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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장자연, 불평등의 화신

이번에는 저 짐승들을 반드시 잡아 족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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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이해하고자 할 때 습관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성장, 수출, 기업, 시장, 경쟁, 고용, 금융, 수익, 아파트 가격, 주식시장 등이 그것이다. 이런 걸 쫑알거리면 경제에 대해 좀 안다고 쳐 준다. 대학에서 배우는 경제학 교과서도 이런 용어로 권위를 대신한다. 경제학 교수 스스로도 이런 것을 배워야 경제학을 공부했다고 굳게 믿는다.



1. 경제사기꾼, 지적 맹인, 경제신학자


앞글에서 지적했듯이 주식시장은 합법적 노름판이고 부동산 시장은 ‘인권’을 매매하는 비인간적 시장이다.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다면 공동체는 그에게 비바람을 피할 최소한의 권리 정도는 주어야 한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잖아!


근사한 한자어로 포장하지만 ‘금융(金融)’ 역시 ‘돈놀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쉽게 말해 ‘일수놀이’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취하는 활동들 모두가 그리 자랑스런 건 아니라는 말이다. 경제학자 중에 도덕과 경제를 굳이 분리하고자 하는 ‘경제사기꾼’이 많아 일부러 넣은 문단이다.

경제사기꾼들은 이런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수출시장 외에 내수시장(domestic market)이 존재하며 경쟁시장 밑에는 독점시장과 불공정거래가 똬리를 틀고 기업 안에는 노동자가 살아 숨 쉰다. 경제사기꾼들의 눈엔 이런 게 보이지 않는다. 지적 맹인들이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의 특징들인데, 이들을 나는 이처럼 경제사기꾼이자 지적 맹인이라고 부른다.


물론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들은 시장이 조화롭다는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다는 점에서 ‘경제신학자’이기 하다. 기계체제(mechanism)으로서의 시장은 비도덕성과 불공정의 문제를 해결해 인류의 조화를 완성시킴을 미이~읻습니다!



2. 불평등과 근대문화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는 성장이 유발하는 불평등을 인식할 능력이 없고 이해하지 못한다. 이와 비슷하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단된 고용의 내부사정을 외면한다. 성장하면 불평등과 노동분단도 시장의 메커니즘에 의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사회는 ‘인권’(human right)이라는 새로운 문화 위에 서 있다. 적지 않은 사람이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를 근대문화의 요체로 거론한다. 경제 영역과 사회관계에만 집중하면 물론 틀린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근대문화는 도덕 영역에서도 새롭게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인권사상은 자유, 평등, 박애로 지지된다. 따라서 불평등의 해결은 근대사회가 짊어져야 할 도덕적 책무다. 나는 ‘근대화의 기수’들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그토록 불온시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불평등 문제만 거론되면 이들은 분열한다.


바로 앞글에서 나는 동질성을 가정하는 그들이 경제적 불평등(이질성)을 정당화하면서 정신적 분열을 피해 가는 수법을 폭로한 바 있지만 이 경우에도 그들은 대증요법을 마련해 놓았다. 이른바 19세기말~20세기 초 경제학 안에서 일어난 ‘가치판단 논쟁’을 통해서다. 수없이 인용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3. 불평등의 경제적 결과


인권사상 위에 선 근대사회가 해결해야 할 도덕적 과제로 불평등 문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불평등은 왜 해결되어야 하는가? 우선 ‘경제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케인스 경제학은 수요 주도 경제학임을 누누이 언급했다. 공급이 아니라 수요가 경제를 주도한다! 많은 수요 중 소비자들의 수요, 곧 ‘소비 수요’가 중요한데 이것은 벌어들이는 돈인 소득에 의해 결정된다. 쉽게 말해 많이 벌면 많이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많이 벌수록 그것에 비례해 많이 쓸 것인가 말이다. 그렇지 않은 게 문제다. 연봉 2,000만 원 노동자는 그것의 대부분, 예컨대 1,800만 원을 써야 생존할 수 있다. 이를 ‘(평균)소비성향(=소비/소득)’이라고 부르는데 이 노동자의 소비성향은 0.9로 매우 높다. 반면 연봉 20억 원인 상위 1% 부유층은 아무리 많이 소비해도 2,000만 원을 넘지 못한다. 소득이 10배 높다고 해서 돼지갈비를 10인분 더 먹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의 소비성향은 0.1로 매우 낮다. 나머지는 통장이나 금고에 쌓인다.

이게 바로 저축이다. 소비 수요가 부족해 장사가 안 되는데 원인은 바로 저축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저축을 줄일 수 있나? 처음부터 평등하게 분배하면 된다. 지나치게 많이 받는 고소득층의 월급이나 금융소득을 낮게 만들고 그로부터 해방된 소득을 저소득층의 고임금으로 분배하면 불필요한 저축이 감소해 소비 수요도 늘어나고 경제도 활성화된다. 불평등은 이처럼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못하다.



