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드시 빚을 갚는다: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저자와의 대화 후기

조회수 2017. 11. 22. 14: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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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최순실은?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한 저자의 역사 이야기

#그런데최순실은?


아직 박근혜가 대통령이고, 최순실이 어둠의 장막 속에서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그 어느 날. 한 페이스북에 이런 글이 올라옵니다.


”모든 포스팅 끝에 ‘#그런데최순실은’ 붙이기 운동을 제안합니다.”

이 운동은 유명 가수, 배우는 물론 서울시장, 현역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제안 당일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며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주류 언론들 또한 이에 주목했죠.


사실 박근혜 탄핵은 도화선이 워낙 많아서, 이 운동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그래서 관심이 떨어지기 십상인 ‘최순실’이란 이름을 끊임없이 끄집어냄으로써, 시민, 언론, 정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슈를 추적할 수 있게끔 해 주었죠.


그렇다면 이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이 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김형민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양치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놀이로. 농담 반.”


 

김형민 PD가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김형민 PD

김형민 씨는 SBS CNBC PD 입니다. 동시에 ‘산하’란 필명으로 유명한 블로거이기도 합니다. 그날의 역사를 오늘날 되짚어보는 ‘산하의 오역’이라는 연재물 또한 유명했지요. 최근에는 시사잡지 ‘시사인’을 통해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라는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중 2016년까지 연재한 100여 꼭지를 새롭게 손봐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라는, 같은 제목의 책으로 펴냈습니다. 갑작스런 추위가 내린 지난 11월 17일, 고대 앞 인문학 서점 ‘지식을 담다’에서 바로 그 김형민 PD와의 대화가 열렸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바로 ‘#그런데최순실은’ 해시태그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건, 정말 일상적이었던 어떤 행위라고 했죠. 놀이였고, 반은 농담이었다고요. 다음날 제주도에 갈 일이 있어 공항에 나와 있던 그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온 언론이 난리라고요.


지극히 일상적이었던 어떤 행위가 파장을 일으키고 날개를 단 것이죠. 그리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소소한 삶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총합이 역사가 된다. 우리의 일상이 역사가 된다고요.


 

친일파의 사정


친일파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왜 그들은 친일파가 되었을까요? 우리는 친일파를 어떻게 청산해야 할까요? 만일 그 시대라면, 우리는 친일파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때로는 인터넷 관심종자의 어그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분명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김형민 PD는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의 서두로 친일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김창룡

김창룡 전 육군 중장은 보안사 전신인 특무대 사람으로, 육군 중장이었습니다. 빨갱이라면 치를 떠는, 붉은 치마만 봐도 미친다는 사람이었죠. 그는 국내 좌익 척결, 숙군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람은 친일파의 대표격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빈농의 아들이었는데, 머리가 좋았죠. 워낙 똑똑하니까 여기저기 소개를 받아 가게 됩니다. 군청의 측량기사로, 만주철도회사 역무원으로, 관동군 헌병학교로. 그렇게 그는 헌신적인 밀정이 됩니다.


그는 가난했던 사람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10년 후에 태어났지요. 그런데 능력이 있었습니다.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말이죠.

배정자

배정자란 사람이 있습니다. 요화 배정자로 잘 알려진 그는 김해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역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 죽었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실명했습니다. 어릴 때 고아나 마찬가지가 되었지요. 그는 기생집 등을 전전하며 바닥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는,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교육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충직한 일본 시민이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거 때 식음을 전폐하고 경술국치때는 만세를 부를 정도로 말입니다.

박중양

박중양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의지의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원래 개화에 뜻을 둔 능력 있는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 당국이 개화파와 그 가족을 잔인하게 죽이고 고문하는 것을 보고 변하고 맙니다.


김옥균 같은 경우 암살 후 고종이 시체를 가져와 능지처참을 했는데, 이를 본 외국인들은 다들 치를 떨었다고 합니다.


박중양은 이것을 보고 돌아버렸습니다. 개같은 나라, 이런 나란 망해야 한다. 제국주의적 사고관도 갖게 됩니다. 그는 이후 최고위 친일파로 출세했는데, 일본인 판사를 작대기로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독립 후에도 “미국이 일본을 이겨서 독립된 것이며, 독립운동 덕이 아니다” “단상에 내 친구들이 여전히 많더라”며 비웃었다고도 하지요.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저자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의 삶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죠.


