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정당화를 위한 나폴레옹의 노력

조회수 2017. 11. 10. 22: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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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폴레옹은 자기 나라의 국민을 글도 못 읽는 미개한 자들로 깎아내렸던 것일까?

나폴레옹은 1815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뒤 그의 열정과 분노, 아쉬움 등을 삭일 겸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직접 구술한 회고록이니 소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지만, 사실 그 회고록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당대는 물론 현대에도 그닥 높은 점수가 주어지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소싯적부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거짓말을 아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인생 노년기에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회고록의 모든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사이트 등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나폴레옹 회고록’. 사실 그의 친구이자 비서였다가 개인 비리가 적발되어 쫓겨난 부리엔의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도 부리엔 개인의 이해 관계에 따라 매우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의 회고록 일부에는 이런 주장도 있다. 나폴레옹 집권 기간 중 프랑스의 문맹률이 무려 96%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많은 역사가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부분이다. 이미 1680년대에 프랑스 인구 중 20% 정도는 자신의 이름을 쓰고 읽을 줄 알았다. 1780년 정도가 되어 그 비율은 37% 정도에 달한다. 특히 프랑스는 워낙 큰 나라다 보니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 전체의 정치 판도는 비교적 부유한 프랑스 북부 지방 인구가 좌우하다시피 했는데, 그 프랑스 북부 지방에서는 전체 성인 남자의 2/3 정도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왜 나폴레옹은 자기가 다스린 나라의 국민들을 글도 못 읽는 미개한 국민으로 깎아내렸던 것일까? 한마디로 ‘이런 미개인들을 이끌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려면 나 정도의 독재 행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정말 그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프랑스인은 미개했나


일단 프랑스 국민의 96%가 문맹이었다는 것은 나폴레옹 본인도 믿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1797년 7월 15일 북부 이탈리아 작전 중에 파리의 총재 정부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밀라노를 점령한 부대 병사들 사이에 회람되던 프랑스 신문 내용이 나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것을 보면, 프랑스 신문사는 영국에게서 뒷돈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그 신문사의 윤전기를 끌어내 박살을 내야 한다.”

아울러 참모장 베르티에 (Berthier)에게 병사들 사이 회람되는 신문이나 책자에 대해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애초에 전 국민의 96%가 문맹이라면, 당연히 부대원들 대부분도 문맹이었을 것이다. 그런 신문이 돌아다닌다고 그가 신경쓸 필요는 없다.


뿐만 아니다. 그는 1797년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제2차 동맹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작전에 들어갔는데, 바로 ‘언론과의 전쟁’이었다. 그는 1797년~1798년 사이에 자비로 무려 6개의 신문사를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신문을 찍어냈다. 물론 그 신문사 기사는 사실상 나폴레옹 자신이 구술한 것이다. 역시 국민 전체의 96%가 글도 못 읽는 미개인이라면 구태여 그렇게 돈을 들여가며 어용 신문사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르 모니퇴르 지도 나폴레옹의 어용 신문 중 하나였다. 사진은 워털루 전투 약 10일 후인 1815년 6월 27일자 신문이다. 패전 직후에도 황제 폐하라고 지칭하더니, 이 즈음 돼서는 불경스럽게도 황제 폐하라고 하지 않고 나폴레옹이라고 불렀다.

나폴레옹은 위대한 군사적 천재이자 황제니까 그가 지배한 국민들을 ‘미개하다’며 경멸하는 것이 당연한가? 사실 나폴레옹은 그의 국민을 경멸함과 동시에 무척 두려워하는 편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미개한 국민이 우르르 몰려와 유서 깊은 부르봉 왕조 루이 16세를 끌어내 목을 치는 것을 목격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국민에 대한 두려움을 이런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리옹에서 성난 노동자 2천 명을 상대하는 것보다 전장에서 외국 군대 2만 명과 싸우는 것이 더 쉽다.”