4. 불평등의 사회적 결과


베블런 경제학은 ‘불쾌한 구분(noninvidious distinction)’을 키워드로 선택한다. 유한계급(leisure class)은 과시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를 통해 자신을 허접한 계층과 끝없이 구분하고자 한다. 구분한 후 그들은 뻐기는 동시에 타인을 멸시한다. 그러니 기분이 나쁘다. 서로 비교하면서 흘긴다. 사회적 반목과 갈등이 심해진다. 일상이 스트레스로 가득 찬다. 이런 불쾌한 구분의 기획은 막대한 비용이 든다. 경제적 부가 집중될 때 불쾌한 구분도 가능해진다. 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사회적’ 결과다.



5. 불평등의 도덕적 결과


돈이 많으면 과연 ‘좋은가’? 좋음(good)은 도덕적 문제다. 돈이 없으면 실로 불행하다. 법정스님은 날 안 좋게 보시겠지만 경제학자인 내게 빈곤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다. 일정 수준의 돈이 마련되지 않으면 사람은 오히려 악의 구렁텅이로 빠진다. 매춘과 절도, 나아가 사기와 도덕 혐오 및 도덕 불감증에 쉽게 귀의한다. 빈곤은 그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주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감당할 수 있으며 합의하는 일정 수준의 소득은 ‘좋은 삶’의 물적 토대다. 하지만 그 이상의 돈이 좋은 삶에 기여할지는 의문이다. ‘이스털린의 역설’은 이에 대한 실증적 대답을 제시해 주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더 많은 소득이 행복에 기여한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우리는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더 많은’ 소득이 나쁜 삶을 강화시키는 사례들을 자주 목격한다.

출처EBS

상위 1% 부자들은 ‘돈에 치어’ 산다. 밑을 닦아도 소진되지 않는 돈 때문에 삶이 지겹다. 혹자는 뽕을 맞아 흐늘거리고, 다른 이는 도박으로 돈을 즐겁게 날려버린다. 20만 원짜리 식사 대부분을 남겨서 버리는 ‘호방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난뱅이 등신들아, 니들은 이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지질한 너네들의 세상과 우리의 세상은 달라. 


이것도 지겨우니 딴짓에 몰두한다. 인생은 유한하다. 따라서 쾌락도 유한하다. 죽기 전에 더 많은 쾌락을 즐기자. 섹스는 누가 뭐래도 가장 확실한 최고의 쾌락 아닌가? 죽기 전에 맘껏 해 먹자. 마누라가 있든 딸이 크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모든 게 시장이다. 섹스도 상품이다. 나는 어떤 가격을 치르더라도 최고의 성을 구매할 경제적 능력을 갖췄다. 내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상품을 구입하는 행위가 뭐가 잘못되었나? 톡톡히 가격을 쳐 주고, 스폰서도 되어 주겠다. 가난에 지친 여성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보라, 과연 이게 ‘좋은 삶’인가? 인류의 위대한 지성들이 이를 좋은 삶의 목록에 추가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이 들어 늙으면 그런 거 그만해도 된다. 노인들이 그런 거 자꾸 밝히면 아름답지 못하다. 인생에는 진정 좋은 것들이 많다. 유한계급들이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미덕, 정의로운 삶, 평등한 사회를 좋은 삶(eudaimonia)으로 제시한 적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요즘 장자연 사건이 재조명된다. 당시 나는 글로써 이들의 만행을 규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소재로 삼은 〈노리개〉라는 영화펀드에 후원한 적도 있다. 영화 시나리오는 별로였지만 그래도 실천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장자연 사건이 다시 조명되니 이건희 삼성 회장의 사진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이것이 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도덕적’ 결과다. 이번에는 저 짐승들을 반드시 잡아 족쳐 장자연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노리개로 악용되면서 숨죽인 수많은 장자연을 구해내자면 무엇보다 경제적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은 진정한 근대사회인 동시에 좋은 사회(good society)가 된다. 



추신


우리 역시 주류인 신고전학파 경제학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 사람들의 가르침에 따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경제사기꾼, 지적 맹인, 경제신학자, 급기야 도덕 불감증으로 돌변한다. 그 결과 불평등을 외면하며 더욱이 찬양하게 된다.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

참고 

  • 한성안 저, 『경제학 위의 오늘』, 왕의 서재, 2017
  • 한성안 저, 『인문학으로 이해하는 경제학 광장』, 서우미디어, 2015
  • 한성안 저, 『인문학으로 풀어보는 통계학』, 청람, 2013
  • 한성안 저, 『상식이 그리운 시대, 인문학으로 풀어보는 블로그 경제학』, 팩컴북스, 2012
  • 소스틴 베블런 저, 한성안 역, 『유한계급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1
  • 나영선, 이재열, 한준상, 이경묵, 한성안 공저, 『사회적 자본과 인적자원개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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