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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훈련'을 왜 남이 시켜주는가?

조회수 2017. 11. 23. 11: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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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克己)는 젊은이들의 마음속 깊이, 어딘가 두렵고 불편한 말로 남았다

언제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몇 년 전 어느 때, MBC <무한도전> 특집 주제는 무척 신선했다. 일명 ‘나 VS 나’ 특집으로, 1년 전 자기 자신이 만들었던 기록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멤버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었다. ‘작년의 나를 이겨라’.


그때는 단지 흥미로운 기획이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하고 넘어갔었다. 멤버들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낄낄대느라 바빴을 뿐, 남이 아닌 ‘나’ 자신 또한 경쟁 상대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을 꺼내어 깊게 생각해본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출처: MBC <무한도전>

나를 이겨라. 어디에서인가 많이 듣던 말이다. 언제였더라 … … 그래 맞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극기훈련’ 이랍시고 학생들 모아 수련회 가자, 할 때 많이 듣던 말이다. 당시에는 ‘극기훈련’이라는 단어 속 ‘극기(克己)’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따라가기 바빴다.


이동할 때마다 오와 열을 맞춰 다녀야 하고, 유스호스텔에 묵는 동안은 아침부터 밤까지, 무서운 교관들의 고성과 협박을 들어야 했기에 극기훈련이라는 것이 뭔가 ‘극한의’, ‘극단적인’ 뉘앙스를 지닌, 힘들고 고된 무엇이구나, 하고 짐작했을 따름이다.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사실 초(국) 중고 시절을 경험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극기훈련’이라는 이름의, 정체모를 어떤 행사에 참여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극기훈련’이라는 것이 별로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어쩌면 공통적인 사실일지 모르겠다.


어리기만 한 우리가 뭘 알면 안다고 그렇게도 군기를 잡아댔을까. ‘지금까지 교관이 만나본 학생들 가운데, OO학교 학생들이 가장 형편없습니다’ 등의 말을 들어가며 잔뜩 길들여져야 했던 과거의 이면에는, 그 당시 아이들이 납득 가능한 이유가 충분했던가.


 

극기(克己)는 젊은이들의 마음속 깊이, 어딘가 두렵고 불편한 말로 남았다


그리고 불과 1-2년 전, 극기에 대한 혐오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곧 헬조선 담론과 소위 ‘노오오오오오오력’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노력 만능주의 가치관에 대한 조롱과 환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일까. 이제 극기라는 단어는 그다지 좋은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듣는 이가 ‘꼰대’가 아닌 다음에야, 이제는 낡았으며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단어가 되고 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나 역시 소위 ‘극기훈련’ 피해자의 한 사람이기에 극기라는 단어를 싫어하였지만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나머지 매력적인 부분들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성장에 목말라하는 청춘들에게 흔히 들려주는 조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역할 모델(role model)’을 찾으라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사회 비교 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을 잠깐 빌리자면,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역할 모델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 나보다 더 뛰어나 보이는 사람과의 비교다. 능력적으로, 성과적으로 더 뛰어난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극을 받는 한편, 배울 점은 본받자는 발상이다.

둘째,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의 비교다. 소위 라이벌(rival)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어쩌면 우리를 가장 의욕적으로 만드는 것은 나보다 한참 뒤처지는 사람도, 나보다 아득히 뛰어난 사람도 아닌, 비슷하게 서로 치고 박는 경쟁자의 존재인지도 모른다.

셋째, 나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과의 비교다. 물론 이 경우, 이 사람의 능력 자체를 우리가 배우고자 함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미래에 있을 실패를 예방하는 것, 혹은 뛰어난 사람과의 비교로 무너져 있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 등이 이 하향 비교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타인과의 비교를 감수하지만 정작 받아 들게 되는 것은 비교로 인한 온갖 부정적인 결과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나보다 더 잘난 사람과의 비교? 자극과 동기부여보다는 열등감과 무기력을 낳는다.

출처: koreatimes.com

나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의 비교? 우리들끼리 열심히 비교하며 싸움하면 뭐하나, 닫힌 사회에서 개인적 성장의 기회란 지극히 제한적일 뿐이고 저 멀리 위에서는 금수저가 우리를 즐겁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과의 비교가 일시적으로 위안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타인의 불행과 무능을 보고 웃고 있어야 하는 내 처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따름이다.


사회 비교가 주는 여러 가지 이점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더 많았는지라 청춘을 만나는 이 시대의 멘토들은 결국 이런 조언이나 하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설프게 비교하다 멘탈 무너지느니 차라리 그냥) 남과 스스로를 비교하지 말라. 오직 소신대로 살라.


그러나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인간은 비교하기 위해 태어난 동물인 것을.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개인의 생존과 행복, 번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들을 얻는 것이 곧 비교하는 존재, 현생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진화심리학자들은 설명한다.


또한 타인과의 비교는 타인과의 공통점을 늘리고, 차이점을 줄이는 데 활용되어 결국 외로움을 달래는 데에도 유용했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그리고 한편, 비교 대상은 나의 현재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참조점(reference point)’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즉, 우리가 곧 성장을 ‘성장’이라 규정하고 그로부터 만족감, 안녕감, 자아실현, 성숙, 행복 등의 내재적 가치를 추출해내기 위해서는 성장 여부를 스스로 판단해낼 수 있는 일종의 ‘기준’이 꼭 필요하다.


따라서 비교 대상의 존재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내가 현재 어디까지 와 있는지, 얼마만큼의 성장을 이뤘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가면 될지를 가늠케 하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바탕으로 삶을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 제안 하나. 비교의 대상을 바꿔보면 어떨까? 상향 비교, 동등 비교, 하향 비교 모두는 나 자신과 타인과의 비교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타인과의 비교는 열등감, 무기력감, 스트레스, 불안, 자만심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낳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눈을 돌려, 과거의 나 자신과의 경쟁을 준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왜 꼭 다른 사람과의 비교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우리는 자극받을 수 있다. 그리고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아진 오늘의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고, 그것을 성장의 증거로 삼을 수도 있다.


괜히 다른 사람들 쳐다보고 눈치 보고 비교하느라 지나치게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 스스로를 담금질해가다 보면 혹시 아는가?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 바깥을 바라보았을 때, 어느새 내가 저 높은 곳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는지.

돌이켜보자. 10년 전의 여러분은 얼마나 유치하고 철이 없었는지. 5년 전의 여러분은 얼마나 아는 것이 없었는지. 3년 전의 여러분은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던 풋내기였는지.


1년 전의 여러분은 어쭙잖은 승리 하나 내세워 얼마나 고개 높여 자만심을 내세우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제의 여러분 얼마나, 잘나 보이는 저 사람과 스스로를 계속 비교해대느라 온갖 마음 다 상하고, 노력은 또 노력대로 못했었는지.


그리고 오늘은, 그런 과거들보다 얼마나 더 나아진 내가 되었는지. 이제 과거의 여러분과 지금 현재, 여러분 사이의 다리를 놓아보자(심리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자기 연속성(Self-continuity)이라 한다). 나와 나 자신 간의 비교를 통해 나의 성장을 직접 확인하자.


그리고 ‘극기훈련’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명심하자. 극기훈련은 남이 시켜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나를 가장 잘 아는 것도, 그와 경쟁해야 할 현재의 나를 가장 잘 아는 것도 다름 아닌 나 자신일 테니 말이다.


(여러분 스스로가 보기에) 어제보다 더 나아졌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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