그는 두려운 미개 국민 통제 수단으로 총칼이 아닌 언론과 예술을 택했다. 그는 항상 언론을 검열하고, 통제하며 자신에 대한 반대 여론이 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애썼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언론 기사가 나가도록 어용 신문을 만드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가령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직전에는 73개였던 파리의 정치 신문사가 1800년에는 13개로, 다시 1811년에는 고작 4개로 줄었다. 이렇게 남은 신문사들은 물론 100% 어용 신문들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내부에서는 나폴레옹의 끊임없는 전쟁과 여성 추문, 어려워지는 국민의 삶을 비난하는 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언론 통제에 대한 나폴레옹의 굳은 의지는 1805년 그가 비밀 경찰 책임자인 푸셰 (Joseph Fouche)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내 이익에 반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인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푸셰의 모습이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사실 탈레랑, 푸셰, 그리고 캉바세레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비판 세력의 말살


그러나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 언론에 나오는 것이 과연 나폴레옹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었는지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나폴레옹도 사람인지라 그가 내리는 모든 결단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의 정책을 비판하고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는데, 그럴 수 있는 세력을 나폴레옹이 다 없애 버렸다. 나폴레옹의 정책은 한 번 잘못 되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좋은 판단이 아니었던 대륙 봉쇄령이나 스페인 전쟁, 그리고 결정타였던 러시아 침공 등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결국 이는 나폴레옹 자신의 폐위와 프랑스의 굴욕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에 건전한 언론이 살아 있었고, 나폴레옹을 견제했다면 오히려 나폴레옹 왕조는 더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비판 세력의 필요성은 나폴레옹의 밀수 품목을 봐도 알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시켜 놓고도 일부는 영란은행의 황금을 유출시키기 위해, 일부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영국과 밀거래를 용인하거나 적극 조장하기도 했다. 대개는 영국에 비단이나 고급 와인 같은 프랑스 제품을 팔고, 그 대가로 황금을 받아오는 형태였으나, 일부 품목은 영국제 상품을 받아왔다. 그 품목 중 하나가 바로 영국 신문들이었다. 나폴레옹 자신도 자신의 객관적인 평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신문뿐 아니라 책이나 팜플렛 등 모든 인쇄물에 대해서도 가혹한 검열 조치를 시행했다. 1810년, 이미 탄탄하던 ‘비공식 검열’을 공식화한데 이어, 1811년 10월 14일에는 아예 배포해도 좋은 서적의 목록을 공표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서적 출판 허가제를 도입한 셈이다.


그의 광활한 제국 내에서 문필가들은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들 감시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밀 경찰들도 바다 건너 영국의 풍자 만화가들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주로 영국에서 나오는 그에 대한 만평을 매우 혐오했고, 그것들이 주로 프랑스 망명 귀족의 재정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분노했다.


심지어 영국과 평화 협정이었던 1802년 아미엥 조약에서 나폴레옹은 영국 언론과 만화가들이 만들어 내는 자신에 대한 조롱을 살인이나 사기와 동일한 범죄로 다루어 추방해야 한다는 조항을 평화의 전제 조건으로 삽입하려 했을 정도다.

당시 영국의 만화. 방구 세례를 받은 초상화는 당시 영국 국왕이던 조지 3세다. 당시 영국 언론의 자유분방함을 엿볼 수 있다.

유럽 대륙의 문학을 주도하던 프랑스에서, 유독 암흑기가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집권기다. 나폴레옹의 문학 탄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시대에는 뛰어난 작가가 전혀 배출되지 않았다. 반대로 영국에서는 이 시기에 제인 오스틴, 키츠, 셸리, 바이런 등 유명 작가들이 많이 배출된다.