그들 중 일부는 바닥에서 살았습니다. 조선이란 나라의 가장 밑바닥에서요. 일부는 일본에서 교육받고 보살핌을 받았으며, 개인으로선 구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라에서 해준 게 뭐가 있길래, 하는 생각을 가졌을 겁니다. 또 일부는 신념을 갖고 있었으나, 조선의 전근대적 행태에 분개하여 전향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대한제국 헌법은 전제군주제이며, 영원한 권력을 보장하고 있었죠.


일제강점기에도 일상은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 나석주의 의거 때 은행원(동척) 한국인 직원이 이런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두렵지 않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까지 왔는데.”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은 그때도 있었던 것이죠. 그 인터뷰는 그렇게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참, 듣고 보니 틀린 건 아닌데, 뭔가 찝찝한 이야기죠. 여기에서 저자는 이야기를 180도 선회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의병들의 이야기

이것은 영국의 종군기자, 매킨지가 만난 의병들의 사진입니다. 그들은 매킨지에게 무기를 사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매킨지는 물론 거절했지만요.


이 사진을 보면, 양반 출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들 바닥 인생이죠. 증언에 따르면, 총들 대부분이 총알이 안 나가는 총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걸 들고 싸우러 나선 겁니다.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괜찮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낫습니다.”

매킨지는 그 모습이 측은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희망없는 전쟁에서 죽음이 확실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 생각이 잘못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애국심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고요.


친일파와 이들의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요.

김상옥

의혈남아, 김상옥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1천대 1 총격전이라는 영웅적인 활약을 보인 사람으로, 영화 ‘밀정’ 프롤로그의 캐릭터 김장옥의 모델이기도 하죠.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교회에서 공부를 한 기독교인입니다. 그의 사후 자식들은 굶어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북인들이 있습니다. 평안도 말입니다. 그곳은 500년동안 차별 받아온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조가 망하자 이 지역 사람들이 많이 나섰습니다. 이재명과 이동수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재명

이재명은 이완용 암살을 명동성당에서 내려오는 갈래길에서 수행하려 했는데, 인력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어 이동수란 사람을 찾아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갈래길에 숨어 이완용을 기다렸는데, 이재명 쪽으로 인력거가 다가왔다고 합니다. 당시 이완용은 인력거꾼을 덩치 좋은 사람으로 고용해 경호원처럼 썼는데, 이재명은 인력거꾼은 죽였으나 이완용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이동수는 도망친 뒤 끝까지 이완용을 노리다가 공소시효 만료를 며칠 앞두고 체포되었습니다. 그 이후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한 번은 이완용의 집에 하인인 척 들어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둘다 평안도에서 바닥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지요.

장인환, 전명운

샌프란시스코의 두 남자, 장인환, 전명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던 사람인데요. 그렇게 일하다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샌프란시스코에 마침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가 나타납니다. 조선은 일본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지요.


전명운이 처음에 총을 쏩니다. 하지만 싸구려 총은 총알이 제대로 나가지 않았고, 스티븐스와 격투를 벌이게 되지요. 그때 장인환이 총을 쏴 스티븐스를 죽입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공모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장인환은 복역 후 귀국하게 됩니다. 이후로 일제 감시를 받다가, 부인을 남기고 미국에 간 뒤 다시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살하게 됩니다.


 

무엇이 그들을 다르게 만들었나


왜들 그랬을까요? 무엇이 달랐을까요?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르겠다고요.


장인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죽음의 길을 알아야 한다. 내가 그를 죽이고 나도 죽으면 우리나라의 광영이며 우리나라 인민의 행복인 것이다.”

그걸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한 것이죠. 존경스런 일이며, 박수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전하는 저자 본인도,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이야기는 현대로 돌아왔습니다. 백남기 농민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신때 싸우다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이후 넝마주이를 하고, 머슴살이를 하며 살다가, 80년 서울의 봄 때 복교했지요. 그런데 그러고서도 중앙대생들을 이끌고 한강을 도강하는 등 민주화운동을 계속했고, 전두환때 또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라도 그 이력을 밑천 삼았으면 자기 인생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농민의 길을 택했고 농민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박근혜 정권에 맞서 가장 앞에 나섰다가 슬픈 죽음을 맞았지요.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못 참는 그런 dna라도 있는 걸까, 라고 말이죠. 결국,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가보다 중요한 것


사실 왜 그랬냐가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우리의 미래, 역사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미래에 어떤 결과를 도출했는가 하는 것이죠.


