠깐 정신 차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귤주스인지 레모네이드인지.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린다


엄마다. 나는 따뜻한 이불 안에 숨어 귀를 막았다. 하지만 엄마의 노크소리는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똑똑똑. 똑똑똑똑. 방문은 열리고 말았다.


“아들 공부하니? 사과 좀 먹으면서 해.”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음료수다. 엄마는 쟁반 위에 깔끔히 정리한 ‘밀양 사과 에이드’를 가져왔다. 대체 왜! 하나 같이 특산지에서 가져온 것인데!


내가 임금님이 된 것도 아닌데 팔도의 특산물이 음료로 찾아오다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세상이 미쳤어.

 


악몽같은 집을 뛰쳐나왔다


경찰서에 가야 할까, 119를 부를까? 나는 가로수에 숨어 길을 살폈다. 가로수에는 열매가 달려있었다. 열매는 음료였다. 건물 또한 음료수의 모양이었다. 아니 세상은 무엇이 음료수고, 무엇이 음료수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나 자신 또한 음료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빨대처럼 생긴 섬광이 내려와 나를 비춘다. 나는 눈을 감는다. 쪼르륵. 몸이 붕 뜨는 기분을 느낀다.


 

얼마간 잠에 든 걸까?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아니 이불에 두었던 감귤이 터진 거구나. 목이 바싹 마르다. 엄마, 아빠… 가족들의 이름을 불러보다가 나는 자취생임을 깨닫는다. 생수, 생수가 필요하다.

냉장고를 열었다. 그곳에는 어제 세븐일레븐에서 사 온 음료수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해남 자색 고구마 라떼, 우도 땅콩 라떼, 고창 수박 에이드, 밀양 사과 에이드, 한라봉이 날 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븐일레븐, 출연료
해남 자색 고구마 라떼, 1200원
우도 땅콩 라떼, 1200원
밀양 사과 에이드, 1300원
고창 수박 에이드, 1300원
프레주 한라봉 제주감귤, 1000원


원문: 마실 수 있는 모든 것 ‘마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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