원래 나폴레옹은 나름 문학에 대해 취미가 있는 사람이어서, 책도 많이 읽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연애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 솜씨는 이런 연애 소설보다는 그의 전과 보고서에서 훨씬 더 빛났다. 전에 머나먼 다리편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의 로디(Lodi) 전투는 사실상 전술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 초라한 전투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전투 보고서와 르죈(Lejeune)의 멋진 그림을 통해 이 전투를 대단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 전투로 승화시켰다.

출처: 아르콜레의 용자
아르콜레 다리에서 전설적인 돌격을 선두 지휘하는 나폴레옹의 모습. 이 그림의 실제 사연에 대해서는 아르콜레의 용자 편을 참조.



문맹마저 통제하다


여기서 잠깐. 나폴레옹의 주장과 달리 국민 절반 정도가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해도, 국민 절반 정도는 정말 문맹이라는 뜻이 된다. 사실 문맹 국민에게는 인쇄물과 서적 검열은 별반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정말 미개한’ 국민에게도 나폴레옹의 여론 통제는 마수를 뻗쳤다. 바로 극장을 통해서다. 사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몰리에르와 라신 등 대문호들 덕에 연극에 대한 애호가 대단한 나라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이런 연극 열풍은 이어져 단두대를 피해 지하실에 숨어있던 귀족까지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극장 관람석을 몰래 찾을 정도였다. 이런 연극 공연은 책에 비해 이해하기 쉽고 감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나폴레옹은 연극 내용 통제에 직접 펜을 들 만큼 세심하게 관심을 가졌다.


가령 1805년 나폴레옹은 밀라노에서 푸셰에게 편지를 써서 프랑스의 성군인 앙리 4세를 주제로 한 새로운 연극을 취소하라고 지시했는데, 이유는 너무 근대의 일이라서 관객에게 ‘필요없는 열정’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바르샤바 입성 직전이던 1806년 말, 당시 매우 바쁘고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푸셰에게 또 편지를 써서 레이니에르(Reynier)의 연극 ‘성전 기사단’에 대해 비평했다. ‘성전 기사단’을 화형에 처한 프랑스 왕 필립이 독재자가 아닌 ‘국가의 구원자’로 그려져야 한다고 타박하는 세심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연극 공연은 사실 관람료가 꽤 비싼 것으로, 중산층 이상에게나 주어지는 문화 혜택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연극 공연이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문맹 서민에게 연극이라는 도구를 활용하고자 집권 초기인 1802년 8월 15일 그의 생일 축하일 때부터 특별한 기념일이나 행사에 자주 공짜 공연을 베풀었다. 이런 특별 무료 공연은 그가 1814년 권좌에서 내려올 때까지 12년 간 무려 28번이나 펼쳐졌다.

작년 파리 여행 때 제가 직접 찍은 오페라 가르니에 내외부의 모습. 이 아름다운 극장은 나폴레옹 3세가 지은 것으로, 나폴레옹 가문과 극장의 인연은 참 질긴 것 같다.



존경을 짜내다


사실 나폴레옹이 국민을 미개인이라고 비웃고 깔보았다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권력이 근본은 총칼이 아닌 프랑스 국민의 지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국민의 눈을 가리고 존경을 쥐어 짜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것이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앙리 4세’ 연극의 취소를 지시하는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푸셰에게 ‘정부가 간섭한다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막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국민이 두렵지 않았다면 그냥 ‘미개한 국민은 황제의 칙령을 받으라~ 연극 취소하랍신다~’ 같이 일방적으로 선포했을 것이다.


미개하든 미개하지 않든, 국가의 주권과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국민 여론이 방송, 일부 신문사의 선동질이나 여론 조작에 휘말리는 것도 문제지만, 특히 공영 방송이 정권의 의향에 좌우되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민주국가의 핵심 요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건 보수나 진보 양쪽 모두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보도에 있어 중립과 공정이라는 것의 정의 자체가 매우 모호하므로 양측 모두에게 할 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공영 방송이 정권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모두 동의하리라 믿는다.


원문: Nasica의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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