저자는 말합니다. 미국이 이겨서 독립됐다는 말은, 사실 사실이 아니라고요. 우리나라엔 참 이상한 기질이 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난리가 나면 윗놈들은 힘을 못쓰는데, 정말 그럴것같지 않은 사람들이 일어난다고요.


3.1운동 때 진주 해주는 기생들이 먼저 일어났고, 독립선언문 못 구하니까 직접 쓰기도 했으며, 걸인단이 생겨서 거지가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고요.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라는 독립국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철저히 황국 신민 교육을 받았습니다. 2차 대전 말 일본은 미군의 포로가 되면 끔찍하게 죽거나 강간당할 것이라면서, 류큐인들을 자살하고 서로 죽이도록 부추겼습니다.


독립국이었던 순간은 사라졌고, 그들은 일본인의 한명으로 죽어갔지요. 그러나 일본은 오키나와를 본토인처럼 믿지 않았기에 그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지요.


제주도 또한 일본 본토의 방어선 중 하나였습니다. 제주 인구가 30만이 될 때 일본군 7만이 주둔할 정도였지요. 어쩌면 제주 사람들도 비슷한 운명에 처해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독립시킬까 했지만 결국 일본 본토의 일부로 그냥 두게 됩니다. 한국은 달랐습니다.

카이로 선언 때, 장개석은 루즈벨트한테 한국을 독립시키자 얘기했다 합니다. 루즈벨트는 코리아가 뭔지도 모를 때 말이죠. 장개석이 착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윤봉길을 봤고, 독립운동을 보며 이걸 이용하면 좋겠다, 잘 싸울 수 있겠다 해서 나온 결과라는 것이죠. 미국도 한국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나름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나라다, 일본과는 다른 나라다, 라는 것이죠. 우리가 얘기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한국도 오키나와와 같은 길을 걸었을지 모릅니다.


 

역사는 냉엄한 채권자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것, 우리 글 쓰는 것 자체가, 자기 선 자리에서 일본 통치를 거부하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미국이 이겼기 때문에 독립이 되었단 건 잘못된 생각이란 것이죠.


저자는 이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역사란 냉엄한 채권자다. 시일의 길고 짧음이 있을 뿐 빚을 빌려 준 것은 반드시 받아낸다. 어느 추심 회사 직원 못지않게 잔인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독기를 발산한다.”

저자는 예전 소풍 앨범 이야기도 했습니다. 소풍 앨범인데 다들 교련복을 입고 있고, 아래엔 행군대라고 써있더라고요. 그건 소풍이 아니고 행군이었던 것이죠. 그때는 학생들에게 총검술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북한 하면 다들 으슬으슬 공포에 떨었죠.

해방 후 우리 조상들이 밟은 정말 현명치 못했던, 경솔하고 잔인했던 행보들. 분단은 그 결과였습니다. 역사에 빚을 졌기에 우리가 그 청구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저자의 아들도 마침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군대를 가야 되고, 북한하고 저래야 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상황이죠. 이건 누가 벌인 일일까요. 미국이 선은 그었다고 하지만, 미국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자는 그러나,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는 질긴 채무자다. 자신이 사람들에 빚진 것이 있으면 좀체 내주지 않으며, 찔끔찔끔 갚아 나가는 개념 없는 채무자다. 그래서 지겹다. 하지만 떼먹지는 않는다. 우리가 늙어죽을지언정 주긴 준다.”

촛불시위 때, 처음에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게 만일 더 커지지 않고, 얼마 안 나왔구나 하며 수그러들었다면 지금도 대통령은 박근혜일지 모릅니다.


이건 안 된다, 못 참겠다, 이게 나라냐 하며 하나 둘 계속해서 모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건 역사에 빚을 준 일이었습니다.

내가 역사를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능력도 많지 않습니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우리가 해야 할 몫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계속 들여다봐야 한다고요.


잘못을 그냥 두면 그 빚은 우리가 결국 감당해야 하며, 우리 아래 세대가 감당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중요하며, 우리의 일상이 곧 역사가 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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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왜 아들도 있으면서 제목이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가 되었냐는 질문에 저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그걸 앉아서 듣고 있겠냐?”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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